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꾿ㅡ모닝, 다방 '제비' -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2.06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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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 제 1 전시실 전위와 융합≫의 작품들을 이상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 다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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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낙랑파라의 사진들

 

 

그때는 다방이 유행했어요. 특히 종로의 낙랑파라에 문인부터 화가, 가수까지 이름 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저도 나름 예술 지망생이었으니 자주 드나들었죠. 2층짜리 건물을 전부 썼거든요. 1층에서 차 같은 것을 팔고 2층에 아뜰리에가 있었어요. 연주회니, 전시회니 그런 것들이 많이 열렸어요. 외국에서 최신 유행한다는 레코드, 쉬르레알리즘... 좋다는 것이 있으면 모두 찾아와서 보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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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이 직접 그린 소설 『반년간』의 삽화

 

 

오래 앉아 커피를 마시다 보면 무료하게 앉아 있는 예술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소설가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사람이요. 주인장은 그 사람이 오면 종종 엔리코 카루소를 틀어줬어요. 가만히 음악에 잠겨있다가 옆에 앉아 있던 시인 이상과 함께 담배를 피우곤 하더라고요. 글을 마저 써야 하는데 이러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면서요.

 

 

나는 다시 다방 '낙랑' 안, 그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두 가닥 커튼이 나의 눈에서 그 살풍경한 광고들을 가리워 주고 있었다. 이 곳 주인이 나를 위하여 걸어 준 엔리코 카루소의 엘레지가 이 안의 고요한, 너무나 고요한 공기를 가만히 흔들어 놓았다.

 

- 박태원, 피로, 1933

 



# 다방, 제비



맞아요, 제비. 그런 이름이었어요. 어느 날인가 이상이 화가 구본웅과 함께 온천에 요양을 갔다 와서는 다방을 하나 차렸습니다. 그곳에 기생으로 있던 금홍을 만났더라죠. 다방을 열자마자 데려와서 마담으로 세우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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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를 운영하던 시절, 금홍과 살던 삶에 영향을 받은 이상의 소설 『날개』.

소설 속 '연심'은 금홍이다.



종로 1가에 있었는데 오래가지는 못했어요. 3년쯤 못가 돈이 없어서 닫았거든요. 사실 처음에 열 때도 돈이 있어서 연 것은 아녔으니까요. 돈을 많이 벌려는 포부도 없었지만.


삼백 원 남짓한 돈으로 시작한 곳에 뭐가 많이 있었을리가요. 휑하니 텅 빈 곳에 주변 사람들이 집에 있던 물건들을 들고 와 기부해주며 채워진 곳이었어요. 첫 달은 소박한 분위기가 좋았는지 꽤 장사가 잘 되었는데 근처에 다른 다방이 생기는 일도 있고 금홍도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갈수록 이래저래 사정이 안 좋아졌어요.

 

 

원래가 삼백 원 남짓한 돈을 가지고 시작한 장사라, 무어 찻집답게 꾸며 보려야 꾸며질 턱도 없이, 다탁과 의자와 그러한 다방에서의 필수품들가지도 전혀 소박한 것을 취지로, 축음기는 자작(子爵)이 기부한 포터블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모든 것이 그러하였으므로, 물론 그러한 간략한 장치로 무어 어떻게 한밑천 잡아 보겠다든지 하는 그러한 엉뚱한 생각은 꿈에도 먹어 본 일 없었고, 한 동리에 사는 같은 불우한 예술가들에게도, 장사로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의 구락부와 같이 이용하고 싶다고 그러한 말을 하여, 그들을 감격시켜 주었던 것이요.

 

- 박태원, 『방란장 주인』,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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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삽화. 판 들어먹기 조금 전의 '제비'.

마담은 어딜 가고, 전화는 떼 가고,

나나오라(축음기)는 팔아먹고, 그래 늘 손님이 없다.



영 경영에 재주가 없는 사람이기도 했죠. 그 뒤로도 마음먹고 다방을 몇 개 더 열었지만 다 좋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제비는 참 이상다운 곳이긴 했습니다. 세 면이 유리로 된 특이한 공간이었는데, 그때로서는 흔치 않았어요. 1층이라 바깥 풍경이 훤히 보여서 탁 트인 나름의 묘미가 있었습니다. 처음 갔을 때 놀랐던 것이 대충 하얗게 칠해놓은 벽에 자화상이 하나 덩그러니 걸려있더군요. 누가 봐도 이곳의 주인이 이상이구나 싶었죠.

