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 다섯 살.

글 입력 2021.02.0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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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는 내 방 책장 구석에 꽂혀 있었다. 하루키 광팬인 외삼촌이 놓고 갔거나 언니가 사놓고 잊어버린 책 중 하나로, 모두가 잊은 나머지 슬슬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 둔 열다섯 살. 시간은 넘쳐나고 할 일은 없었다. 침대에 옆으로 누우면 내 눈높이에 책장 구석이 딱 들어왔다. 카프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참 멋있는 이름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 읽어볼까? 이 생각도 했고. 그래서 손을 뻗어 책을 펼쳤다. 베개의 각도를 조절하면서 아주 열심히 읽었다. 내용이 참 매력적이었다. 내가 원하던 단 한 권의 책. 내게 인생이 뭔지 알려줄 바로 그 책을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엔 인생 목표가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인 소년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 이거야. 터프한 열 다섯 살. 이거야 말로 내 운명이야. 나는 인생에 한 줄기 섬광이 내리쬐는 듯한 전율을 느끼며 순식간에 책장을 넘겼다.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 다무라는 열 다섯 살이고,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 다섯 살이 되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 다섯 살이 되기 위해 다무라가 한 일은 이렇다. 첫째, 학교 그만두기. 둘째, 부모의 돈을 훔쳐 가출하기. 셋째. 험난한 세상에 맞서기 위해 매일 운동하기, 넷째. 지구보다 무겁고 폭풍같이 진지한 태도로 내가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기. 다섯 째. 도서관 가기. 그 외에도 목록은 이어진다. 거짓말하기, 노숙하기, 사랑에 빠지기, 세상의 끝까지 가보기...

 

다무라 카프카는 나고 나는 다무라 카프카. 그는 학교를 등지고 아버지의 돈을 훔쳐 가출을 단행한다. 나처럼 수업을 째고 강변을 산책하다 문득 학교를 더 다니기 싫다는 계시를 받아서 그만둔 건 아니고, 다무라는 자기가 아버지를 살해할 저주를 받았다고 믿어 이에 맞서려고 학교도 그만두고 길을 떠난다.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매일 고강도로 운동하고(나는 이건 따라하지 않았다) 담배도 술도 안 마시고(실패!) 시골 마을로 가, 도서관에 처박혀 책만 읽는다.(이건 어렵지 않지)


그 해, 겨울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방 안에 누워 책에 빠져지내는 동안 선생님은 종종 내게 전화를 걸었다. “너 오늘도 오지 않을 거니?” 나 “이번 기말 시험을 안 보면 넌 전교 꼴등이 되는 거야.” 같은 말을 해주었다. 전교 꼴등이 무슨 상관인가. 나에게는 더 중요한 운명이 있는데. 학교란 지루하고 답답한 곳이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 중에 내가 혼자서 배우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내면에선 하루에도 서너번씩 폭풍이 몰아치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내가 이 세상에 가지 못할 곳과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세상일은 다 부질없고 산에 들어가 땅을 파고 누워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누구하고도 말하지 않았고 시골 마을로 가는 버스표를 끊지도 않았다. 터미널 의자에 앉아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의자는 도쟁이와 할일없는 노인들의 장소였다. 나는 내 인생을 바꿔줄 모험이 이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 틈에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다무라 카프카에게는 오시마 씨가 있다. 오시마 씨는 오래된 도서관의 직원이다. 그는 매일 찾아오는 어린 다무라의 특별함을 알아본다. 책을 탐독하는 진지하고 성숙한 태도. 오시마 씨는 다무라에게 말을 건다. “너는 평범한 열 다섯 살같지 않구나.” 오시마 씨는 다무라에게 숙소를 주고, 연인을 만나게 해주고, 멋진 자동차에 다무라를 태우고 숲 속 오두막에 데려가 다시 없을 고독과 고요를 맛보게 해준다. 결국 세상의 끝으로 다무라를 이끌, 깊은 고요 속으로. 서른이 안 되었을 나이의 오시마 씨는 세심하고 다정해서 다무라의 서툶을 이해하고, 그를 이끌어주는 조력자다. 세계는 터프한 곳이지만, 그만큼 우아하고 기묘한 힘으로 가득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한다.


