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삼청로 30, 미술관 앞'으로 보내는 편지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1.1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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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글을 쓸 때 느껴지는 사각거림을 좋아한다. 이 일은 몸의 기억에 냄새와 촉감의 순간들을 남긴다. 퍽퍽한 섬유질의 냄새와 서늘한 질감을 느끼며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글을 적어 내려갔다. 어떤 단어를 골라 적을지도 열심히 고민한다. 틀린 글자들을 지울 순 있지만, 그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 글의 수신인에게 닿을 테니까. 글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많은 정성을 쏟는다. 종이에 담긴 그 무게감은 그렇기에 더 큰 파동으로 마음을 울린다.


특히 편지의 무게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내게 편지를 쓰는 일은 일상이었다. 심심하면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직접 줄 때도 있고 부치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매달 주기적으로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활동이 있었다. 그 편지들은 담임 선생님을 통해서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한 번은 선생님이 어머님과 사이가 정말 좋은가보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셨다. 두 사람의 편지를 읽고 있다 보면 그 감정이 담긴 말들에 울컥했다고 하셨다. 그때 처음으로 글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가 실감 났다.


문득 모르는 새에 찾아와 나를 울렸던 편지들이 생각났다. 과거의 나에게서 받은 편지, 친구가 몰래 부친 편지,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누군가의 편지. 불쑥 내 인생에 등장해 나라는 존재를 한 겹 감싼 그 편지들. 편지를 안 쓴지도 한참 된 것 같다. 메신저를 통해 짧은 안부를 전하는게 전부였던 어제를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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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로 30, 미술관 앞' 키트

 


오늘은 편지를 하나 쓰기로 했다. 종이를 가지런히 모아 준비하고 펜을 들었다. 이 편지의 수신인은 삼청로 30, 미술관 앞이다.


 


사동 30번지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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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하는 공공 프로그램 '삼청로 30, 미술관 앞'은 미술관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보내는 행위이다.

 

삼청로 30은 실제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0 국립현대미술관)인데 이곳에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면 그것을 엮어 한 권의 자료집을 완성할 것이라고 한다. 전에 없던 코로나라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들을 남기게 될까. 나는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싶을까 고민하며 신청했다.


이야기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 그 공간에 새로운 메시지를 완성시킨다는 아이디어는 양혜규 작가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휴관 중이라 전시를 볼 수 없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그녀의 개인전이 진행 중이다. 양혜규 작가는 독일과 한국, 때로는 그 너머의 세계를 계속해서 이동하며 개인과 사회의 기억에서 만들어지는 서사를 추상적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중 한국에서 열었던 첫 번째 개인전의 제목이 '사동 30번지(2006)'였다. 어딘가 익숙한 이 30이라는 우연성. 이 '사동 30번지'가 바로 '삼청로 30, 미술관 앞'의 모티브가 되었던 작업인 것이다.


전시의 제목이자 주소인 '사동 30번지'는 작가의 할머니가 살았던 인천의 작은 집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이 방치되어 폐가가 되었는데, 작가는 이 곳에 작품을 설치함으로써 새로운 불을 켜기로 했다. 벗겨지고 부서진 허름해진 공간 사이사이에 작가의 시선이 심어졌다.


그리곤 지나간 시간을 고스란히 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주소로 관람객들을 초대했다. 지도를 보내 관람객들이 찾아오면 직접 자물쇠를 따고 들어와 관람하게 한 것이다. 따로 상주하는 관리자가 없이 언제든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치 한참 뒤에 놓아두었던 과거 나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초대를 받아 버려진 공간으로 떠나는 여정. 그곳에서 마주친 폐가. 한 때는 안온한 집이었을 과거의 공간을 돌아보며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상징하는 것 같은 종이접기, 크게만 보였던 조그만 대문, 스러져가는 건물을 찬찬히 살피곤 이내 나의 고향과 나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버려진 공간의 시간은 그때부터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사동 30번지'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모두의 고향이었을 것이다.

 

 

 

삼청로 30, 미술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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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통한 삼청로 30으로의 초대는 방문과 노크, 새 소식의 전달로 불이 켜지는 한 공간을 상상케합니다. 삼청로 30 역시 나름의 시간을 살아 온 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오늘,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사연이 수신되는 장소이자 주소가 되고자 합니다.'
 

 

'사동 30번지'가 장소를 찾아오게 해 사람들의 여정까지 이야기로 담아냈다면, '삼청로 30, 미술관 앞'은 편지라는 방식을 이용한다. 코로나로 누군가의 온기를 느낄 수 없는 시기가 길어지고 있는 와중에 사람들은 자신의 온기가 있는 삶을 기록한다. 이들이 부친 편지는 사흘이라는 시간을 거쳐 미술관에 도착한다. 우체부의 전달로 미술관의 한편에는 차곡차곡 각자의 이야기들이 쌓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가서 조용히 작품들의 이야기를 듣다 나오는 화이트 큐브가 아니라 적극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광장으로서 미술관의 모습이다. 휴관 중일 국립현대미술관의 어딘가에 우리가 모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낭만적이지 않은가? 서로라는 존재는 비록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난 뒤, 미술관에서 열람할 때야 느낄 수 있겠지만. 처음 이 기획을 들었던 날처럼 편지의 첫머리를 시작하는 순간 새삼스레 생각했다. 참여자로서의 관객의 존재가 미술관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 둘 모일 온기 속 한 자리를 차지할 내 편지에 무엇을 써야 할지 내내 고민했다. 지나온 한 해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과거의 일기를 뒤적거리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정말 편지처럼 읽어주는 이를 위한 글을 쓰자고.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말을 걸고 과거에 살고 있을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내는 방식으로 나를 읽어주는 이와 이야기하는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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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밝은 조명 아래 가만히 서서 편지들을 뒤척거리고 있을 그를 상상하며 편지를 시작했다. 정말로 내 편지가 미술관에서 읽힌다면 '사동 30번지'처럼 그 순간 '삼청로 30'에서도 지나간 과거와 현재, 우리의 언젠가의 시간들이 평행선처럼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각자의 말로 전해지는 한 시대의 생생한 증언이 모일 미술관을 상상해본다. 작은 하루들이 모여 큰 인생이라는 콜라주를 완성하는 것처럼 자잘히 담긴 이야기들이 모여 한 시대를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평범하게 웃고 울었던 기억들이 종이의 무게로 미술관을 조금 더 무겁게 만들어 줄 것이다.

 

200명이 보내는 편지인만큼 200인분의 무게를 항상 이고 있을 미술관을 드나들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작품만의 공간이 아니라 나의 지분도 어느 정도 차지하게 될테니까. 메마른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름에 우리라는 온기가 더해진다.

 

이 편지들은 그때의 우리는 뭐였을까, 에 대답할 수 있는 기록의 귀퉁이를 차지할 것이다. 비대면의 상황에서도 '삼청로 30, 미술관 앞'이라는 공간을 통해 우리가 이 순간 이 곳에 존재했음을 남기며,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모두의 기억으로 말이다.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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