 

 

'제비' ㅡ 하 ㅡ 얗게 발라놓은 안벽에는 실내장식이라고는 도무지 이상의 자화상이 하나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어느날 황량한 '벌판'으로 변하였다. 제비가 그렇게 변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림 말이지만 결국은 '제비'도 매한가지다. 온 아무리 세월이 없느니 손님이 안 오느니 하기로 그처럼 한산한 찻집이 또 있을까?

 

- 박태원, 『자작자화 유모어콩트 제비』 상, ≪조선일보≫, 1939.2.22

 

  

그 자화상 말고도 친구인 구본웅의 그림도 몇 점 걸려있었습니다. 제비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인형이 있는 정물」도 그렇게 이상의 다방에 걸려있던 그림 중 하나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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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인형이 있는 정물」, 1937


 

탁자나 의자가 괴팍할 정도로 낮다는 것도 이상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상은 그 분위기를 좋아했지만요. 맞아요. 저도 좋아했습니다. 불편하지만 독특하잖아요.


잠시 길을 지나다 들려서 요즘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어요. 그곳에 모이는 이들 모두 영화를 좋아했어서요. 장 콕토르네 클레르 같은 감독들이요. 그런 영화들은 나오면 경성에도 거의 바로 소개가 되었거든요. 항상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작품들이었어요.


한 번은 이상이 박태원의 주머니를 뒤져 르네 클레르의 「최후의 억만장자」를 보러 가더라고요. 박태원도 그 영화를 패러디하는 작품을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때는 그런 감독들이 많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실험적이고 충격적인 작품들에 감각이 날이 서 있던 시대였어요. 아마 정치적으로 그러지 못한 상황이니 더 그랬던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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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글, 정현웅 그림, 영화에서 얻은 콩트 : 최후의 억만장자」, 조선일보≫, 1937.6.25-7.1 의 영상편집, 2021

르네 클레르의 최후의 억만장자를 패러디한 작품. 트레몰로 국에 파리가 나타난다.

범인을 찾는 일에 상금이 걸리고, 명탐정 셜록 홈스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온다. 그들 사이에 동양인이 등장한다.


 

 

# 친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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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친구의 초상」, 1935


 

혹시 구본웅이 그린 「친구의 초상」을 보셨을지 모르겠어요. 연기가 피어오르는 파이프를 물고 있는 한 남성의 초상화예요. 어딘가 오만한 듯 보이지만, 고뇌에 차 음울하게도 보여요. 전체적으로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에 눈 밑과 입술의 생생한 붉은색이 눈에 띄더라고요. 그게 이 그림을 매력적이고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아요. 친구의 깊은 내면과 화가의 시선이 같이 머무는 것처럼 느껴지죠.


네, 그렇습니다. 이 친구가 바로 이상입니다. 둘은 항상 붙어 다니곤 했는데 죽이 잘 맞아 보였어요. 듣기로는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고 해요. 보통학교 동기일 겁니다. 구본웅이 이상보다 네 살 많기는 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같은 학년을 다녔거든요.


구본웅이 어렸을 때 하녀의 실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척추장애를 갖고 있었다고 해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할 때, 친구가 되었던 것이 이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오래 서로를 알아온 친구 사이였던거죠. 오래 지낸 만큼 일화가 많아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아마 이승만의 그림이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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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이상과 구본웅』, 「풍류세시기」, ≪중앙일보서≫, 1977


 

이상과 구본웅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곡마단(서커스단)이 행차했다고 따라다녔다고 해요. 훌쩍 큰 키에 망토를 입고 까치집을 한 머리를 하고 다니는 이상과 작은 키에 질질 끌리는 인바네스를 입고 있는 구본웅의 모습이 아이들의 눈엔 그렇게 보였나 봐요. 이 동네에서는 거의 매일 같이 마주치는 광경이었습니다.


