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책을 버리며

연말의 기분
글 입력 2020.12.2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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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맞이하여 책장 정리를 했다. 옷장이나 책상에 비해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이어서일까 오랫동안 방치해 둔 책장에는 책이 뒤죽박죽 쌓여 있었다. 내놓지는 않고 사 오기만 하니 이대로는 책장이 아니라 창고가 될 것 같아서 큰 마음을 먹었다.

 

의외로 정리는 쉬웠다. 버릴 책과 가지고 있을 책을 정하는 데 고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책을 샀나 싶을 정도였다. 버리려고 잔뜩 쌓아둔 책들은 요즘 나오는 책들과 달리 판형이 크고 두꺼웠다. 그걸 보니 지나간 시간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정리할 때면 종종 과거의 나에게 낯을 가리게 된다. 틀림없이 그때의 내가 시간을 통과해 지금의 내가 되었을 텐데, 그 사이에 아무도 없고 우리가 완전히 분리된 두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계기로, 어쩌다 네가 내가 되었을까 짐작만 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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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회사에 들어갔으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만났으면 지금 뭐가 좀 다르지 않았을까. 직장 선배 A가 그런 말을 했더랬다. A가 퇴사의 뜻을 밝히고 얼마 되지 않아 둘이서 저녁을 먹을 때였다. 평소에는 본인의 사적인 얘기를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닌데 이상하게 그날은 내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10년도 더 지났을 얘기까지 꺼내며 이어지던 넋두리의 목적을 파악하지 못해 나는 밥을 먹을 때는 물론이고 그날 저녁 내내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는 A는 과거를 곱씹으며 후회하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늘 길게 뻗은 직선 같은 사람이었다. 이제 막 새로운 장으로 발을 내디딘 나에게 그는 하나의 기준선이었다. 지금의 나를 막막하기만 한 미래와 이어줄 것만 같은 좁고 긴 길이었다.

 

그래서 인정받고 싶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고. 아니, 최소한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매번 그 곧은 선 앞에서 걸려 넘어지거나 제대로 따라 걷지 못했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의 눈에 차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마음에 돌덩이가 차곡차곡 쌓이는 기분이었다.

 

삶 전체가 멀리뛰기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멀리뛰기는 연속적인 동작이지만 체육 교과서에는 주로 도움닫기, 발구르기, 공중 동작, 착지의 순간들이 실려 있다. 삶 역시 수많은 순간 순간이 이어져 만들어지지만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존재한다. 혹시 그게 바로 지금이라면, 내가 움직여야 하는 때인데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면 어쩌지.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불안감에 나는 자주 휘둘렸다. 특히 A 앞에서 심란한 마음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래서 A의 푸념 아닌 푸념을 들던 그 순간에는 그 말조차 나를 다그치는 위한 것처럼 들렸다. "넌 지금 그렇게 살면 안 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잘해라" 라고.

 

하지만 A와 함께했던 그날의 저녁 식사로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깨달았다. 곧게 뻗은 선이라고 믿었던 것이 굽이굽이 후회가 가득한 샛길이었다는 사실, 그도 선택에 기로에 설 때마다 불안해하는 개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그날의 대화는 별다른 목적 없이 A가 그냥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길을 걷다가 현관문을 열다가 문득 문득 들었다.

 

그 후 A는 예정대로 퇴사를 했고, 시간이 더 흘렀다. 나는 A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인정받고 싶다는 바람과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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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어떤 책들은 버리게 된다. 이번에 청소를 하면서 버린 책들은 다양했다. 왠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았던 두꺼운 국어사전, 한때 잘나가는 멘토였던 사람이 쓴 자기계발서, 존경하던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때 교재로 샀던 책, 손글씨 연습을 위한 책...

