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늘도 운명을 바꿨을 일상 속 수많은 선택들에 대하여 : 롤라 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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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내용에 영화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바꾸는 건 어쩌면 대단한 결정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순간순간의 작은 선택들은 삶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가. 그 수많은 선택의 결과를 알 수 없는 우리는 사실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선택‘에 대한 감각적인 고찰을 보여주는 영화 <롤라 런>을 소개하고자 한다.
롤라의 남자친구 마니는 암거래 조직의 보스를 위해 일한다. 어느 날, 그는 보스에게 전달해야 할 10만 마르크의 돈을 지하철에 두고 내리고, 돈은 그곳을 지나던 부랑자의 손에 들어간다. 보스와의 약속이 20분 남은 시각, 마니는 롤라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구하지 못하면 자신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롤라는 마니를 위해 20분 안에 10만 마르크를 구하러 베를린 시내를 뛰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는 마치 비디오 게임처럼 등장인물이 죽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롤라와 마니가 돈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죽게 되면, 시간은 다시 돌아가 롤라가 전화를 끊고 뛰기 시작하던 순간에 도착한다. 그렇게 주어진 세 번의 기회 동안 롤라는 매번 조금씩 다른 상황과 다른 선택에 맞닥뜨리게 된다.
동일한 조건을 둘러싼 수많은 상황과 선택들이 어떻게 결과를 변화시키는지 관찰하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영화가 말하는 선택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이 영화의 메시지가 어디에 방점을 찍고 있느냐였다. 영화가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선택이 인생을 바꿀 만큼 이렇게 중요하니, 신중하게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영화의 교훈일까? 아니면 선택의 결과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의 고민은 무의미하다는 메시지를 말하려는 것일까.
롤라는 언제나 가장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남자친구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당연할 것이다. 은행장인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녀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너무나도 많다. 결말을 바꾸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선택뿐만 아니라 그 수많은 변수들이 중첩된 결과이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총기 사고, 카지노의 결과, 우연히 마주친 사람 등이 그들의 운명을 바꾼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선택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으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 <롤라 런>은 상징적이다. 주어진 세 번의 기회에서, 그녀의 선택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롤라는 뛰었다‘이다. 그녀의 선택은 드라마틱 하게 바뀌지 않았다. 결과를 바꾼 건, 그녀가 결정한 ‘뛴다‘라는 선택지를 둘러싼 수많은 맥락들, 같은 상황을 이루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이 미치는 미미한 영향들, 그녀가 통제할 수 없었던 누군가의 결정 같은 것이었다.
몰입과 메시지에 힘을 더하는 연출
영화는 독특하지만 단순한 플롯뿐 아니라 연출에도 눈이 간다.
20분간의 똑같은 고군분투가 반복되는 형식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연출이다. 빠르고 불안정하게 흘러가는 음악과 시종일관 뛰기만 하는 주인공을 잡아내는 다양한 화면이 박진감을 더한다. 긴급하고 중요한 결정 앞에서 느끼는 혼란스러움과 극도의 불안감을 연출을 통해 전달한다.
매번 미묘하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선택의 결과를 보여주는 방식 또한 독특하다. 특징적인 것은 롤라가 지나치는 사람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화면이다. 롤라는 집 앞을 지나는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 자전거를 팔려고 하는 남자,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마이어씨처럼 항상 똑같은 사람들과 부딪히지만 매번 다른 상황과 반응이 나타난다. 그들의 이후의 삶을 멈춘 화면에 사진들로 보여준다. 매번 각자가 맞게 되는 삶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는 주변 인물들의 삶을 통해 선택의 나비효과를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롤라가 마니를 구하기 위해 뛰었던 순간은 그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선택의 결말들을 가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사건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예상할 수 없는 파급효과를 가지는지를 표현한다.
결말에 대해서
영화는 이러한 문장들로 시작한다. "우리의 탐구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그 끝은 처음으로 돌아가 그 시작을 알려줄 것이다.", "한 경기의 끝남은 다른 경기의 시작이다."
인생은 여러 사건들이 이어져 끊기지 않는 긴 필름처럼 흘러간다. 모든 사건이 소진되기 전까지, 완결된 경기는 없다. 하나의 사건의 종결은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우리는 새로운 경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선택들을 하며 끝을 향해 달려가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쩌면 다소 싱거워 보일지 모를 이 영화의 결말도 해석해볼 수 있다. 롤라는 마니를 구하기 위해 카지노에서 딴 돈뭉치를 들고 나타난다. 마니는 스스로 곤경에서 빠져나와 롤라를 만난다. 그들의 목숨까지 쥐고 흔들던 사건은 이제 끝났다. 롤라의 손에 든 봉투가 무엇인지 묻는 마니의 질문을 뒤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롤라의 얼굴을 비추며 영화는 끝이 난다.
우리는 이들이 어떻게 마저 살았는지 모른다. 영화에서 운명의 끝을 보여주지 않은 거의 유일한 등장인물들 일 것이다. 카지노로 딴 돈을 가지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을 지도 모르고, 오히려 돈으로 인해 곤경에 처해 완전히 몰락하거나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고 살 수도 있다. 이 열린 결말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경기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인생은 애석하게도 롤라가 그랬듯이 세 번이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결말을 알 수 없는 선택을 내리는 입장에서, 몇 번의 기회라는 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결론들을 시시각각 우리 앞으로 끌어오고 있다. 무엇이 더 나은 결론인지 알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해서 뛰는 것뿐이다. 더 나은 결론을 기대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박경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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