이상과 구본웅의 인연은 가족 관계로도 이어지는데, 구본웅의 새어머니에게는 이복동생이 있었거든요. 변동림이라는 이름의 여성인데, 이상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구본웅에게 이상은 이모부가 된 거죠. 이 결혼 관계는 이상이 폐결핵으로 도쿄에서 죽으며 오래가지 못했지만요. 변동림은 나중에 김환기와 결혼하며 김향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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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여인」, 1940

 


구본웅의 그림 얘기가 나온 김에, 하하, 맞아요. 구본웅을 좋아합니다. 제비를 드나들었던 이유 중 하나에 그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그의 그림들은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인 작품들이었어요. 야수파라는 이름을 그에게서 처음 들었거든요. 표현주의니 하는 것들에 눈이 딱 뜨이는 것 같았습니다. 거친 붓질 안에 강렬한 감각들이 박동하는 것 같은 그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주류인 화풍은 아녔죠. 그래서 김기림의 평론이 잊히지 않더라고요. 적막한 고립에 영광이 있으라. 참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지극히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그만한 경지까지 개척해 나간 구본웅 씨의 예술에 대한 정열에 대하여 탄복한다. 조선화단의 '아카데미즘'이 그에게 향하며 아무리 돌을 던질지라도 그는 단연히 우리 화단의 최좌익이다. 적막한 고립에 영광이 있으라.

 

- 김기림, 『협전을 보고 (1)』, ≪조선일보≫, 1933.5.8.

 



# 기림 형



이상과 김기림과의 인연도 깊은 것으로 압니다. 많이 의지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이상이 도쿄에서도 여러 번 편지를 썼다더군요. 김기림이 일본에 가있을 적에 그의 첫 번째 시집을 맡았던 것도 이상입니다. 편집부터 장정까지 이상의 손에 맡겨졌는데, 「기상도」라는 제목의 책이요. 태풍이 왔다 가는 상황으로 비유해 당시 사회를 비판하던 7부작의 시집이었죠.

 

 

기림 형

어떻소? 거기도 더웁소? 공부가 잘되오?

『기상도』 되었으니 보오. 교정은 내가 그럭저럭 잘 보았답시고 본 모양인데 틀린 데는 고쳐 보내오.

구(具) 군은 한 천 부 박아서 팔자고 그럽디다. 당신은 50원만 내고 잠자코 있구려. 어떻소? 그 대답도 적어 보내기 바라오.

참 체재(體裁)도 고치고 싶은 대로 고치오. 그러고 검열본(檢閱本)은 안 보내니 그리 아오. 꼭 소용이 된다면 편지하오. 보내 드리리다.


-


이 편지를 보았을 때 형은 아마 뒤이어 「기상도」의 교정을 보아야 될 것 같소.

형이 여기 있고 마음 맞는 친구끼리 모여서 조용한 「기상도」의 밤을 가지고 싶던 것이 퍽 유감(遺憾) 되게 되었구려. 우리 여름에 할까? 누가 아ㅡ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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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장정: 이상, 『기상도』, 1936 / 제2전시실

 


1000부 내자고 했던 구본웅의 바람과는 달리 자비로 200부가 출판이 되었대요. 저도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굵은 두 줄의 은박을 두른 표지에 금색으로 왼쪽에 작게 제목과 작가가 적혀있었어요. 은색이 은하수를 표현한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검은 배경은 밤하늘인가 싶더라고요. 책을 한 장 넘길 때마다 '기상도'라는 제목이 점점 커지는 것이 독특한 책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상다웠죠. 시도 그렇게 쓰니까요. 힐끗 옆에서 본 것이지만요.


이상이 죽고 난 뒤에, 김기림은 많이 슬퍼했어요. 이상의 작품들을 모아서 『이상선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이상의 첫 작품집일 겁니다. 이상은 한 번도 자기 작품들을 책으로 엮어 낸 적이 없었거든요.


