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소리가 말의 의미를 가질 때 -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글 입력 2020.12.31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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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막말을 일삼는 정상호 부장, 오늘도 회사까지 찾아온 이혼 직전의 부인 미정과 심하게 다투고는 홧김에 평소에 무시하던 계약직 이수정과 식사를 함께한다.
 
식사를 하고 거나하게 취해 이수정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상호.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수정의 집에 묶여있다. 상호는 수정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수정은 자꾸 자기 얘기를 상호에게 늘어놓을 뿐. 그리고 온갖 생리현상들이 상호에게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소통이 필요하다. 절박하게.
 
*

 

"지금 내 얘기 듣고 있어?"

 

타인과 대화를 하다보면 이따금씩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말을 하면서 계속해서 상대의 반응을 파악한다. 나의 소리가 말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상대의 소리가 말의 의미를 다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다.  소통은 소리가 말의 의미를 가질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연극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말과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수정은 소심한 성격으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인물이다. 그동안 수정에게 '말'은 남들이 의미 없이 던지는 돌덩이거나, 수정의 입을 꼬매는 날카로운 바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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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상호다. 수정의 상사인 상호는 소통이 필요하지 않은, 소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인물이다. 부인인 미정과도 소통의 부재로 이혼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의 상호는 그래도 되는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수정의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 위치는 역전된다.

 

늘 일방향적으로 쏟아내기만 하던 상호는 손과 발이 묶인 채 수정과의 소통을 갈구한다.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생리현상처럼 소통에 대한 욕구는 상호를 괴롭힌다.

 

하지만 자기 할 말만 늘어놓기 바쁜 수정에게 상호의 소리는 말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허공에 부유한다. 그러나 상호는 “내 얘길 먼저 들어달라.”는 수정의 부탁에도 소리 치기 바쁘다. 듣는 이 없는 수정의 소리 역시 말의 의미를 잃기는 마찬가지다. 비좁은 방 안에서 둘의 소리는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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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지는 수정의 방백 속에는 그간 수정을 향한 수많은 칼날같은 말들과 묵직한 과거를 담고 있다. 수정은 어릴 적 가정 폭력을 당했고,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다. 어린 수정은 연극 무대를 꾸미듯 자신의 트라우마를 세상 밖으로 꺼내지만, 그를 향한 폭언과 조롱은 아이의 입을 영영 닫게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수정의 독백이 처음 대화가 된 건 다리 위에서 인기를 만났을 때다. 인기는 과거 수정의 곁에 있던 많은 사람들과 달리 수정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허공에 흩어지기만 하던 수정의 소리는 인기로 인해 처음 말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인기는 자신이 수정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살했지만 그 많은 말들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수정에게는 큰 힘이 됐으리라. 그래서일까? 수정은 인기가 죽은 뒤에도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죽은 인기에게까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수정의 모습은 조금 오싹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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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있어서 좋아.

아무말 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지만 '죽은 사람과의 소통'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살아 있는 상호와 죽어 있는 인기 중에서 수정의 말이 의미를 갖게 되는 건 누구일까?

 

수정은 인기에게, 상호는 수정에게 반응을 기대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돌아오는 '말'은 없다. 결국 그곳에선 어떤 소리도 말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귀 기울여 듣는 이가 없는 대화는 죽은 사람과의 소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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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와 감금이라는 키워드 속에서 재치 있는 상황과 대사로 웃음을 유발하는 연극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수정과 인기, 상호 세 인물의 관계 속에서 말과 소통의 의미를 되짚는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내뱉는 건 소리일까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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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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