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첫눈과 시 [문학]

겨울에 관한 시 네 편
글 입력 2020.12.1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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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렸다.

 

그동안 아무리 추워도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비였다. 못다 한 말이 있어 가을을 붙잡고 싶은 듯 비는 계속됐다. 부끄럼이 심한 눈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12월로 접어들었다. 오늘 드디어 질척한 비 대신 포송한 눈이 내렸다. 외출하며 시집을 한 권 챙겼다. 소설보다는 시가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물이 응축되어 내리는 눈처럼 말과 단어가 응축된 시를 읽으며 겨울을 맞이한다. 눈송이를 살피듯이 단어를 곱씹으며.

 

 

눈송이.jpg

 

 

 

겨울의 전조


 

겨울의 문턱, 입동을 넘은 지 한참이다. 완연했던 가을빛은 수그러들고 희미하고 옅은 빛이 세상에 내려앉았다. 앙상해진 가지는 흰옷을 입을 준비를 마쳤다. 해는 짧고 밤은 길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새벽이 솟아난다.

 

 

사라지며 더욱 아름답게

 

사라지며 더욱 아름답게 – 낮이

어둠에 담기듯 –

태양의 얼굴은 반쯤

멈칫멈칫 – 떠나지 않으며 – 소멸하며 –

다시 빛을 모으네, 죽어 가는 친구처럼 –

찬란한 변신에 괴로운 채 – 오직 더욱 어두워지게 하면서

소멸하는 – 뚜렷한 – 얼굴로 –

 

에밀리 디킨슨,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겨울의 아침은 어둠에 담겨있다. 태양은 한발 늦게 떠오른다. 어둠 속에서 희디흰 소식을 기다린다. 하늘로 뻗은 가지는 '죽어가는 친구'처럼 잎사귀를 내어주고 빛을 모은다. 그렇게 모은 빛은 더욱 아름다운 눈송이로 피어난다.

 

 

 

눈 쌓인 풍경


 

창문을 열자 온통 흰 세상이 쏟아진다.

 


구획


밤새 눈이 많이 쌓였다 나는 어제 본 풍경을 걷는다 끝없이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발자국이 지나간다

 

사람의 발자국과 개의 발자국이 늘어선 모양,

어제 누가 이곳을 걸었고 나는 그것을 따라 걷고 있다

 

발자국에 발자국을 겹치면서

발자국이 발자국을 지우면서

 

밤새 쌓인 눈이 조금씩 녹고 있다 한 바퀴 돌고 나니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늘어선 나무들과

끝없이 늘어선 나무들의 그림자가 서로 부딪치는 아침이다

 

흰 눈 위의 희박한 자국들

 

나는 어제 본 풍경으로 들어간다

 

손에는 빈 목줄을 쥐고

 

나는 서서히 늙고 있다 흰 머리에 검은 머리가 섞이고 있다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밤새 내린 눈이 차창에 붙어있다. 바닥까지 가닿은 눈은 순식간에 물로 변한다. 하나둘 웅덩이가 생겨난다. 이내 찬 바람이 괴롭혀 얼어붙는다. 발자국은 차례도 기다리지 못한 채 다음을 기약한다. 첫눈의 위력은 아직 미미하다.

 

황인찬의 시 '구획'으로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을 상상한다. 검은 머리에 흰 머리가 섞이는 것이아닌, '흰 머리에 검은 머리가 섞이고 있다' . 나에게 눈송이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얀 눈밭 위에 내가 서 있다. 영화 <러브레터>에 나온 눈밭을 떠올리며 이미 녹아버린 눈을 대신한다.

 

'흰 눈 위의 희박한 자국들'이라는 표현을 입속에서 여러 번 굴리며 시인이 펼쳐낸 겨울을 기다린다.

 


 

시인의 겨울


 

손에 쥔 시집의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시인들의 겨울은 어떨지 말이다. 앞에서도 시인이 표현한 겨울을 읽었지만 조금 부족했다. 시인의 시선으로 본 겨울이 아니라, 3인칭 시점으로 겨울과 시인을 함께 관찰하고 싶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겨울을 나는지 알고 싶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정본>

 

 

백석의 겨울은 쓸쓸하다. 그러나 낭만적이다. 혼자 소주를 마시면서도 나타샤와 함께 떠나는 상상을 한다. 바깥의 날씨는 살을 도려낼 듯 거칠고 위협적이지만, 안채는 온돌과 취기로 달아 올랐을 것이다. 그는 추위 따윈 잊고 나타샤와 자신만의 세상에서 산다.

 

백석은 아마 그해 겨울의 추위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의 온기만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오래

이 안을 걸어 다녀야

이 흰빛의 마라톤을 무심히 지켜보아야

 

나는 없어지고

시인은 탄생하는가

 

허수경, <누구도 가지 않는 역에서>

 

 

사근사근 쌓이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이 떠오른다. 허수경 시인은 시인의 자세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흰빛의 마라톤을 무심히 지켜'본다. 그는 온전히 풍경에 빠져들어 '나'가 없어지는 순간, 그리고 시인이 탄생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허수경 시인은 푹푹 나리는 눈을 보며 결국 시 한 편을 완성했다.

 

*

 

시인의 겨울은 나의 것보다 낭만적이다. 역시 시집을 펼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의 풍경화를 읽으며 첫눈을 맞이한다. 내가 바라본 겨울 풍경과 시인이 바라본 겨울 풍경, 그리고 시를 읽으며 상상한 겨울 풍경이 겹쳐진다. 순간 현실에 환상이 스민다. 이윽고 내가 실제로 본 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번 겨울이 더욱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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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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