조금 분위기가 무거워졌으니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김기림은 스스로가 모더니즘 작가이기도 했지만, 다른 작가들을 발굴하는데도 힘을 썼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평론을 통해서요. 이상, 정지용, 백석 같은 작가들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정지용에게는 한국시에 처음으로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었다고 했고, 백석의 시집 『사슴』을 읽고는 시단을 향해 무심코 던진 이 시집에 백석을 인정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고 했어요. 순결한 자세에 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면서요. 나는 그걸 읽으며 허 참, 평론도 참 시처럼 쓰는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김기림이었기에 도쿄에 도착한 이상은 자신이 관심 있게 보던 영웅들에 대한 편지를 써서 보낸 것 같습니다. 원고를 좀 쥐어주었으면 하고요.


 

『삼사문학』에 원고 좀 쥐여주오. 그리고 씩씩하게 성장하는 새 세기(世紀)의 영웅들을 위하여 귀하가 귀하의 존중한 명성을 잠간(暫間) 낮추어 삼사문학의 동인이 되어 줄 의사는 없는지 이곳 청년들의 갈망입니다. 어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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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문학』 제5호, 표지: 김환기

초현실주의의 기법인 자동기술법으로 그려진듯한 작품이다.

오른쪽 상단에 거울에 비친듯 서명이 거꾸로 적혀있다.


 

당시에 『삼사문학』은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낸 문예 동인지였어요. 시, 소설, 미술 평론이 실렸습니다. 1934년에 첫 호를 내놓았기에 삼사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초현실주의를 지향하며 어린 학생들이 만들어낸 잡지였으니 이상도 새 세기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몇 권 읽어보았어요. 특히 5호의 표지가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려낸 것 같이 율동적인 그림들이 인상적이었거든요. 김환기의 작품이었을 거예요. 그때로 치면, 네, 이십 대 초반쯤이었겠죠.

 

 

 

# 가장 슬픈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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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글, 이상 그림, 신문 연재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

≪조선중앙일보≫, 1934.8.1-9.19


 

박태원의 이야기를 좀 하고 마무리하고 싶어요. 둘은 아마 제비에서 처음 보았을 텐데 금방 친해져서 같이 작품을 하기도 하고 했어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이상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더군요. 이 소설은 나도 조선중앙일보에서 연재가 될 때 같이 읽었죠.


그때 이상이 '하융(물속의 오랑캐)'라는 필명으로 삽화를 그려줬어요. 검은 글씨들 사이에 상당히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난해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자주 보던 영화 같았어요. 초현실적이면서 전위적이라고 평가받던 그 영화들이요. 글도 그림도 나는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유 ㅡ 모어 콩트'라지만 그러나 이것은 슬픈 이야기다. 그도 그럴 밖에 없은 것이 이것은 죽은 이상과 그의 찻집 '제비'에 대한 이야기니까 ㅡ .

'제비'는 이를테면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슬픈 찻집이요 또한 이상은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슬픈 동무이었다.

 

- 박태원, 『자작자화 유모어콩트 제비』 상, ≪조선일보≫, 1939.2.22

 

 

박태원이 이상이 죽고 난지 이년쯤 뒤에 쓴 글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가장 슬픈 찻집이면서, 가장 슬픈 동무라는 말이요. 이제는 그런 말을 한 이들도 모두 스러지고 없지만 나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 시대의 이야기들을 기억할 수 있으니까요.


각자가 남긴 것이 하나, 둘 모여 큰 지도를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이름이 존재하지는 않을 겁니다. 얽히고설키며 완성해간 시간들이지요. 하나의 실을 뽑으면 다 풀리고 말거예요.

 

제비에 스쳐 갔던 이들의 이름들이 떠오르네요. 울고 웃으며 숱한 시간을 지냈어요. 이들이 제비에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요. 그래도 아마 공간은 기억을 삼키고 여전히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 거예요.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일테니까요. 저도 이만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안녕히.



 

 

*이름들

낙랑파라. 제비.

박태원. 이상. 구본웅. 금홍. 연심. 이승만. 변동림. 김향안. 김환기. 김기림. 백석. 정지용. 하융

엔리코 카루소. 장 콕토. 르네 클레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날개. 최후의 억만장자. 인형이 있는 정물. 친구의 초상. 기상도. 이상선집. 사슴. 삼사문학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1930-40년대 경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가와 문학가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암흑기라고 불리는 시기였지만 빠른 속도로 변하던 경성과 서구의 모던함을 최전선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당대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이다.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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