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평: 침묵에서 말하기로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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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남이 해준 말 중 가장 인상이 남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몇 년 전 아는 오빠가 무심히 '뭘 하든 너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라고 했던 말을 떠올릴 것이다.
그때 나는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사람 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그렇지. 맞아. 나는 왜 나 자신이 뒷전이었을까?'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바보 같다 생각했었다.
우리는 한 명의 개인으로 태어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어린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가치관을 형성시켜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설명하는 여러 심리학 이론들이 있다.
책 <침묵에서 말하기로>는 바로 그 심리학 이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심리학 하면 떠오르는 대표 인물들이 있다.
전공자가 아니라도 누구든 한 번쯤은 들어봤을 프로이트, 피아제 등. 심리학을 배우고 싶다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인물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이 심리학에 미친 영향력은 분명 상당하다. 책 <침묵에서 말하기로>는 이 같은 고전 심리학자들의 이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저자는 그들의 이론이 남성 중심적인 관점으로 전개되었다는 문제의식을 던지며 그로 인해 여성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저하된 평가를 받아왔는가를 조명한다. 여성인 나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어젠다가 아닐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며 인상적인 문구들이 정말 많았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여성이 권리와 불간섭의 도덕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의 도덕은 맥락에 따라 상대적인 판단을 허용하기 때문에 남성의 관점에서는 혼란스럽고 산만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pp.98).
- 제이크에게 발달은 타인을 자신과 동일하게 보게 되는 과정이며, 평등으로 관계망이 안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루어진다. 에이미에게 발달은 확장하는 관계망에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것이며, 독립이 반드시 고립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이루어진다 (pp.130).
지금껏 나에게 성숙한 성인의 이미지는 독립적이며 주체적이고 논리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합리적인 선택에 기초하여 자신의 몫을 스스로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하면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기분이랄까? 그럴 때면 나는 내 스스로를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찜찜함을 애써 떨쳐버리려고 했다. 내가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어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따라서 여성이 권리와 불간섭의 도덕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회의 기준, 자본의 섭리를 따져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나도 모르게 결정을 유보하려고 했던 마음들이 단지 내가 이상적이어서 발생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 사소한 어떤 것이라도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그 결정과 관련된 사람들을 떠올리곤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책에 따르면 그 이유는 내가 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발달 초기 단계부터 관계와 돌봄의 중요성을 인지한다. 에이미에게 발달은 확장하는 관계망에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것이며, 독립이 반드시 고립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이루어진다.라는 문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여성에서 발달은 타인의 존재를 인식해가는 과정이 아닌, 타인 속 자기 자신을 인식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학습의 대상으로 여겨왔다. 남성 중심의 관점으로 발달을 이해하게 되면, 타인은 성장 과정에서 확장되어 가는 세계관 속에 등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배우지 않아도 타인과의 관계를 내재적으로 타고날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해왔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동안 나 자신을 괴롭혀왔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여성성과 남성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의 행태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되돌아보면, 몇 년 전 아는 오빠를 통해 들었던 말, '너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 했던 그 말을 기점으로 나의 발달 단계는 한 단계 상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발달 중인 것이고 그 발달 과정은 여성의 그것과 부합하여 이제야 서서히 타인과의 관계 속 나 자신을 인식하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본 사회에서 나를 보호하는 힘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현실과 본성 사이에서 투쟁하며 내가 이 사회의 한 주체로서 설 수 있으면서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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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성장 중인가보다. 그래서 좀처럼 분명하지 않은가보다. 내제된 가치와 학습한 가치의 접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길고 어려운 투쟁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나는 언제쯤 이 긴 성장의 여정을 마치고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을까? 다 끝난 줄 알았던 발달이 아직도 진행 중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어쩐지 조금 위로가 되었다. 성장 중인 사람이 성장통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김규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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