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눈사람을 부수는 사람들 [사람]

무형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것
글 입력 2021.01.1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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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전국적인 폭설이었다. 눈이 교통 상황을 나쁘게 해 집에 못가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올림픽대로는 말 그대로 꽉 막혀 출퇴근 시간은 평소의 세배가 기본이었다. 정말로 나쁜 상황이었지만 사람들은 왜인지 조금은 들떠 보였다. 특히 긴 통근 시간을 거쳐 회사를 가야할 의무가 없는 사람들은 더 그랬다.

 

천둥 번개가 치는 고등학교 야자시간처럼 세상이 북적북적하다. 이 갑작스러운 겨울왕국이 마치 그간일상에서 벗어나기 유독 어려웠던 우리에게 주는 이벤트 같다는 철없는 생각도 했다. 눈이 주는 로맨틱한 속성은 언제나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특별한 날, 친구들은 sns 에 연이어 글을 올렸다. 인스타그램 속에 눈 사진이 가득했다. 집 앞 데크에 가득 쌓인 눈의 두께, 하늘에서 흩날리고 있는 커다란 눈발 같은 것들이. sns 계정 여기저기 눈이 쌓여 있었다.

 

개중에는 스키나 보드를 타고 길거리를 스키장처럼 누비는 사람들을 찍어 올린 유머글도 있었고, 내리막길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차를 힘을 합쳐 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훈훈한 글도 있었고, 꽉 막힌 도로 상태에 대한 한탄글도 있었다.

 

온종일 눈 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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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수많은 눈 사진 중에서도 가장 많았던 사진은 단연 눈사람들이었다. 눈이 오면 우리는 눈사람을 만든다. 가끔 잘 뭉쳐지지 않는 눈이 내린 날에는 눈사람을 못 만드는 눈이라며 실망하기도 한다. 눈사람을 만드는 일은 유치하게도 여전히 재밌다.

 

사진 속 친구들은 눈사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고, 각자 자기가 만든 눈사람 옆에서 코가 빨개져 웃고 있었다. 눈사람뿐만 아니라 눈 곰돌이, 눈 토끼, 눈 강아지 등 눈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다 만들어내려는 듯했다. 올해는 유독 집게틀로 만들어낸 눈 오리가 여기 저기 서식 영역을 넓혔다. 친구들이 올린 귀여운 폭설 특별전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아쉽게도 감기에 단단히 걸려 집 밖에 내리는 눈을 쳐다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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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올해는 눈사람의 사진이 올라오는 것만큼 많이 부서진 눈사람의 사진이 올라왔다. 정성껏 만든 눈사람을 누군가 부순다. 그에 대한 불만 섞인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눈사람을 부수는 사람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더 열심히 눈사람을 부숴댔다. 열심히 만들어 놓은 눈사람은 꼭 다음날이 되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 사람들은 결국 대전대 모 카페 앞 엘사로 유명했던 눈사람도 부쉈다. 카페 사장님은 겨울마다 카페 앞을 지나가는 손님들과 학생들을 위해 눈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올해는 겨울왕국의 엘사였다. 오랫동안 공을 들인 그 퀄리티가 대단하고 정성스러워서 여러 커뮤니티를 오가며 사진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엘사도 부서졌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몰래 엘사에게 주먹을 날리는 그 cctv 영상이 참 꺼림칙했다. 눈사람을 부수기 위해 차에서 내려 힘껏 발로 차는 누군가가 찍힌 cctv를 봤을 때도 똑같았다.


눈사람을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알텐데, 사실 눈사람을 만드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넓게 퍼져 있는 하얀 눈을 하나로 뭉쳐 굴리고 굴리고 굴려서 큰 구를 만들어야 한다. 눈은 생각보다 잘 불어나지 않고, 불어난 눈은 생각보다 무겁다. 굴린 눈을 예쁘게 다듬고 그 위에 다시 무겁게 굴린 눈을 얹고 이 과정을 전부 끝내고 나면 추운 겨울임에도 땀이 나기 시작한다. 눈사람이 아니라 눈 곰돌이, 눈 엘사 같은 것을 만든다면 당연히 더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겠다. 눈사람을 예쁘게 쌓는 사람들은 볼이 빨개져 가며, 그 카페의 사장님처럼 출근길의 사람들이 기분 좋게 일하러 가기를 바라는 예쁜 마음도 종종 같이 눈사람에 담아 쌓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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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을 부수는 행위는 그냥 눈사람만 부수는 게 아니라, 공들인 정성까지 같이 부순다. 누군가 시간을 쏟아낸 것을 파괴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그 마음은 참 밉게 느껴진다. 그게 고작 눈사람이라고 해도 그렇다. 눈사람을 부수는 이들은 타인의 노력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순간의 희열을 위해 부수고, 눈사람 너머에 있는 존재는 보지 못한다. 그 너머의 사람들은 어쩌면 작은 어린아이여서 부서진 눈사람을 발견하고 엉엉 울었을 수도 있고, 그 눈사람을 위해 반나절을 온통 쏟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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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적이 인스타그램에 짧은 글을 올렸다. 남자친구가 눈사람을 걷어차며 크게 웃는 것을 보고 헤어짐을 결심했다는 글이었다.


그가 눈사람을 부순 이유에는 눈사람은 그래도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깔려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그저 부수는 것이 재밌다고 해서 길거리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부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래도 되는’ 존재에게 ‘그렇게 하는’ 행위는 꽤 위험하다. 특히 화자는 남자친구의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서 그의 폭력성에 대한 아주 아주 작은 가능성을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소한 행동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리가 화자의 논리성을 따져야할 필요는 없다.

 

*


요즘 눈사람을 부시는 사람들이 특히 많아 보인다. 길에서 만든 눈사람을 집에다가 숨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두가 타인을 마음에 둔 채로 살아가면 좋겠다. 누군가 만들어낸 소중한 마음을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한다. 조금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형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눈사람이 없는 세상보다 있는 세상이 조금 더 귀엽기도 하지 않은가. 하하

 

 

[신지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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