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영화]

[함께 읽는 영화] 시간: 숨, 파니 핑크, 화
글 입력 2021.01.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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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소복이 쌓인다. 쌓인 눈의 높이만큼 시간도 흐른다.


이렇게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변화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인지한다.


녹슬어버린 그넷줄, 수북이 자라나는 털, 하나둘 패인 주름처럼.


시간은 매일 겪지만, 매일 새롭게 다가온다.


영화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한 여자(제시 버클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7주’간 사귄 남자친구 제이크(제시 플레먼스)와의 만남을 정리 하고 싶어 한다. 마지막을 예견하면서도, 그녀는 제이크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그와 자동차를 타고 시골로 떠난다. 남자는 그나마 남아있던 정도 떨어질 만큼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반복한다.


감독 찰리 카우프만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로 기존 영화들에서 다뤄 온 시간과 기억에 대한 믿음을 깨부수어 파편으로 만든다. <이터널 선샤인>과 <존 말코비치 되기> 등 독특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영화의 각본가이기도 한 카우프만. 그가 다룬 ‘시간’을 테드 창의 소설 <숨>, 도리스 되리의 영화 <파니 핑크>, (여자)아이들의 노래 ‘화(花火)’와 함께 이야기해보려 한다.

 

 

 

숨 (테드 창)



찰리 카우프만이 초대한 첫 손님은 SF 단편 소설집 <숨>이다. 이 책의 저자 테드 창은 SF 소설의 대가로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숨>과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시간의 주관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숨>이 먼저 대화를 이끈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중략)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도 화답한다.


 

“모든 것은 색채를 띠지, 색채가 더해진다고. 기분이나 감정, 과거 때문에 객관적인 현실이란 없는 거야. 우주에는 색이 없잖아? 뇌에만 있는 거야.”

 

 

헤어지려 마음먹고 본 여자의 마음에 제이크가 완벽할 리 없다.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 장면들도 꺼림칙하게 탈바꿈한다. 어느새 두 사람은 시골집에 도착한다. 집안의 일상적인 지하실은 어둠의 공간으로 다가오고, 지하실 문에 개가 긁은 흔적도 섬찟하게 다가온다. 식사 도중 무심결에 본 제이크 엄마의 발짓에서는 불쾌함이 느껴지고, 갈라진 발톱에서는 악취가 풍겨오는 듯하다.

 

이 여자가 제이크와 함께한 7주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행복하긴 했을까. 오직 첫 만남을 회상할 때만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돋아난다. 현재나 미래의 제이크에게 건네는 눈빛은 메말라 있다. 마음은 이미 몇 번이고 이별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여자는 이 괴기스러운 집구석에서 빠져나올 구멍도 없이 갇혀 있다. ‘몹시 고질적인 어긋남’만 재확인하며.

 

여기까지 언뜻 보면 여자가 주인공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물리학자다. 하지만 제이크의 부모님 앞에서는 화가, 노인 연구가 등으로 재창조된다. 조연으로만 여겼던 제이크에 의해서. 나레이션과 샷의 구도 때문에 속을 뻔했지만, 주인공은 여자가 아니라 제이크다. 모두 제이크가 주관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들이다.

 

영화는 실패한 상상 모음집이다. 제이크는 상상을 반복한다. 그러나 매번 실패한다. 여자와 제이크는 실제로 만난 것 같지 않다. 무수한 실패 속에서 제이크와 그의 부모님의 과거, 현재(인 것 같은), 미래 등이 뒤죽박죽 섞인다. 그들이 시간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그들을 통과하며 흔적을 남긴다. 영화는 인화되지 않은 채 흩어진 필름처럼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공백으로 남은 곳에 또 다른 작품들을 채워보려 한다.

 

 

 

파니 핑크 (도리스 되리, 1994)



“시계는 차지마. 항상 몇 시인지 알리려하니까. 지금이란 시간만 가져.”

 

단호하게 말하는 주인공은 <파니 핑크>다.

 

<파니 핑크>는 사랑의 상대가 필요한 여자 파니 핑크가 우연한 계기로 심령술사를 만나, 미신을 통해 사랑을 쟁취하려는 과정을 그린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와 <파니 핑크>는 꽤 잘 맞는 대화상대다. 그들은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시간에 관해 일가견 있는 <파니 핑크>는 먼저 운을 띄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고. 과거와 미래의 유혹을 뿌리치라고.

 

하지만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이 필연적임을 아는 동물은 인간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동물들은 현재에 산다. 인간은 그럴 수 없기에 희망을 발명한 거다.”

 

결말이 필연적인 연극 속에서 제이크가 잡으려 했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끝없는 반복 속, 단 한 번의 성공? 어쩌면 수줍게 건넨 용기가 자신을 외롭지 않게 해줄 거라는 믿음? 하지만 제이크 앞에는 과거의 실패들이 쓰레기가 되어 가득 쌓여 있다. 그의 현재는 계속되는 실패에 지쳐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다.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난 과거에 신경 쓰지 않아요. 나의 추억들로 나의 불을 밝혔죠."

 


<파니 핑크>는 엔딩곡 에디트 피아프의 ‘후회는 없다 Non, Je Ne Regrette Rien’로 위로의 말을 건네며 퇴장한다.

 

추억, 불을 밝힐 추억이라도 있으니 그리 헛된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런데 상상도 추억이 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했던 모든 게 헛된 짓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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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와 여자가 타고 있던 차는 나이 든 제이크가 근무하는 학교에 세워져 있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차는 꼼짝할 수 없이 눈으로 가득 뒤덮여 있다. 제이크는 그의 상상에, 그의 시간에 갇혀 버렸다.

 

 

 

화(火花) - (여자)아이들



“차디찬 한겨울이 덮친 듯 시간은 다 얼어버리고”

 

영화는 ‪풀어야 할 의문은 단 하나라고, 이제 답할 시간이라고 한다. “내가 미쳤나.” 미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화(火花). 매번 독보적인 컨셉으로 돌아오는 (여자)아이들이 신곡이다. 이 노래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가 던진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한다. 꼼짝할 수 없이 쌓인 눈을 어떻게 털어내야 할까.

 

 

불을 지펴라.

 

끊어진 미련을 품에 안고, 시렸던 시간을 나를 태워간다.

 

차갑게 부는 바람이, 눈이 하얗게 덮인 마음이, 아침이 오면 부디 모두 녹을 수 있게. 

 

잔인한 그 바람이 남긴 듯한. 뜨겁지 못한 날들에 데인 흉터를 모두 지워내리라.


 

기약 없는 계절이 끝없이 펼쳐졌을지라도, 추억을 거름으로 찬란한 꽃을 피우지는 못할 지라도, 관객 없는 무대에서 외로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지라도.

 

결국에 눈은 녹는다. 얼마나 어떻게 쌓였든 눈은 녹는다, 녹아버린다. 시간도 그렇게 우리를 통과한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결국에는 관통해버릴 것이라는 믿음은 곧 희망이 된다. 눈이 녹아 버린 풍경은 아름다울 수도,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냥 외롭진 않을 것이다. 탁 트인 시야로 미처 보지 못했던 서로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 제이크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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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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