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연된 판단이 겨냥하는 곳 [드라마/예능]

루카 구아다니노, HBO 드라마 <위 아 후 위 아> 리뷰
글 입력 2021.02.18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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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구아다니노는 그의 ‘욕망 3부작’에서 짧은 사랑의 순간이 축적된 삶의 궤적을 어떻게 흔드는지 보여주었다. 가족에게 헌신해 온 상류층 귀부인은 아들의 친구를 사랑하게 된 후 가문에서 도망치고(<아이 엠 러브>, 2009), 오랜 친분을 가진 네 남녀는 짧은 휴가 동안 서로를 향한 욕망에 무기력하게 휩쓸리며 파국을 맞았다(<비거 스플래쉬>, 2015). 어느 날 지중해의 여름 풍경 안으로 불쑥 찾아온 청년은 한 소년의 성 정체성을 일깨우기도 했다(<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7). 이 영화들은 서사를 부분적으로 감추고, 결정적인 장면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카메라 포커스를 의도적으로 맞추지 않으면서 사건보다 그것이 인물(들)에게 실어나르는 감정에 다가선다. 일례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청년이 소년에게 숨겨져 있던 성 정체성을 끌어올리는 동안, 소년의 부모는 둘의 사랑을 방해할 생각은커녕 그들의 사이를 관조하거나 응원한다. 더욱이 영화는 청년에게 시선을 할애하지 않아, 관객에게 성 정체성에 의해 고민하고 지연되는 망설임보다 소년의 마음이 움직이는 궤도를 동행하게 만든다. 성 정체성을 다루면서도 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보다는 미학적 완성도에 더 깊게 몰두하는 것을 두고, 미국 평론가 조너선 롬니는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너무나 빛나고 완벽해서, 이건 인생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영화처럼 보인다.”(장영엽, 「씨네21」 2018-03-21 재인용)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비판에도 구아다니노는 자신의 영화적 관심사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작년, 국내 OTT플랫폼 왓챠를 통해 공개된 HBO 드라마 <위 아 후 위 아>(2020)에서는 한술 더 떠 ‘다름’을 혼란스럽게 병치하여 ‘구분’ 자체를 흐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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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아 후 위 아>는 소년 프레이져(잭 딜런 그레이저 분)가 군인인 두 엄마를 따라 이탈리아에 있는 미군 주둔지로 오면서 시작한다. 소년은 손톱에 색을 칠하고, 맥주를 손에 쥐고, 지휘관의 아들에게는 걸맞지 않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주둔지를 활보한다. 그런데 두 엄마는 프레이저의 기행을 오히려 비범하다고 여기고, 특히 친모인 사라(클로에 세비니 분)는 미육군 대령이자 부대의 지휘관이지만 집에서는 프레이져에게 뺨을 맞기도 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그녀는 자진해서 프레이져에게 술을 권하기도 한다. 프레이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성장에 큰 불편함을 주지 않는 듯 보이는데, 일례로 생리를 시작한 다른 주인공 케이틀린(조던 크리스틴 시먼 분)이 탐폰의 사용법을 몰라 혼자서 애를 먹는 반면에 프레이져는 엄마 매기(앨리스 브라가 분)를 통해 면도하는 법을 배운다. 케이틀린과 그의 가정도 평범과는 거리가 있다. 미국인 아빠, 나이지리아인 엄마, 친부가 따로 있는 오빠와 함께 사는 케이틀린은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중이다. 아빠 포이트리스(스콧 메스쿠디 분)가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에 서운해하고, ‘하퍼’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하고 주둔지 밖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드라마가 ‘원래 다들 이렇지 않아?’라고 시치미를 떼듯 어딘가 어색한 인물들을 대수롭지 않게 카메라 안에 담아낸다는 것이다. 구아다니노가 욕망 3부작에서 그랬듯, 그는 이번 드라마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두 가정의 사연을 서사의 진행에 필요한 부분만 꺼내 보여준다. 레즈비언인 매기와 사라가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 프레이져의 친부에 대한 정보, 그가 왜 임신한 사라와 헤어졌는지도 시청자는 알 수 없다. 케이틀린의 오빠인 대니(스펜스 무어 분)의 친부 또한 드라마 내부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없고, 그 후에 나이지리아인 제니(페이스 알라비 분)가 어떤 사건으로 미군인 포이트리스의 만나게 되었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드라마는 그 바깥에 있는 과거의 이야기를 극 안으로 가져오지 않아 그들의 특별한 사연이 극적으로 보이지 않게 한다.

