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육우당'을 아시나요? [사람]

아스라이 사라져 간 생명의 모양을 떠올리며
글 입력 2021.01.1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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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왜 살지?”


이것은 삶에 회의를 느끼며 던지는 푸념과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나는 왜 살아가는지,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알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질문입니다. 저는 삶의 본질을 깨닫고 싶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살아감’의 끝은 죽음이므로, 죽음에 관한 상념 또한 저를 쉽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죽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라는 존재의 소멸이 쉽게 예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일까요. 때로는 밤마다 암흑 속에 몸을 맡기는 것이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과 겹쳐 보였기에, 잠을 잘 때 모종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도 어딘가에선가 아스라이 사라져 갈 생명의 모양을 떠올렸습니다.


얼마 전에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 책에서 한 인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육우당(六友堂)’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실존했던 사람입니다. 육우당은 본명이 아닙니다. 녹차와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를 여섯 친구로 여긴다고 해서 직접 지은 필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없는 고인(故人)입니다. 그는 1984년에 태어나 2003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국 나이로 20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사인은 자살입니다.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제가 침대에 누워 바라보았던 암흑이 죽음이라면, 자신의 의지로 암흑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곧 자살일 것입니다. 이는 두려움을 집어삼킬 정도로 큰 결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죽음이 나에게로 오는 것도 두려운데, 직접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일지 쉽게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죽음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알기 위해, 그의 인생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육우당 추모.jpg

육우당 추모제에 놓인 유품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육우당은 가톨릭 신자이자 동성애자였습니다. 저는 당신의 머릿속에 특정 고정관념에 의한 일반화가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톨릭 신자’나 ‘동성애자’라는 단어가 육우당이라는 인물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중학교 때 깨달았으며, 고등학생이 된 후 2002년 초반에 ‘성소수자 인권연대’에 가입합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청소년 시기 내내 따돌림을 받던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열정적인 성소수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그는 여러 편의 시조와 가사를 쓰면서 시조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심지어 연극배우로서, 성악가로서 재능을 뽐낼 정도로 다재다능했습니다.


2003년 봄, 청소년보호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청소년 보호법 시행령’의 청소년 유해 매체물 심의 기준에 ‘동성애’가 포함되어 있던 것을 삭제하려 하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를 필두로 개신교계가 적극적인 반대에 나섰습니다. 한기총은 “국가기관이 청소년들에게 동성애를 권장하는가?”라는 제목과 함께 성서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 때문에 유황불 심판을 받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쏟아지는 비난과 인신공격에 마음과 몸이 모두 상해버린 탓이었을까요. 그해 4월, 육우당은 자신이 활동하던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사무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유서에 남긴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많은 성적 소수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며 반인류적인가”


“내 한 몸 죽어서 동성애 사이트가 유해 매체에서 삭제되고,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그것으로 나 죽은 게 아깝지 않아요”


“내가 믿는 하느님은 나를 받아줄 것입니다”

 


그가 죽은 후, 동성애 사이트는 음란물 지정에서 해제되었습니다. 죽은 지 1년 뒤에는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청소년 보호법 시행령 심의 기준에서 동성애 조항이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기총은 그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은 한국 주류 개신교계에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모태신앙을 가졌고, 독실한 외할머니 밑에서 종교적 가치관을 확립했습니다. 저에게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알아간다는 것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일 년 전쯤일까요. 제가 즐겨 보던 유튜브 채널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관련 채널이었습니다. 해당 채널의 동영상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변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던 중 영상에 나오는 사람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한다는 말로 시작되었지만, 결국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반대가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반대와 함께 등장하는 죄, 지옥, 음란, 죽음, 파멸이라는 단어들은 폭력에 가까웠습니다.


저에게는 사랑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교회가, 한편으로는 증오를 쏟아내며 결국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끔찍한 일을 행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려 애써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육우당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육우당이 남긴 시들을 모아 <내 혼은 꽃비 되어>라는 제목의 유고집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이를 구매하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판매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저는 책을 펴냈던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당시 동성애자인권연대)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관계자는, 해당 도서가 이미 절판되었고 남아있는 자료도 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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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당 추모집 <내 혼은 꽃비 되어>

 

 

저는 전화를 받았던 관계자의 어조에서 묻어난 당혹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갑자기 그걸 찾는 사람이 있다니’ 등의 생각에서 비롯된 미심쩍은 말투. 이는 육우당의 삶이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아는 사람만 아는’ ‘비주류’의 이야기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육우당의 죽음 이후 청소년 동성애자 문제를 공론화하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인권운동가들은 ‘동성애는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라는 사회적 담론을 깨기 위해 활동했고, 성소수자의 상황을 대변하는 이들이 증가했으며, 성소수자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2013년에는 청소년 성소수자 문제를 다룬 수려한 문학 작품을 선정해 시상하는 ‘육우당문학상’이 생겼습니다.


저는 한 인간의 정체성이 성적 층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아에는 수천수만 개의 가능성이 숨어있는데, 이를 ‘동성애자’라는 단어로 재단하여 전형성을 부여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육우당이라는 인물은 그저 매 순간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상상도 못 할 만큼 멋진 모습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르는 어린 청년이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괴로워했다는 사실은 한없이 큰 좌절과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떠올립니다. 육우당을 포함하여,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나아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모든 이들을 떠올립니다. 왜 그들이 우울감에 집어 삼켜져 죽음으로 비척비척 걸어가게 되었을지 깊게 생각합니다.


흔히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빛난다고들 하지만, 죽은 이들이 빛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지막 도피처로 죽음을 선택했던 이들의 전언이, 죽음과 같은 침묵과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남아있는 이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중 고통과 분노와 함께 죽음에 가까워지는 이들에게 어떤 위로를 남겨야 할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다 잘될 거야’, ‘너의 곁에서 지지하는 내가 있어’라는 조언은 따뜻하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정말 앞으로 잘될지는 미지수이며, 제가 모든 이의 곁에 직접 가지 않는 한 ‘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깊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가 떠올랐습니다. 2020년에 방영된 이 드라마에는 트랜스젠더인 ‘마현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나는 다이아”라면서 자신의 단단함을 읊조리는 그녀는 성소수자로 드라마 속에 나오지만, 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사회적 논쟁거리조차도 아니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포용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이태원클라쓰 마현이.jpg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저는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강한 다이아몬드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태원 클라쓰>의 OST인 '돌덩이'의 가사처럼, 시들고 저무는 그런 세상 이치에 당신을 가두려 하지 마세요. 쓰러지고 떨어져도 다시 일어나 오르는 당신은 단단한 돌덩이와 같으니까요.

 

 

나를 봐

끄떡없어

쓰러지고 떨어져도

다시 일어나 오를 뿐야


난 말야

똑똑히 봐

깎일수록 깨질수록

더욱 세지고 강해지는 돌덩이


누가 뭐라 해도 나의 길

오직 하나뿐인 나의 길

 

<이태원 클라쓰> OST - 돌덩이 中

 

 

[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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