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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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공간은 오로지 황망한 카페 뿐이다. 그 곳은 내가 거의 매일 들르다시피 하는 카페와는 사뭇 달랐다. 적어도 카페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라 하면 점원과 손님, 그리고 테이블과 의자가 아닐까. 그러나 이 공간이 충족하는 것은 테이블과 의자, 단 하나뿐이었다. 그런 곳을 카페라고 명명할 수 있나 싶었지만, 이 곳을 카페라고 정의했기에 내게 울렸던 메세지를 생각하면 이 곳은 반드시 카페여야 했다.

 

여자 셋, 남자 셋. 총 6명의 무용수와 의자, 테이블뿐인 조촐한 카페만이 등장하는 이 영상은 신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라는 작품이다. 한 공간에 여러 사람이 존재하고, 그들은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주어진 제 몫의 행위만을 꿋꿋이 이어나가고 있다. 어떤 한 남성은 온몸을 꺾으며 드러눕다 앉았다 다시 일어서 어디론가 뛰어가고, 그 주변을 맴도는 두 명의 남녀가 그를 쫓는 듯, 그에게 쫓기는 듯 따라다니며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다른 남성은 한 여성을 힘껏 들었다 바닥에 내팽개치고, 그 후의 여성은 의자에 앉아 옷을 벗고 이내 도로 입는다. 그리고 남은 한 여성은 춤에 무지한 누군가가 보기에 그 6명 중에서 가장 춤이라고 할 법한 몸짓을 구현하지만, 그 조차도 의중을 알 수는 없다. 그들은 그 일정한 행위를 계속해서, 영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반복한다.

 

카페는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인간적인 곳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갈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곳이기도 하고, 친한 친구, 오랜만에 만난 약간은 어색한 친구, 상사와 부하직원, 선생과 제자 등 포용할 수 있는 인간관계도 광범위하다. 홀로 있기도, 단체로 있기도 무리가 없는 카페에는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활기와 에너지가 존재한다. 설령 그곳이 독서와 공부 위주의 카페라 굉장히 고요할지라도, 그곳에 고인 사람들의 열정과 기운은 데시벨 따위로 측정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페 뮐러>에서는 테이블과 의자만이 카페의 허울을 담아내고 있을 뿐, 사람들의 온정을 느낄 수는 없다. 오히려 음울하고 어둡다. 앉아 있다는 것 외에는 어느 곳 하나 똑같은 주제, 똑같은 모습을 띄지 않는 것이 정상인 카페에 인위적인 행위만을 반복하는 6명의 누군가만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이 작품의 배경을 카페로 정했을까. 아마도 작가가 카페라는 공간에 가진 이미지가 필자의 것과 상통해서가 아닐까 싶다. 가장 인간적이고 자율적인 곳. 먹고 싶은 것을 고르고, 머물고 싶은 시간만큼 있다 가는 곳. 사람과 사람이 만나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그러기 위해 응당 있어야 할 사람 간의 대화가 부재할 때, 우리는 이질감을 느끼고 낯섦에 몸서리치게 된다. 자유를 내쫓고 남은 빈자리를 반복된 행위가 꾸역꾸역 메꾸고, 재잘대는 말소리 대신 행위의 소음만이 맴도는 작품을 보며 우리는 고독을 느끼고 사라진 인간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관점을 조금 바꿔 보면, 이 작품은 카페처럼 어떤 인간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일반적인 카페에서 보여지는 인간상이 조금 더 따뜻하고, 자연스럽고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뜻한다면, <카페 뮐러>에서의 인간상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다. 주입과 통일, 제도화된 태도와 양식을 강요하고 사회의 부품으로서 존재하길 원한다. 각자가 맡은 임무와 역할, 위치를 수행하고, 반복한다. 특히나 공무원, 회사원처럼 안정적인 직장이 우선시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보통 회사원들이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게 관습처럼 여겨지고, 식당은 달라져도 카페는 거의 고정된 곳을 간다는 한국의 보편성은 이 작품의 배경이 카페로 지정된 이유에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상 속 무용수들의 반복적 행동은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행위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사회가 원하는 모양새로 깎여 제도화된 인간들이 왜 카페에 모였으며, 그들의 행위는 그저 일상적인 것으로 보기엔 스산하고 기괴한 것일까. 궁금증이 여기까지 퍼지자, 필자는 비로소 작품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부속품이 되고 싶지 않아도,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던 인간들의 억눌려 왔던 내면의 폭발은 거세당한 인간성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고 그 종착지가 가장 인간적인 장소, 카페가 된 것이다. 이성, 즉 자유가 억눌린 살아있는 좀비에게 남은 회귀 본능은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찾아가게 했다. 그러나 이미 기계화되어 능동성을 잃어버린 자들은 구속된 내면을 표출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렇다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욕구를 잠재울 인내심도 없었다.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 나온 분노와 울분은 그들에게 주어졌던 도식화된 행위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게 만들었다. 여느 때처럼 감정도 표정도 없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 행위가 변질되고 과장되어 고장난 부품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표출인 것처럼 말이다.

 

정적이고 고요하게, 너무 큰 고통은 소리를 지를 새도 없게 만들 듯이 진하고 깊게 상실된 인간성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처음 보는 이로 하여금 이질적이고 생소한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면밀히 더듬어 보면 가장 인간적인 면모로 작품을 그려낸 작가의 감성과 시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돕는 장소가 바로 카페다. 만약 이 장소가 회사였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이 고장난 부품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으나, 노골적인 의도는 매력이 절감한다. 들판이라면 어땠을까. 자유는 가득하나 사람은 들판에 살지 않는다. 접점이 없는 공간은 인간성에 대한 메세지를 감춰버릴 것이다. 그러나 카페는 어떤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선택을 위해 제공된 공간이기에 우리는 익숙함을 먼저 체험하고, 그 후에 보이는 이질적인 풍경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알고 있는 것, 혹은 아예 모르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안다고 생각한 것이 틀어졌을 때다. 이처럼 잘 알고 있는 공간이 묘하게 다른 뉘앙스를 풍길 때,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비롯했는가를 파헤쳐 가려움을 해소하려는 욕망은 더 쉽고 강하게 작품에 매몰되게 만든다. 또한, 그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익숙한 공간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의미는 왜, 그리고 어떻게 잊혀져 갔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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