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방 비우기

글 입력 2021.02.13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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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도 종이들이 다닥다닥, 책상 위에도 물건들이 가득하고 책장마저 책들로 가득 찬 내 방은 너저분해 보이지만 방주인인 나만 알 수 있는 나름의 정리 체계가 있다. 엄마는 그걸 몰라서 매번 내게 방을 안 치운다고 하지만…. 한곳에 오래 놓인 물건은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양 배경이 되고 만다.
 
사실 물건에도 애착이 많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긴 하다. 언젠가 필요하겠지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물건 자체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서 물건을 계속 모아두기만 한다. 내 방 공간은 한정적인데 마음속에 입주한 물건만큼은 무한하기에 이번 생에 미니멀리스트는 진작에 글렀다 싶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가끔 마음잡고 물건을 비울 때가 있다. 큰일을 해치워서 해오던 일에 대한 매듭이 필요하다 싶을 때마다 물건을 정리하는 편인 나는 어제 엄마의 잔소리에 힘입어 오랜만에 방을 치웠다.
 
당시에는 잘 썼다고 생각해서 버리지 못하고 책장에 끼여놓은 빛바랜 캘리그래피 연습지, 인상 깊게 본 공연이라고 따로 빼두었다가 찾지 못했던 티켓, 유난히 성적이 잘 나와서 뿌듯한 마음에 챙겨두었던 몇 년 전의 모의고사 성적표. 시간의 순서를 흩트리고 예상치 못한 기억들이 튀어나온다.
 
도서관 내부에서 책을 잃어버리면 외부에서 책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찾기 어렵다고 했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 제목인 ‘관내 분실’처럼 내게도 관내 분실된 한때 제법 소중했던 기억들이 잊힌 채로 있다가 무더기로 발견된다.
 
손안에 들어와 있는 작은 기억들을 보면 자연스레 물건이 담고 있는 그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버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버리지 못한 과거의 어느 시점도 떠오르지만, 이제 흐릿해지는 과거의 기억보단 좁아져 가는 책장을 처리하는 게 더 현실에 적합한 사고라는 것도 알기에 나는 어제 책장을 네 칸이나 비웠다.
 
방을 치우다 나도 모른 채 보관하고 있었던 물건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온다. 그럴 땐 언제 그걸 소중히 책장에 끼워두었나 싶을 정도로 가차 없이 버리게 된다. 보통 7년 이상 된 기억들이 그런 편이다. 6년 차까지는 차마 생기지 않았던 용기가 솟아오른다. 뜬금없는 용기 덕분에 내 방은 주기적으로 남들이 보기에 제법 사람 꼴을 갖춘 방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
 
남은 책들을 널찍하게 꽂고, 몇 년간 펴보지 않은 책들은 중고서점에서 판매하기 위해 계획했다. 배경이 된 것들이 바뀌니 내 방이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휑하고, 후련하고, 허전하다.
 
남은 책들을 나만의 기준에 맞추어 분류해 주고 물건들도 질서정연하게 배치한다. 빈 공간은 금세 또 채워질 것이고 몇 년 후의 나는 분명 그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치우는 작업을 할 것이다. 채우고 비우고 그 반복되는 행동 속에서 과연 어떤 기억이 담긴 물건들이 끝끝내 남게 될지, 비워진 방을 바라보며 기대하게 된다.
 
 
[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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