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작정 써보는 아침의 글쓰기 [사람]

6개월 모닝페이지를 쓰며 느낀 것
글 입력 2021.02.0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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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가리키는 시각 오전 7시 29분

버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 12시 50분


 

출근하는 길, 역으로 가는 버스에서 시간을 확인하려다 버스 시계가 잘못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5분, 10분이 밀린 것도 아니고, 너무 터무니없이 맞지 않는 숫자였다. 처음엔 버스 전자시계의 엉뚱함에 어이없는 웃음이 났지만 어쩌면 저 시간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고, 이내 생각했다.


만약 걷고 있는 나를 내가 볼 수 있다면, 이어폰을 끼고, 바닥 쪽으로 시선을 내린 채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길가에서 딴 생각을 하며 걷곤 한다. 오전 7시 반을 살고 있지만 사실은 어제 오후 8시쯤 먹었던 떡볶이를 생각하고 있다. 밤 9시 10분엔 일주일 전 오후 2시에 했던 대화 안에서 살고 있고, 아마 오늘 퇴근하는 6시쯤엔 지금 이 글을 쓰는 오전 11시 23분을 떠올릴 것이다.


‘잠깐’ 떠올리는 수준이 아니다. 정말 깊게, 한참을 과거를 복기하거나, 미래를 걱정한다. 그래서 물건을 사러 편의점에 갔는데 정작 산 걸 두고 온다거나 카드를 잃어버리는 일 같은 건 이제 그리 놀랍지 않다. 이미 지나가 버린 순간이나 훨씬 이후에 올 일을 생각하느라 현재 내 손이 하는 일에 늘상 소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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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핸드폰 갤러리 항목 수는 30,000개를 넘었다.

 

 

조만간 읽어야지, 하고 마음먹은 것들이 갤러리에 쌓여 약 30,000개의 사진이 되고, 나중에 더 생각해 봐야지, 하고 마음먹은 것들이 메모장에 쌓여 272개의 쪼가리로 남았다. 친절하게 다가오는 손길을 거절하지 못하고 가방에 쟁여둔 전단치처럼, 미련이 가득한 핸드폰이다.


“너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래”


깜박하는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자, 친구는 단호하게 진단했다. 그러게 말이야. 줄이겠다고 줄여지는 거였다면 진작 그랬겠지만. 어쨌든 나 역시 수심이 가득해지는 미련들을 정리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방법으로 아침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모닝페이지’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모닝페이지를 줄리아 카메론의 책, <아티스트 웨이>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책에선 이렇게 말한다.

 

  

모닝페이지는 밝은 내용일 수도 있지만 부정적인 내용일 수도 있고, 내용이 조각조각 끊어지기도 하며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할 때도 있고, 과장된 내용일 수도 있으며, 유치하기도 하고 과격하거나 아니면 침착한 내용인 경우도 있다. 심지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는 내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괜찮다. 어떤 것이든 그냥 매일 아침 세 쪽을 쓰는 게 중요하다.’

 


어떤 것이나 쓰라고 했지만, 처음에는 정말 이렇게 별 마음 없이 아침부터 세 쪽의 글을 써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심지어 ‘무슨 말부터 해야하지..?ㅎㅎ’ 라고 쓰며 글에게 낯을 가리는 어이없는 짓까지 했다. (나는 무슨 내가 글과 소개팅을 하는 줄 알았다) 생각이 많았던 나이지만, 내가 이렇게 아침부터 근심으로 무거울 줄만 아는 ‘노잼’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다고 순순히 버텨질 리가. 소개팅에 나가서 어색하다는 이유로 입을 내내 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나 또한 매번 아침부터 책상에 앉아 새하얀 지면을 마주하는 부담감에 못 이겨 억지로 짜내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던 것이 어느 시점부턴 정말 술술 써지기 시작했다.

 

밤에 쓰는 일기는 ‘하루’라는 지난 일과가 너무 강해서 그 안에 내용이 갇히기 쉬웠던 반면, 아침에 쓰는 일기는 그날이 아직 없었기에 어젯밤부터, 아니 사실 훨씬 예전부터 줄곧 해온 걱정, 근심, 계속 맴돌던 순간만을 길어올 수 있었다.


미완성된 메모장의 단어, 파편적으로 남은 사진, 머릿속에서나 돌고 돌았던 걱정이 지면으로 꺼내져 나와 제대로 된 문장으로 놓이니 더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말은 못 했지만 실은 걱정하고 있던 것이 며칠씩이나 모닝페이지의 주인공이 되었다.


매번 등장하는 고민의 주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니, 주제가 되지 못한 어떤 말과 순간들이 내게 그저 미련뿐이었는지도 이내 알 수 있었다. 비몽사몽 아침을 흘려보내지 않고 잠깐 20분만 집중했을 뿐인데 그 이후에 올 하루까지 사뭇 바뀐 느낌이다. 여전히 오전 7시 반에 어제 오후 8시를 생각하고는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만, 이젠 꼭 만나봐야 할 순간들만 다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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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6개월, 나는 큰일을 앞두고 있다. 30,000장의 갤러리와 272개의 메모장을 뒤집어엎어 버리는 일이 그것이다. 반년 동안 내 진짜 고민을 길어낸 시간을 토대로 미련들을 정리해볼 생각이다. 부디 그다음 날 아침은 근심이 덜한 얼굴을 하고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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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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