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전소설 '운영전' 다시 읽기 [문학]

'운영전'의 악인, 노비 '특'을 중심으로
글 입력 2021.01.2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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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정규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몇 편의 고전소설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지금 와서야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라지만, 당시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소설들을 말이다. 그 중 유명한 <운영전>을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운영전은 선비 김진사와 궁녀 운영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적강형(謫降型)소설로, 대중적이고 친숙한 고소설이다. 운영전의 특징을 묻는다면 고등학교 사람들은 문학시간에 배운 것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단어를 말할 것이다. 염정 소설, 몽유 소설, 불교 사상, 신선 사상, 권선징악, 액자식 구성, 신분을 초월한 남녀 간의 비극적인 사랑, 인간성의 해방 같은 키워드를 말이다. 문학 이론을 열심히 배웠다면 전지적 작가 시점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


운영전의 줄거리를 짧게 살펴보자면 술 취해 잠든 선비 유영의 한바탕 꿈이다. 꿈에는 궁녀 운영과 선비 김진사가 유영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안평대군에게 서예와 시를 배우며 수성궁에 살던 궁녀 운영은 우연히 안평대군을 찾아온 선비 김진사와 사랑에 빠진다. 운영이 궁녀인 이상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다른 동료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 안평대군이 의심을 시작하자 운영은 고민 끝에 운영은 탈출을 결심한다.


하지만 김진사의 노비 특이 재물을 욕심내며 배신하고, 운영과 김진사의 밀회는 탄로난다. 안평대군이 죽이려 하나 궁녀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한다. 하지만 운영은 방에서 자결하고, 김진사는 절에 가서 운영을 위해 재를 올린 후 병 들어 죽는다. 둘은 천상에서 재회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야기가 끝나고 유영이 눈을 떴을 때는 둘의 사연이 적힌 두루마리가 남아있었다.


 

 

결말에 대한 짧은 논의



이상이 <이생규장전>, <만복사저포기>와 함께 비극적인 고전소설의 대표격으로 손꼽히는 <운영전>의 줄거리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하나의 궁금증이 인다. 과연 이 둘의 사랑은 비극인가? 운영의 자결과 잇따른 김진사의 병사(病死)로 현세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천상에서 둘은 재회해 서로 사랑을 나누며 즐겁게 지낸다. 흔히 결말에 따라 그것이 비극인지 아닌지가 결정되곤 하는데, 둘의 결말은 과연 현세의 죽음에서 끝나는가?


나는 천상에서 사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김진사와 운영의 사랑은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김진사와 운영이 현세를 기억하고 그 감정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이상, 현세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다. 천상에서의 김진사와 운영은 현세에서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동일인물이고, 천상은 현세의 연장선이다. 1막에서 실패했어도 2막에서 성공했다면, 그건 성공이다.

 

 

 

운영의 자살



천상에서 둘이 만난 것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현세에서 운영은 비단 수건으로 목을 매어 자결한다. 궁녀들의 변론으로 인해 안평대군이 죽음을 명하지 않았는데도 운영이 스스로 택한 일이다. 이때 운영이 안평대군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진술, 즉 유언을 아래 서술했다. (굵게 표시한 것은 내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다.)


“주군의 은혜가 산과 같고 바다와 같건만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이 저의 첫째 죄입니다. 전후에 지은 시로 주군의 의심을 받으면서도 끝내 바른대로 아뢰지 않은 것이 둘째 죄입니다. 서궁의 죄 없는 사람들이 저 때문에 함께 죄를 받게 된 것이 셋째 죄입니다. 이 세 가지 큰 죄를 지었으니 제가 산들 무슨 면목이 있겠습니까? 혹여 죽음을 늦추신다면 마땅히 자결하겠나이다.”


운영이 직접 밝힌 자살 이유 그 어디에도 김진사와의 사랑은 언급되지 않았다. 육체적인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이 죄일지언정, 자신이 김진사를 사랑한 감정만은 그 자체로 죄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민희의 저서 『쾌족, 뒷담화의 탄생』을 참고하면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죄가 ‘첫째, 안평대군에 대한 정조를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여성, 특히 궁녀에게 정조를 지키는 것은 목숨을 지키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다. 정조를 지키는 것이 여성에게는 선(善)이요, 의(義)며, 죽음을 정당화 하는 유일한 기제다. 맹자는 의로움과 목숨 둘 다 선택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택하라고 했는데, 운영은 이를 따른 것이다.

 

둘째, ‘바른대로 아뢰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충(忠)의 덕목을 지키지 못했고, 인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운영에게 자신이 정직한 것은 충이요, 인이다. 인은 인간이 추구해야할 최상의 덕이며 완전한 것인데, 그것이 무너졌으니 운영 역시 무너진 것이다.


셋째, ‘죄 없는 사람들이 저 때문에 함께 죄를 받게 된 것’은 타인과의 신뢰관계가 무너진 것이다. 유가에서 인간은 관계적 자아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웃과의 관계가 무너지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회적 관계 속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지위에 맡는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는 정명(正名)을 어긴 것이다. 충하지 못했으므로 신(信)도 무너졌다.