 

종이로 된 국어사전을 보기에는 편리한 인터넷이 상시 대기중이고, 자기계발서를 쓴 한 시대의 멘토는 오늘날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몇 학기를 지나며 교수님의 독선적인 면을 알게 되었고, 지금 나는 손글씨에 관심이 없다. 내 세상의 지배자였던 우상, 목표, 기준도 지나고 보니 또 다른 여러 개의 작은 세계였을 뿐이다. 그 나름대로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이렇게 쉽게 버릴 책들을 책장의 가장 좋은 자리에 꽂아놓느라고 정작 올해 새로 산 책들은 여기 저기 아무렇게나 방치해두었다니. 고민 없이 책을 버리며 조금 허탈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책들도 과거의 언젠가에는 다른 책들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때는 그들이 그 공간을 차지해야 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정리를 할 때마다 나는 진지했다.

 

아마 올해 새롭게 산 책들도 언젠가 버려야 할, 버려도 괜찮을 날이 올 것이다.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나는 또 낯선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네가 어쩌다 내가 되었을까. 그렇지만 낯설어할지언정 후회하거나 미워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지금 내게 소중한 것들을 책장에 보관할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새로운 책을 책장에 꽂으면 된다.

 

더불어, 주제 넘은 말이지만 A 역시 무엇이 되었든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더이상 그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 전전긍긍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나는 일과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멋있다고 생각하니까. 의심에 차서 옮겼던 당신의 발걸음들이 내게는 모두 새로운 길이었다고, 그 말을 그날 저녁에 해주고 싶었다.

 

 



[김선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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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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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의 나에게 낯을 가린다는 말이 정말 공감되었어요. 사실 긴 인생에서 아직 큰 과거랄 게 없는 저에게도 과거는 왠지 부끄럽고 정제되지 않은 느낌의 단어예요. 당시에는 그게 제 일상을 지배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고, 정말 사소한 일이었을 수 있겠지만 사실 지나고 보면 그렇지 않잖아요. 내가 왜 그랬지 싶고 조그마한 게 괜히 크게 다가오고? 그래서 별거 아닌 과거에도 부끄러워하고, 그걸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에디터님의 글을 읽고 과거 까짓 거 먼지 쌓인 책 정리하듯 쿨하게 정리해버리면 되는 거구나 싶었네요. 지금에서야 과거의 책들을 들춰보고 싶지 않더라도 결국 그 책들을 읽고 현재의 제가 만들어진 거니까요!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마음을 달리 먹을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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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매나무
    • 댓글을 읽고 보니 , 글은 저렇게 썼지만 쿨하게 정리하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걸리는 시간이 있는 것 같아요. 읽지도 않으면서 저걸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지지부진한 시간들이요. 그러다 어느 순간 확신이 되는 때가 오는 것 같습니다. 정리하고 싶으신 것들 잘 정리하시기를 바라요.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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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인규
    •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내 시간이 담겨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 책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내 마음과 비슷하기도 했고 그 책과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책을 정리하면서 지나가버린 한 시절을 떠올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저도 생각해요. 한 때 꼭 읽고싶었고 사랑했던 책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예전같지 않은 순간도 있는거겠죠. 한 해를 마무리하며 그리고 새로운 한 해를 마주하며 새로운 책들이 제 책상에도 올라오길 기대해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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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매나무
    • 김인규맞아요. 그래서 뭐든 주기적인 정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보관하고, 기억할 수 있는 용량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버려도 될 것들은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2021년을 맞고 싶어요. 김인규님의 책상도 새로운 책들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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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REAL
    • 1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닐까란 생각을 저도 종종하곤 합장니다. 우리는 어쩌면 책장에 새책을 끼워넣고 낡은 것은 치우면서.. 매번 책장을 단장하며 사는게 아닐까요? 선재님의 책장이 낯설기까지 느껴진다는건, 그만큼 지나온 시간의 틈에 많은 결이 쌓이고 또 성장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네요. 1년 후에는 또 완전히 바뀌어있을 선재님의  책장이 기대가 되고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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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매나무
    • UREAL요즘 여러 가지로 의기소침한 상태인데 이 댓글을 읽고 조금 힘이 났어요. 1년 동안 뭐라도 쌓인 게 있었겠죠..? UREAL님도 좋은 것들을 많이 쌓아가는 한 해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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