사실 나는 다무라가 오시마 씨의 숲 속 오두막에서 머물게 되기까지의 여정에만 맹목적으로 빠져들고 나머지 줄거리는 잊었다. 책의 후반부는 UFO와 전쟁과 프로이트적인 꿈의 세계가 뒤섞인 거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는데, 오두막의 석양빛 아래서 홀로 토마스 만의 책을 읽는 다무라의 모습에 비해 아무 매력이 없었다. 그렇게 해변의 카프카는 내게 다무라의 여정의 시작, 그가 학교를 떠나 깊은 숲 속 오두막에 도착하기까지의 줄거리만 남았다. 그 책을 항상 책상 한 켠에 꽂아두었다. 그 후로 많은 책을 읽었지만 해변의 카프카처럼 내 안에 깊숙이 남은 작품은 없었다. 내용도 절반밖에 기억하지 못하면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다무라의 여정을 꿈꿨다. 세심하고 다정한 조력자와 함께 세계의 터프함을 마주하는 주인공이 되는 꿈. 낯설고 우아하고 불가해한 세계가 내게 한껏 다가와 자신의 모습을 펼쳐주길 바랐다.


다무라와 내가 아주 비슷한 상황에 있었기에, 나는 그의 모험이 내 몫의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소설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지루하고 답답한 곳이다. 벗어날 수 없다. 다무라의 성장은 책 두 권 분량으로 순식간에 끝났지만, 실제 삶에서 그 과정은 길고 무료하고 지난하다. 내가 다시 해변의 카프카를 펼친 건 열 다섯 살에서 팔 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나는 대학생이었다. 대학교에서도 엉망으로 다니는 바람에 제적당해 다시 지루하고 답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모험은 일어나지 않았다. 책을 아주 많이 읽었고, 술을 많이 먹었고, 정처없이 여행을 다녔지만 그 무엇도 나를 세계의 끝까지 데려가주지 못했다.

 

인생의 터프함은 되돌아보지 않는 것. 자기 선택의 전부를 감내하며 사는 것. 그렇게 믿은 나는 해변의 카프카를 다시 읽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기껏 세상의 끝까지 갔던 다무라는 결말에서 중학교로 돌아간다. “의무교육은 졸업해야 하니까요.” 이 배신감. 내 자퇴 동지는 정작 마지막에 사회와 제도 속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비겁한 주인공 같으니. 이 책에 기대 열 다섯 살의 폭풍같은 혼란을 지난 내가 우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다섯 살은 원래 우스운 나이다. 부족한 경험과 우주만한 자의식, 젖살과 반항심으로 뭉친 그 시기. 조수석에 앉아 있으면서 내가 운전하고 있다고 믿는 그런 시기.


만약 결말을 기억했다면 내 삶은 좀 더 달라졌을까?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슬픔에 잠겼던 스물세 살, 나는 내가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생각했다. 고집과 자존심에 인생을 자꾸 꼬고 있는 건 아닌가 반성 중이었다. 다무라는 책 두 권만에 터득한 진실을 내가 깨닫기까진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도망쳐서 해결되는 건 없고, 매혹적인 이야기는 절대 당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걸. 소설은 아무리 정교해도 결국 허구와 은유일 뿐이다. 중학교 자퇴는 질풍노도 사춘기의 은유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건 사회 속에서 살아갈 미래를 받아들이는 순응의 은유이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생 지침서가 아니라, 성장 소설 하나를 썼을 뿐이다.

 

두 번째로 <해변의 카프카>를 덮은 나는, 세계의 끝은 커녕 폭우에 물이 줄줄 새는 자취방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창 밖은 어두웠고 가로등 불빛만 꺼지다 만 불씨처럼 깜빡거렸다. 그래, 이젠 정말 받아들여야겠어. 환상이 끝났다는 걸. 내일 출근해야 할 직장이 있었고, 밀린 공과금과 집안일이 있었다.

 

선생님이 더 이상 내게 전화를 걸지 않게 된 건 언제쯤이었을까? 내가 더는 터미널에 멍하니 앉아 있지 않게 된 건? 내가 지나오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지나버린 삶의 한 시기, 내 고뇌와 치기와 힘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시절의 내가 형광펜으로 쫙쫙 그은 밑줄에서 나는 그 시기의 흔적을 본다. ”저어, 오시마 상.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어요. 내가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이런 문장들.

 

나는 이제 다무라가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 다섯 살은 될 수도 없다. 하지만 빗소리가 창문을 때리는 이 어두운 밤,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노랗게 어른거리는 이 순간, 나는 오시마 씨를 기다린다. 그의 멋진 자동차를. 나를 조수석에 태운 채 세계의 끝, 그 깊고 깊은 고요 속으로 다시 한번 데려가 줄 다정한 조력자를.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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