 

일상적인 공간에 낯선 손님이 방문하면서 인물(들)의 욕망이 깨어나는,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 공간은 늘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위 아 후 위 아>의 미군 주둔지는 양가적 성격을 갖추고 있는데, 이곳엔 국가(미국/타국), 인종, 신분(군인/민간인), 어른/아이, 성 구분이 혼재한다. 질서와 통제가 생존과 직결된 군대는, 자유롭게 주둔지와 해변을 넘나들며 술과 담배를 즐기는 아이들, 성 역할과 구분이 모호한 인물들에겐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곳이지만, 이 이질감은 뚜렷한 갈등으로 드러나지 않고 유려하게 흘러간다.

 

그동안 프레이져와 케이틀린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두 아이가 서로를 지탱하며 큰 문제없이 서사 아래 복류한다. 그러다 6화에서 포이트리스가 두 아이를 떼어놓기 위해 직접 학교 앞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의미를 알기 힘든 인서트씬이 막간처럼 틈입한다. 프레이져와 케이틀린은 열정적으로 춤추고 노래하지만,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 심지어 두 아이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까지 한다. 흥겨운 음악과 유쾌한 운동감이 있지만 서사와는 큰 연관이 없다는 점에서 이 씬은 레오 까락스의 영화 <홀리모터스>(2012)에서 드니 라방이 성당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면과 닮아있다. 허문영 영화비평가는 이 장면을 두고 “이 장면에 넋을 잃게 되는 이유는 연주와 음악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의 위치에 있다. 비루하고 잔혹하며 고단한 가면 놀이의 틈에서 우리를 향해 이처럼 벼락같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음악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을까.”(허문영, 「진실은 막간에 있다」)라고 평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장면이 가진 장력은 배치에 있다는 것이다. <위 아 후 위 아>의 유사한 장면도 구분이 개입하는 순간을 정확히 짚어내어 위치한다. 이 장면은 프레이져 때문에 케이틀린이 어긋나고 상처받을까 걱정하는 포이트리스가 물리적으로 두 아이를 가로막는 순간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다름과 올바름의 경계에서 처음으로 인물 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드라마는 작위적인 장면의 의도적 배치를 통해 다름에 관한 판단을 영리한 방법으로 지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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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드라마가 구분을 지연하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드라마 중간중간 미디어에서 언급되는 트럼프와 관계있어 보인다. 미국의 정치·문학비평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그의 저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서 트럼프 시대의 미국 사회에 만연해진 상대주의를 진단한 바가 있다. 그의 주장은 트럼프는 절대적으로 옳거나 틀린 것은 없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객관적 사실까지 부정하는 ‘탈진실(Post-truth)’의 정치를 펼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트위터를 통해 즉각 거부했는데, 언론의 보도를 언제나 가짜 뉴스라고 호도하고, 여러 유명인사와 트위터를 통해 설전을 벌인 전적도 있다. 최근엔 자신이 패배한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결과에 불복하여 미 국회의사당 폭동을 예인했다. 진실을 무너뜨린 자리에 새로운 진실을 쌓으려는 것이 아닌 거부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그의 논리 아래서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그들이 편견과 억압에서 자유롭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 거부의 정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슬로건과 함께 미국을 제외한 타인종, 타국가를 배격했고, 미국 사회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다. 이는 거짓 선동과 저급한 언행 등 한 나라의 대통령에겐 어울리지 않는 촌극에 가까운 행동에도 이번 대선에서도 7100여만표를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기도 할 텐데, 47%가 넘는 득표수는 여전히 ‘트럼피즘’이 미국 사회에 망령처럼 남아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트럼프의 당선 소식(6화 결말)을 기점으로 앞선 회차들을 전복시키면서 드라마가 지연했던 판단을 하나둘 건져낸다. 크레이그(코리 나이트 분)의 죽음 이후 학생들은 토론을 벌이며 상대의 의견을 거부하고, 그 과정에서 프레이져의 솔직함은 눈치 없음으로 바뀐다. 서로의 소외를 위무하던 매기와 제니의 관계도 책임을 본인 혹은 상대에게 전가하며 끝을 맺는다. 프레이져에게도 문제가 발생한다. 좋아하던 조나단(톰 메르시에 분)의 집을 찾아간 프레이져는, 그곳에서 속옷만 입고 춤을 추는 조나단의 여자친구와 조나단 사이에 서게 된다. 