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좋은'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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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에디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혼자 불퉁한 표정을 짓고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좋은 글을 쓰는 에디터지요."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니, 대체 '좋은' 글이란 뭔지 정의하기가 참 어려웠다. 나에게 '좋은'이란 시간이 지나며 그 의미를 달리했고, 이 질문을 받은 사람들 또한 저마다의 시선으로 '좋은'을 다르게 정의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좋은'을 좇아왔던 나의 글쓰기 여정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좋은'을 향한 첫 번째 여정
나에게 '좋은'은 '잘-'과 동의어였다. '좋은'과 '잘-'에도 여러 의미가 있지만, 나는 성과가 '좋은'과 '잘-'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좋은 학생'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 즉,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다.) 나의 사전에 담긴 '좋은'은 성과주의적이었고, 나를 배신하지 않는 단어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나는 '좋은'이라는 수식을 받아도 무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언제나 노력 대비 결과가 좋은 편이었고, 그 과정이 어땠든 간에 눈에 보이는 결과는 명확했으니 말이다.
'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평소에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고, 가끔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했다. '과제'라서 글을 썼다. 주어진 과제에 대해 글을 쓰면 그에 상응하는 점수가 나왔다. 잠깐 논술 작문 학원에 다녔을 때도 첨삭을 받기 위해 글을 썼다. 첨삭을 할 게 거의 없는 글은 '좋은 글' '잘 쓴 글'이었다. 평가 결과는 내 편이었다. 가끔 기대치보다 못한 점수나 피드백이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특정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글을 잘 썼으면 높은 점수를 받고 글을 못 썼으면 낮은 점수를 받는다. '좋지 않은 글', 즉 '잘 쓰지 못한 글'은 저마다 합당한 감점 사유가 있었다. 고칠 수 있는, 해결할 수 있는 부진함이었다.
내 글은 언제나 평가를 기다렸고, 평가 속에서 '좋은'이라는 수식을 얻어냈다. 글 쓰는 사람이 꿈도 아니었고, 대단한 글을 쓰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고, 문학적인 재능을 갈망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좋은 글, 적당히 잘 쓴 글이면 충분했기에 내 사전 속 '좋은'의 뜻은 요지부동이었다. 글에 대한 애정을 가지거나, 글을 쓰는 순간을 사랑하거나, 이런 식의 낭만은 없었다. 글은 써야 해서 쓰는 거였고, 좋은 평가를 받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좋은'을 향한 두 번째 여정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글을 쓰는 빈도가 늘어났다. 순간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이라는 걸 시작했다.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었다. 그냥 쓰고 싶은 대로 휘갈기고, 쓴 글이 꼴 보기 싫어질 때면 조용히 삭제 버튼을 눌렀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개인적인 글이기에 상관없었다. 오롯이 나를 위한 기록이었고, 여기에는 당연히 '좋은'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글을 쓰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고, 글과 조금 더 친해지기 시작했다. 글에 대한 애정이 생기니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그렇게 예술 영화관 서포터즈 활동을 시작했다. '좋은'에 대해 고민 하기 시작한 건 이맘때쯤이다. 영화 리뷰가 주 활동이었는데, 평가받지 않았지만 동시에 남에게 보여줘야 하는 공적인 글을 써야 했다. 이런 글쓰기는 처음이었다. 자연스럽게 '좋은'에 대한 기준을 잃었다. 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피드백을 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네 글은 몇 점이야"라고 말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는 '좋은-' 무언가는 결과가 눈에 보여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글쓰기라니.
평가 지표가 사라진 상태에서, 나는 '좋은'의 새로운 정의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의 나에게 '좋은 글'이란 좋은 영화를 보고, 이 영화가 얼마나 좋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말해주는 글이었다. 여기에서의 '좋은'은 따뜻함이다.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 다정하게 끌어안는, 혹은 소외되었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영화가 좋았다. 그리고 이 따스함에 대해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좋았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에 지원한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문화예술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미는 문화예술을 아끼기에 이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지원서에도, "우리는 문화예술을 매개로 소통합니다. 사회라는 담론장에서 개개인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갈등하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고, 연대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문화예술의 장에서, 은폐되어 있거나 미약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함께 연대하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좋은'을 향한 세 번째 여정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매주 한 편의 글을 기고하다 보니, '글쓰기'가 싫어졌다. 매주 새로운 소재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힘들었다. 자유로운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처음에는 너무 좋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소재와 숨바꼭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술래고, 소재는 힘껏 숨는다. 작정하고 숨은 소재는 찾아내기가 힘들고, 나는 소재를 찾아낼 때까지 전력 질주하는 체력 좋은 술래가 아니다.)
글을 쓰기가 싫으니 자연스레 글쓰기를 미뤘고, 마감일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말 아무것도 못 쓰겠다 싶으면 이전에 썼던 글을 발굴해내 재탕하기도 했다. 에디터로서의 4개월이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이야 컬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때 당시로는 에디터 활동 기간이 끝나면 글쓰기를 잠정적으로 중단해야겠다는 욕망이 더 컸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왔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글쓰기를 미룰 수 있는 핑계는 많았다. 시험 기간이니까, 과제가 있으니까 등등.
그래도 써야 했다. 마감일을 지키려는 양심은 잃은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매주 글을 써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은 남아 있었다. 어렵게 노트북 앞에 앉아, 한글 파일을 열었다. 새하얀 화면이 마치 텅 비어있는 내 머릿속 같았다. 그런데 억지로라도 글을 쓰다 보니 점점 오기가 생겼다. 글은 쓰기 싫었지만, 속에 하고 싶은 말이 들어찼다.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글쓰기는 싫지만 속에는 하고 싶은 말이 남아있다는 게 조금 웃겼지만 덕분에 글을 마무리했다. 컬쳐리스트로 활동할지 말지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이런 경험 덕분에 글을 계속 써야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여전히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또 그를 통해 꼭 하고 싶은 말들이 마음 한 구석에 묻혀 있었으니까.
내 속에 들어찬 말들은 앞에서 언급한 '따뜻한 다정함'과 비슷하다. 컬쳐리스트 지원서에, 자유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란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답했다.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려고 노력은 하지만, 타인에게 공감하는 건 언제나 어렵습니다. 모든 일에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최소한 내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면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선택적으로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내 기분이 좋을 때만 상대방에게 공감했다가, 기분이 나쁠 때 상대방의 경험을 무시하고 지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혹여 그렇게 행동했다면, 꼭 자신을 돌아보고 상대방에게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써 내려가는 글이 이 '공감'의 매개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하게 써내려 가는, 공감과 배려의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좋은'을 향해
나는 여전히, 문화예술이 머금은 온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공감하는 사람, 그리고 그 공감의 의미를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에디터가 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써 내려간 글이 누군가의 손을 꼭 잡아 준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다.) 이게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에디터'다. 물론 지금의 나는 이 '좋은'이라는 수식을 받기에는 불충분하다. 아마 평생 모자라고 부족할 터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지나면, 내 사전 속 '좋은'의 모습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언제나 나만의 '좋은'을 향해 조금씩은 나아갈 테니 말이다.
아마 다른 에디터분들 또한, 글쓰기가 싫어지는 와중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지키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다. 그러니까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는 거고, 또 각자의 '좋은'을 향해 저마다의 여정을 떠났을 거라 믿는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또 어떤 에디터가 되고 싶은지. 저마다의 '좋은'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면 우리 모두 '좋은 에디터'가 될 자질은 충분한 게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 모두 '좋은'을 향해 달려보자.
[최은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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