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문여상의 주먹은 맵고 뒤끝이 없다 [만화]

자룡/골왕, <이대로 멈출 순 없다>
글 입력 2021.01.2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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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종종 수다거리로 중학생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나의 중학생 시절은 틈만 나면 옷을 벗어 재끼고, 팬티 바람으로 복도를 달리고, 은밀하고, 순수하고, 과격하고 그래서 즐거웠던 시간들이었다. 팬티 바람으로 생활하는 게 어떻게 가능했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곳이 여자중학교였기 때문일 거다.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나서일까. 나는 학원물(*학교나 학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만화)을 즐겨본다. 서툴지만, 그렇다고 수줍진 않은 십 대의 표정을 좋아한다. 하지만 정작 비범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는 찾기 힘들었다. 학원물 중에서도 주로 봤던 ‘일상 학원물’ 속 여자들은 로맨스에만 예민할 줄 알거나, 설령 우정을 다룬다 해도 로맨스를 두고 갈등이 빚어지는 우정 이야기가 많았다.


그렇다면 ‘액션 학원물’은 어떤가. 액션 학원물의 주인공은 대부분 남자 학생들인데, 그들은 학교의 ‘짱’이 되기 위해 싸우거나, 자신의 계급 상승 혹은 일진 처벌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예전엔 이런 만화들을 몇 번 보다가 일진 미화가 심한 서사, 남자들의 계급 상승에 있어서 전리품, 각성제로 대상화되는 여자 캐릭터에 질려 보기를 그만두었다.

 

‘짱’이 되고자 주먹다짐하는 이야기 따위, 정말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여태 액션 학원물을 안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근데 웬걸, 웹툰 <이대로 멈출 순 없다>를 본 순간 이 모든 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멈출 순 없다>, 자룡/골왕, 다음웹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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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단어 그대로 똥통 그 자체야’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정문여상으로 전학 온 배소연은 이 학교가 선생님도 손을 놓아버린 무법지대임을 첫날부터 직감한다. 화장실에 가니 정문여상 아이들은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고, 화장실 거울에 립스틱 자국을 남기고 있는가 하면, 급식실에선 조용히 밥을 먹긴커녕 테이블 위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다 지나가는 애의 식판을 엎기라도 하면, 그땐 주먹질이 뒤엉켜 그야말로 급식실이 난장판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매점에서 줄을 서지 않고 새치기를 했을 때 그들에게 대화의 시간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는다. 한두 마디로 말이 통하지 않으면(말이 통하길 딱히 바라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일단 주먹으로 싸우고 보는 거다. 심지어 3층에 있는 영화감상부 전용 화장실을 썼다는 이유로, 전학 온 첫날 배소연은 영화감상부 선배한테 얻어터져야 했다. 그야말로 ‘막장’ 고등학교였다.


도대체가 이 학교 여자애들은 쓸 줄 아는 게 주먹밖에 없는 거냐고! 처음 이 웹툰을 읽어나갈 때 쉴새 없이 이어지는 쌈박질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액션 학원물에서 이렇게 과격한 여자들만 나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나?


‘근데 나, 왜 이거 재미있지?’

 

학생들이 주먹을 휘두르고 얻어터지는 걸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내가 이상했다. ‘짱’이 되고자 주먹다짐하는 이야기 따위는 유치하다 생각했던 나인데. 그런 내 본능적 쾌감을 반신반의하며 최근 나온 회차까지 정주행을 끝냈다.


솔직히 말하면, 폭력이 일각에선 쾌감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몸소 체감한 건 이번이 처음 같았다. 그래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액션 학원물을 싫어한 게 아니라, 그게 ‘소년’뿐이었다는 사실이 싫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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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멈출 순 없다> 14·18·27화 썸네일

 

 

<이대로 멈출 순 없다>가 더 매력적으로 읽히는 건, 이 작품에는 그동안 진절머리를 냈던 학원물의 일진 미화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 정문여상엔 ‘왕따’가 없다.

 

일진 미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던 작품들은 외모가 못생겼거나 흔히 “찐따”같다는 불합리한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진 캐릭터를 그려내고, 그런 불합리한 구조에 편입하여 복수하겠다는 “찐따”캐릭터를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그 구조를 긍정하는 모순에 부딪혀 왔다.


하지만 <이대로 멈출 수 없다>엔 왕따가 없다. 왕따가 없으니 왕따를 시키려는 아이도 없다. 예뻐지는 방법에 관심이 많은 아이는 있지만, 예뻐지는 일에 시큰둥한 친구를 보고 못생겼다고 무시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못해왔던 이야기에 신경이 곤두섰던 나는 오랜만에 정말 웃기만 했다.


가끔 ‘여성’이라는 사실에 지나치게 결박되어 있어, 자기 검열을 멈추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여성이 이입할 수 있는 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기존의 여성 대상화를 경계하다 보니 모든 작품의 여성을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게 된 꼴이다. 분명 필요한 태도이고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두어질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피로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만화의 등장이 너무 반갑고 고맙다. 흑백으로 그려지는 <이대로 멈출 순 없다>는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 이걸 볼 때만큼은 그저 낄낄대라고, 책방에서 과자를 집어 먹으며 생각 없이 읽던 그 시절의 만화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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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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