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양이 이별법 - 고양이 여행 리포트 [영화]

글 입력 2020.12.2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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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양이 여행 리포트

The Travelling Cat Chronicles, 2019

 

감독 : 미키 코이치로

배우 : 후쿠시 소우타, 타카하타 미츠키, 다케우치 유코

 

준비된 집사 ‘사토루’와 도도한 고양이 ‘나나’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더 이상 나나를 키울 수 없게 되자, 사토루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나나를 맡기기로 결심한다. 나나의 새로운 집사를 찾기 위해 시작된 둘만의 특별한 이별 여행. 그 길 위에서 사토루는 잊고 있던 추억들을 하나 둘 마주한다.

 

***

 

그날을 떠올린다.

 

우리가 헤어지던 그때. 4주년을 기념하며 나는 정성껏 고른 선물과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쓴 편지를 준비했고, 너는 내게 헤어지자는 말을 준비했던 그날. 말 그대로 무방비였던 나의 마음에 네가 폭탄을 던지던 그날. 갑작스러운 너의 이별 선고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던 그날. 처음으로 네가 밉던 날, 울던 날, 나의 어두운 밤이 시작되었던 그날.

 

벌써 1년이 지나버린 요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너는 내게 왜 그랬을까.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던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내 잘못을 돌이킬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잘 만나고 있었을까.

 

하지만 말야.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만약에 그런 이유가 없는 거라면, 그냥 네가 나와 갑자기 헤어지고 싶어진 거라면 나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런 게 이별이고, 연애라면 나는 앞으로도 이 교통사고 같은 순간을 계속 맞이해야 하는 걸까.

 

또다시 다가올 그 이별의 순간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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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애의 온도>에서 헤어진 ‘영’과 ‘동희’는 뜨겁게 사랑했던 순간은 까맣게 잊어버린채 열렬하게 싸운다. 서로의 물건을 부숴 착불로 보내는가 하면, 남의 SNS를 염탐하기도 한다. 두 사람의 직장은 그들만의 작은 전쟁터가 되어 난장판이 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이별 후에 쿨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그들이 헤어진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에 두 사람은 자신들의 지난 사랑을 돌아볼 틈도 없이 서로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는 데에만 바빴다. 사랑도 바둑처럼 복기가 필요하다. 어떤 결말을 맞든 차근차근 수를 되짚어 나가며 이별의 이유를 깨닫고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얄궂게도 모든 종류의 이별이 이유를 가지고 찾아오진 않는다. 어떤 이별은 마치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튀어나와 우리 삶에 틈입한다. 그런 이별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마치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저 시간이 흘러버렸기 때문에 찾아오는 갑작스런 이별. 그런 이별 앞에서 이유를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그렇게 이별이 가져다준 알싸한 충격 속에서 깊은 밤으로 우리가 물들어 갈 때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나나’는 우리에게 ‘고양이 이별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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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양이 여행 리포트>는 고양이 ‘나나’와 그녀의 집사 ‘사토루’의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로드무비다. 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는 자주 봤어도,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는 또 처음이다. 말 안 듣기로 유명한 이 도도한 생명체를 어떻게 구슬려 이렇게 멋진 영화를 찍었나 싶다가도 ‘나나’ 역할을 맡은 고양이의 귀여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 집에 있는 고양이님이 생각난다. 그의 이름은 ‘보리’다. 이름만 들으면 암컷 같지만 사실 수컷이다. 하루 대부분을 잠으로 보낸다. 유일하게 활동하는 시간은 가족 모두가 잠든 새벽녘. 그때를 제외하면 늘 침대 위에 있다. 게으르다. 동시에 도도하다. 같이 자자고 침대에 안고 누우면 어느샌가 빠져나가고 없다. 자기 이름을 불러도 관심이 없다. 유일하게 ‘까까’라는 말에만 반응한다.

 

하지만 그런 녀석이 가끔 신통할 때가 있다. 가족들 사이에 냉기가 흐를 때면 아무도 모르게 침대에서 기어 나와 야옹거리며 우리 사이를 돌아다니곤 한다. 그러고 보니 이런 기사를 본 적 있었다. 외국의 어떤 고양이가 주인 몸의 특정 부위를 자주 핥곤 했는데, 알고 보니 거기에 암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토루의 첫 번째 고양이였던 하치도 그랬다. 가족들과 다툰 후 토라진 어머니를 맨 처음 위로한 것도, 아픈 사토루의 곁을 밤새 지킨 것도 하치의 몫이었다.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고 분위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눈치는 아무래도 고양이들만의 타고난 능력인가보다. 어쩌면 대대손손 전해 내려온 생존 노하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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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러한 고양이들의 삶은 우리의 주인공인 사토루의 삶과는 철저히 대비된다. 사토루의 이별은 늘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의 부모님은 운전 중에 갑자기 튀어나온 자전거를 피하려다 사고로 돌아가셨다. 하치도 사고로 갑작스레 죽었다. 따라서 그의 인사는 늘 뒤처져야만 했다.

 

어린 사토루는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친구가 뒤늦게 전해 준 요지야의 기름종이를 받고서야 눈물을 흘린다. 하치와의 마지막 인사도 녀석의 무덤 앞에서 뒤늦게 이뤄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나와 사토루의 이번 여행은 특별하다. 이건 그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준비하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이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쯤에서 스포일러를 하자면 영화 속에서 사토루는 아프다. 사토루가 나나의 새로운 집사를 찾아 헤맸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가 더 이상 나나의 곁에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다시 찾아온 이별 문턱 앞에서 아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던 사토루는 먼저 헤어지는 걸 택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자꾸만 따라오는 나나를 케이지에 가두고 애써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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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우리에게 태어나기 전 10달의 준비할 시간을 주었지만, 죽음을 준비할 시간은 따로 주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삶이란 결국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별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오랜 교리도 말해준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우린 모두 이별 앞에서 시한부 환자다. 나와 보리도, 나와 부모님도, 나와 친구들도. 하지만 슬프게도 대부분의 이별은 사토루의 부모님이 그랬듯이, 하치가 그랬듯이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별에 무기력했다. 그 무기력함을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 노래했다. “지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그렇게 우리 모두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그러나 나나는 다르다. 고양이의 이별은 다르다. 그녀는 스스로 길고양이의 삶으로 돌아가면서까지 사토루를 만나러 간다. 바로 여기서 바로 여기서 사토루와 나나의 태도가 갈린다. 사토루는 끝을 바라볼 용기가 없는 쪽이었다. 그에 반해 나나는 어차피 다가올 이별이라면 차라리 그 길을 굳건히 나아가기를 택한다. 주저하는 사토루를 향해 나나는 소리 없이 외친다. ‘나는 마지막까지 너만의 고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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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를 보면 주인공 재열은 연애 문제로 고민하는 수광을 위해 이렇게 충고한다. ‘더 사랑해서 약자가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약자가 되는 거야. 내가 준 걸 받으려고 하는 조바심. 나는 사랑했으므로 행복하다, 괜찮다, 그게 여유지.’ 말하자면 나나는 재열 쪽의 유형이었다. 그녀는 이별을 진작부터 예감하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 최선을 다해 이별을 준비한다. 어쩌면 여행을 시작하던 그때부터. 혹은 훨씬 그 이전부터.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고양이로소이다. 나나는 우리에게 말한다. 지금 당장 네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이별이라면 그녀는 최선을 다해 이별하기를 택했다. 마치 사랑을 하듯 열렬하게 이별하기를 택했다. 그 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중요한 건 우리가 헤어진다는 게 아니라, 내가 너의 고양이었다는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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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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