궁녀 운영은 유교적 사회에서 살아가며 김진사를 사랑한 이상 자신이 살아오며 배웠던 모든 가치(인의예지, 충 등의 사상이 이에 속한다)를 제 손으로 저버릴 수밖에 없다. 유교적 가치를 모른다면 모를까, 안평대군에게 직접 서예와 시를 배울 정도로 조예가 깊고 세상의 이치에 대해 배움의 정도가 깊은 이상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가치관과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죄를 직접 밝히며 그 벌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만약 노비인 특이 배신하지 않고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다면 운영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했을까? 탈출해 김진사와 둘이 함께 산다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운영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노비인 특의 악행과 결말



억압받고 천대받는 삶을 사는 노비는 대부분의 고소설에서 의미 있거나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 주인공의 조력자,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존재와 함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대부분 높은 신분의 사람이고, 주인공을 옆에서 보필해주는 노비는 꼭 필요하기 마련이다. 비록 그들이 적은 분량에서 평면적으로 다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운영전>에서도 김진사의 노비인 ‘특’이 등장한다. 특은 단순히 김진사를 보필할 뿐만 아니라 운영과의 만남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재물을 탐하며 김진사를 배신해 운영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끝내는 부처님의 천벌을 받아 죽으니, 평면적인 악인으로 그려지긴 해도 분량이나 역할은 확실한 편이다.


서신애는 노비의 행동과 처벌을 다룬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목적과 욕망에 의해 행동하며 상전과 대별되는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의지는 삐뚤어진 욕망을 통해 구현되었기에 이들이 상전에게 항거하며 벌인 행위는 예외 없이 즉결징치로 결말을 맺는다. 노비에 대한 처벌은 작품 속이나 현실에서나 여전히 불공평했다. 천한 노비이기에 행위를 벌일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다. 이에 본고는 천대받는 약자이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한 세 작품의 노비를 소환하여 그들의 억울한 속내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특의 악행은 김진사에 대한 배신이고, 이는 특의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서신애는 이를 ‘재물축적을 위한 사기절취’라 말한다. 김진사는 특을 믿었으나 특은 김진사를 배신하고 재물을 차지하기 위해 거짓을 고했다. 이러한 것을 단순히 악행이라 치부하고 권선징악의 악이라 단정 짓고 끝내기 전에, 탐욕의 기저를 알아봐야 한다.


특은 주인과 따로 거주하는 외거노비인데, 외거노비는 솔거노비와 다르게 재물도 축적 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김진사에게 재물을 요구하고, 운영의 재물을 빼돌리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외거노비는 상전에게 신공(조선(朝鮮) 시대(時代)에 노비(奴婢)가 신역(身役)으로 납부(納付)하는 세(稅))을 납부해야 했는데 이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특은 탐욕이 많은 인물이기도 했지만 외거노비라는 신분상, 재산축적은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던 것이다.


김용만의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에 따르면 상전은 흉년, 기근, 질병 등에도 불구하고 사형 을 가하면서까지 신공을 받고자 했다. 빈궁한 노비들은 이를 감당하지 못해 토지 노비를 방매하기도 했고 원공 대신 선물만 내기도 했으며 때로는 전혀 내지 못해 도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특의 처벌에 관한 부분이 흥미롭다. 특은 노비임에도 상전이 직접 처단하지 않고 부처에게 기도해 함정에 빠져 죽게 된다. 이에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조선 중기 이후의 노비계층의 성장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특은 신분적으로는 소유주에게 예속되어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소유주의 예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하는 노비일 것이다. 또한 특의 행위는 국법으로 처벌해야 할 죄이나, 김진사와 운영의 사랑 역시 금기된 것이기 때문에 특의 악행을 고발할 수 없다.


특은 삶을 욕망하는 인간이다. 신분제도의 벽에 갇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고 잘못된 선택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나, 그 과정은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자 했던 인간 삶의 한 모습이다.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욕망의 추구는 노비라는 전제에 의해 비극적 결과를 가지고 올 수밖에 없다.


서신애의 논문 중 다음 부분을 함께 읽고 싶다. 왜 노비들은 악행을 저지르고 처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는지 말이다.


사회적 약자로써 천대와 멸시만을 받아야 했던 노비들은 문학 속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천한 태생은 그들에게 악한 성품이라는 고정된 틀을 제공하고 그들의 죄에 대해서도 공정한 처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략) 모든 것은 행위의 결과만 보고 판단하였고 왜 그러한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중략) 가장 천한 태생이기에 죽음이라는 징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하였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현실에서나 문학 속에서나 인색했다. 현실에서도 함부로 다뤄졌던 노비들의 삶은 문학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그들, 천한자라고 낙인이 찍힌 노비의 속내를 읽어내야 할 때가 되었다.

 

 

참고문헌

서신애 (2017), 「고전소설 속 노비의 행위와 처벌. 돈암어문학」, 32, 349-382

김정숙 (2010), 「<운영전>과 <동선기> 속 악인 탄생의 의미」, 『한문고전연구』 21

이민희 (2014) 쾌족, 뒷담화의 탄생, 푸른지식

 

 

[안우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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