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함축된 단어들이 좋아지는 것 같다. 휘황찬란한 미사여구 대신 깊은 단어 하나가 주는 맛을 음미하는 것, 그래서 나는 요즘 그리도 시가 좋다.
책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는 시인 나태주가 뽑은 해외 명시 120편이 담긴 시 모음집이다. 국내 명시 114편의 감동을 담은 책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의 뒤를 잇는 시인의 글로벌한 행보를 느낄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예민한 시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교실 복도 벽 게시판에 붙어 있던 시를 오며 가며 자연스럽게 암송했다는 사연은 시를 향한 시인의 남다른 이끌림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마음에 와닿는 시를 만나면 노트에 옮겨 적고 외국 시의 경우, 시의 단어를 자신의 표현으로 바꾸어보기도 했다는 시인은 그 과정이 하나의 시 공부였다 말한다. 자연스럽게 시를 가까이하며 시 안에서 살아가는 시인은 '시가 사람을 살리는 좋은 약이라는 믿음을 한순간도 놓아본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책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에는 유난히 내 마음을 울렁이게 만드는 시들이 많았다. 이는 시 자체의 힘이었을까? 시인의 번역이 탁월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 마음이 불안정했기 때문이었을까? 이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좋은 시의 살아있는 울림, 그것을 적절한 언어로 말끔히 다듬은 시인, 그리고 좋은 시가 필요했던 나 자신이 만나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화내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올지니.
마음은 언제나 내일에 살고
오늘은 우울하고 슬프기도 한 것!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들은 또다시 그리워지리니.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재미있게도 만화 <검정 고무신>을 통해 알게 되었던 푸시킨의 시가 실려있었다. 기철이가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전할 연애편지에 시를 한 편 적어 넣었는데, 알고 보니 이발소에 벽에 적혀있었다는 반전(?)을 가진 에피소드였다.
그때 기철이가 적었던 시가 바로 푸시킨의 시였다. 만화를 통해 접했던 것이라 당시에는 푸시킨의 시보다 기철이의 연애 사업(?)에 더 관심이 갔었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문득문득 이 시가 떠오를 때가 있었다. 내용도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으면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문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랬던 시를 정식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시의 전문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며 그토록 찾았던 시를 마주하게 되었다. '마음은 언제나 내일에 산다'라는 문장이 가슴에 박혔다.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마음은 오늘이 아닌 내일에 놓여있다. 내일은 좀 더 괜찮아질 것이라며 나를 다독이게 되는 마음.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오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이런 마음을 푸시킨은 어떻게 알아챈 것일까? 참으로 대단한 통찰력이다. 그럼에도 푸시킨은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들은 또다시 그리워질 것'이라 위로한다. 마치 그 일련의 과정을 전부 겪어본 후 지난한 과거를 회고하는 듯, 푸시킨은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 또한 지나갈 것이니 우울해할 필요 없다고 말한다.
푸시킨 외에도 책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에는 에밀리 디킨슨, 헤르만 헤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 문학사적으로 상당한 걸작을 남긴 이들의 유명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해외의 시들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나에게는 무척 풍성한 탐닉의 시간이었다. 인류 공통의 감정은 국가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고마운 시집. 나태주 시인이 말한 것처럼, 이 시들이 나를 살리는 약이 되어주기를. 처방전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필요시, 고이 꺼내 먹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