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거야 - Part 2 [사람]

길잡이 이야기
글 입력 2021.02.09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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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괜찮은 빌런을 만난 다음 날이었다.

 

나는 관객이 되어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았다. 집에서 멀긴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작품들을 상영해주는 곳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꼭 보고 싶은 작품이 있을 때 찾곤 한다.

 

집에서 영상자료원은 약 1시간 반 정도의 거리. 우선 왕십리 역에서 진한 옥색의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해 수색역까지 간다. 수색역에서 내려 도보 15분 정도를 걸으면 자료원 건물이 보인다. 집을 나서기 전 머릿속으로 이동 경로를 그리며 그리 익숙하지 않은 곳을 갈 때마다 새어 나오는 불안을 잠재웠다.

 

여유롭게 나오려 했는데 평소대로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시간이 빠듯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보통 걸음으로 걸었을 땐 딱 맞게 도착할 것 같았다. 왕십리역부터 응봉, 옥수, 한남역까지는 문제없었다. 다만 여유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조금 빨리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잔잔히 음악을 들으며 즐기던 여유가 서빙고역에서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문제의 서빙고역. 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다시 굳게 닫혔다. 하지만 열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출발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계속 연착이 됐다. 1분, 2분, 3분, 6분… 이런 서빙고역.

 

분명 안내 방송은 흘러나왔겠지만,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끼고 있어서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마음을 가라 앉히며 다시 있을 안내 방송을 기다렸다. ktx 지연 때문에 지하철도 같이 연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뒤 출발 직전의 일이었다.

 

연착은 항상 여유가 없는 시간을 기어코 비집고 들어가 제 자리를 차지한다. 이야기의 결말이 사라져도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나는 하루를 제대로 끝맺고 싶었다. 꼭 영화를 봐야 했다. 오늘이 보러 가는 영화의 마지막 상영 날이라 더더욱.

 

*

 

영상자료원은 무료로 영화 관람이 가능하다. 하지만 쾌적한 상영환경을 위해 영화 시작 이후엔 입장이 불가능하다. 그 덕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 외에는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는 열차 내부. 이곳에 나와 같은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은 없겠지, 이미 늦었으니 다 포기하고 돌아갈까. 수많은 생각이 덮쳤다.

 

밑져야 본전이지. 무작정 뛰어보기로 했다.

 

거의 1년 만에 찾은 터라 미리 지도 앱을 열고 길을 떠올렸다. 스크린 도어가 열리는 순간 단숨에 뛰쳐나가 헐레벌떡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나 말고도 뛰는 사람이 또 있었다. 반대편 계단 쪽에서 올라온 사람이었다. 그 순간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영화를 보러 가는구나, 확신했다.

 

수색역을 완전히 빠져나올 때 일행은 한 명 더 늘었다. 앞 사람을 보고 우왕좌왕하며 '그가 정말 영상자료원에 가고 있는 게 맞을까' 의심하는 찰나 내 뒤에 있던 사람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게 보였다.

 

길잡이. 저들은 나를 영상자료원으로 이끄는 길잡이이자 같은 길을 가는 동행자였다. 지도는 필요 없었다. 거추장스러운 핸드폰은 집어넣고 앞서가는 두 사람만 보고 뛰었다. 역에서부터 영상자료원까지는 약 1km 정도의 거리. 우리 세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영상자료원에 도착했다.

 

 

쥴앤짐.jpg

<쥴 앤 짐>(1962) 스틸컷

 

 

다행히 영화가 시작하려면 5분 정도가 남았다. QR 체크와 발권을 순식간에 마치고 바로 입장했다. 행여 시작할까 급히 짐을 정리하니 상영 안내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가볍게 넘겼을 내용이지만 어떤 멘트가 나를 사로잡았다.

 

늦을 수도 있지만 늦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어제와 오늘 일이 느슨하지만 선명하게 엮이기 시작했다.

 

어제 제 발로 상영관을 지나쳐 늦게 입장한 괜찮은 빌런과 오늘 지하철 연착으로 영화를 못 볼 뻔한 나와 다른 두 사람.

 

괜찮은 빌런은 더 늦지 않을 수 있었는데 (늦어도 괜찮다며 화장실을 갔다 오는 것으로) 늦는 것을 택했고, 나를 포함해서 함께 뛴 세 사람은 늦을 뻔했지만 기를 쓰고 늦지 않았다.

 

**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기 위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인다. 우리를 ‘우리’로 결속 시켜 주는 것은 이런 동질감이다. 약속한 적 없고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우리는 영화에 다가가는 길에서만큼은 하나가 된다.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울고 웃는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모르는 사이가 되겠지만, 하나가 됐던 감각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관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간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 헤매다가 힘겹게 도착한 약속의 공간이 된다. 말하지 않아도 조용히 영화에만 빠져들자는 약속은 우리를 톱니바퀴 삼아 작동한다.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관보다 예술 영화관은 더 특별하다. 입장 제한 시간 때문이다. 덕분에 예술 영화관에는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영화관에는 ‘늦을 수도 있지만 늦지 않는’ 마음,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들이 모인다. 그 마음을 해치는 빌런은 입장 제한 시간이라는 방패 앞에서 주춤하게 된다.

 

결국, 공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공간 자체가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다. 순수하게 빛나는 마음이 모여 공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좋아하는 마음이 우리를 늦을 뻔한 위험에서 구하고, 이야기의 결말을 구한다.

 

 

*글 제목은 책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에서 가져왔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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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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