그때 두 엄마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차이와 조화 확인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남들과는 다른 성적 지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을까. 조나단의 집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온 프레이져는 두 엄마에게 이제껏 찾은 적 없던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또한, 4화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성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쓰고, 먹다 남은 음식물을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제약이 없던 러시아인의 저택에도 일탈이 주는 해방감과 역동성이 거둬진다. 술과 마약은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들고, 대니와 아이들은 물건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한다. 결국 일탈이 비행으로 바뀌면서 아이들만의 공간으로 어른인 매기와 사라가 찾아오게 된다. 특히 크레이그의 죽음에 대한 사라의 태도가 눈에 띈다. 사라는 모니터에 비친 희생자들의 시신 앞에서 “여기 군인밖에 없잖아”라고 말하며 나체를 드러내고, 추모식에선 ‘평화를 위한 대가’라며 그들의 죽음을 군인으로서 숭고한 희생이라고 포장한다. 이는 그들의 죽음을 미국을 위해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며, 드라마 내내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던 포이트리스가 미군들이 이탈리아 피자 가게 파손시킨 사건을 “미국을 모욕했겠죠”라며 미국을 위한 폭력을 정당화한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이 장면에서도 트럼프 관련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즉 7화에선 이전 회차까지 선명한 구분이 없던 성 역할, 어른/아이, 군인/민간인, 미국/타국이 하나로 모이거나 둘로 나뉘며 그 경계가 선명해지는데, 이 갈등 양상은 트럼프 시대가 가져온 분리 정책과 미국 사회의 분열과 겹쳐진다. 드라마가 6회까지 미뤄뒀던 갈등을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 7화에 일순 화면 위로 길어 올린다고 본다면, 드라마가 판단을 지연한 목적은 트럼프 시대의 사회 분열을 겨냥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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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트럼프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 텐데, 구아다니노가 HBO에게 10대들의 성장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제안받은 후 이 이야기를 트럼프와 연결한 고리는 살펴볼 만하다. 같은 시간 안에서 시점만 뒤바꾼 1, 2화에서 큰 접점이 없던 프레이져와 케이틀린은, 3화가 시작하자 돈독한 사이가 된다. 이 생략된 사건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지는데, 그 준거는 두 아이의 감정일 테다. 그런데 이 감정은 동질감에 가까워 보일 뿐, 사랑인지 우정인지 혹은 다른 어떤 감정인지 확언하기 힘들다. 둘 사이에 떠도는 모호한 감정은 마지막 8화까지 이어진다. 8화에서 프레이져와 케이틀린은 밴드 공연을 보기 위해 미군 주둔지를 벗어나는데, 그 여행에서 둘은 티켓 살 돈이 없어 목적지보다 일찍 기차에서 내리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 서로에게 소홀해진다. 또 케이틀린은 여성 종업원과 입을 맞춘 후 혼란을 겪는데, 마지막화에 이르러서도 케이틀린은 좀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확신이 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옅은 선 위에서 갈등하고 흔들리는 두 아이를 잡아끄는 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함께 보고 싶다는 그 순간의 욕망이다.

 

그리고 두 아이에게 이 욕망을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선명해질 필요가 없어 보인다. 딸이 생리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늘 함께하던 일을 혼자 떠난 포이트리스와 성전환 수술 상담을 권하는 사라와는 다르게, 프레이져에게 케이틀린이 어떻게 성장하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겐 드라마의 부제처럼 ‘지금 바로 여기’ 케이틀린의 마음이 바라보는 방향이 중요하다. 프레이져는 남장을 한 케이틀린을 이탈리아의 한 가게에서 발견했을 땐 그녀에게 남자 옷을 선물하고, 면도하는 법을 궁금해할 땐 쉐이빙크림을 발라주고, 남자처럼 보이고 싶을 땐 콧수염을 붙여주거나 머리를 깎아 주지만, 단 한 번도 케이틀린에게 정말 남자가 되고 싶은지 묻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아이들과 포이트리스에게 이상한 행동을 하는 프레이져를 대변해 주는 케이틀린도 마찬가지다. 나에겐 두 아이가 서로를 대하는 이 태도가 트럼프와 아이들을 연결하는 고리처럼 보인다. 어쩌면 구아다니노는 다름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두 아이를, 분열한 미국 사회에 해답으로 제시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배해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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