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초상화에 얽힌 두 여인의 강렬하고 애틋한 사랑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여성들의 사랑과 우정, 연대로 풀어낸 퀴어 영화
글 입력 2020.12.0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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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되어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만큼 관찰력과 집중력이 필요한 일은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한 인물이 지닌 고유한 인상을 화폭에 온전하게 담아내기란 매우 힘든 일일 테다. 그래서 초상화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작은 특징 하나까지 섬세하게 관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나오는 두 여성은 초상화를 연유로 하여 만나게 되는 사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라는 귀족 집안의 여성을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의 집에서 잠시 머문다. 엘로이즈는 자신의 초상화가 완성되는 대로 밀라노에 가서 정략결혼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으나 그녀는 결혼 생각이 없다. 당연히 초상화의 대상이 되는 것 역시 거부하고 그 덕에 그녀의 집에 찾아온 그간의 화가들은 모두 초상화를 완성하는 데 실패한다.

  

마리안느 역시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러 온 또 다른 화가다.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을 숨긴다. 둘은 매일 산책을 같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마리안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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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엘로이즈는 자신을 그린 그림을 천천히 들여다보더니 말한다. 아무런 생명력도 존재감이 없는 죽은 그림에 그려진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 뒤에 붙는 “당신(마리안느)을 닮지 않아서 더 슬프군요”라는 대사. 마치 마리안느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에 엘로이즈의 깊은 감정이 묻어난다. 예상치 못한 답을 들어 화가 남에도 그림을 다시 그리겠다고 말하는 마리안느 또한 그녀와 같은 마음이다.


 

 

타오르는 불꽃, 타오르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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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처럼,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함께하는 장면의 주변에는 늘 불이 타오르고 있다.


마리안느는 어두운 방에서 이전 화가가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기고 간 엘로이즈의 초상화에 양초를 가져다 보는데 이때 불이 그림에 잘못 옮겨붙는다. 불꽃은 엘로이즈의 가슴에서 타오른다. 마리안느는 타오르는 초상을 보면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엘로이즈가 그녀가 처음 규칙과 관습에 따라 그린 초상화처럼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과 같은 강렬한 존재라는 사실을.


또한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가 축제에 간 날, 그곳에 모여있는 여성들은 모닥불 주위에서 박수를 치며 주술적인 노래를 합창한다. 갑자기 근처에 있던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불꽃이 붙고, 엘로이즈는 이내 바닥에 쓰러진다. 옷에 불이 붙은 엘로이즈의 모습은 이전의 타오르는 초상화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고조된다.


불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관계 자체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불은 활활 타오르지만, 연소를 위한 요소가 충족되지 않으면 금세 사그라질 수도 있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도 그렇다. 두 인물은 짧은 기간 급속도로 서로에게 매료되었으나 초상화가 완성된 후에는 헤어짐만이 이들을 기다린다.

 

 


여성들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연대


 

퀴어영화인 이 영화에는 오직 여성들만 등장한다. 엘로이즈, 마리안느, 그리고 엘로이즈 집의 하인인 소피. 계급 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세 여성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수평적으로 대한다. 격의 없이 카드게임을 할 때조차 존댓말 쓰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평등한 관계는 사랑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려야 하는 상황에서,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끊임없는 관찰의 대상이다. 그녀는 마리안느가 원하는 포즈를 취하고 시선을 한곳에 고정한 채 가만히 있어야 한다. 즉, 둘의 관계에서 주도권은 마리안느가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그녀를 관찰하는 동안 엘로이즈 역시 꼼짝없이 그림을 그리는 마리안느를 본다. 두 여성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대하고 알아가며 사랑한다.


또 이들은 각자가 겪는 여성으로서의 문제들 역시 함께 나누고 돕는다. 소피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뒤 낙태를 위해 달리기를 하고, 공중에 매달리고, 약초를 달여 마시는 등 민간요법을 동원한다.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을 떠나 낙태는 여성이 자신의 몸에 내리는 하나의 중대한 결정이다. 결정하기로 마음먹는 것도, 그 결정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다. 같은 여자이기에 이를 아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소피가 겪는 일련의 과정들에 기꺼이 동참한다.

 

마리안느는 본인은 여성 화가이기 때문에 남성의 누드화는 그릴 수 없으며, 숨어서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당시, 여성 화가들의 활동이 제한적이었음을 그녀의 대사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여성들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의 주제는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외설적이거나 노골적이라고 여겨지는 소재들을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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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피가 낙태 시술을 받는 장면에서, 마리안느는 처음에는 이를 외면했으나 다음 번에는 옆에서 그 모습을 그린다. 여성성 혹은 여성의 몸을 동등한 시선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여성이라는 사실은 보여주는 이 장면은 기존 미술계에 존재했던 남성 중심적인 질서를 전복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랑 대신 추억으로 남은 두 여인의 사랑


  

 

“오, 모든 망자의 집이자 저승을 주관하는 자들이시여 제 아내를 찾고 있습니다. 그녀는 독사에게 물려 젊음을 도둑맞았습니다. 간청하오니 너무 일찍 끊긴 운명의 실을 고쳐주소서."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뒤에 오는지 보았다. 아내는 팔을 뻗어 남편을 안으려 했지만 그 안타까운 손은 허공만 잡을 뿐. 다시 죽은 그녀는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사랑이 무슨 죄겠는가.

 

 

그리스 신화에는 죽은 아내를 찾아나선 시인이 있다. 바로 오르페우스. 리라를 감미롭게 연주하는 오르페우스는 독사에 물려 죽은 아내를 다시 찾아오기 위해 지하세계로 들어간다. 오르페우스의 노랫소리에 감명받은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는 아내를 데려가도 좋다고 허락한다. 그런데 전제조건이 있었다. 지하세계의 문턱을 통과할 때까지는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뒤로 하고 지하세계를 빠져나가는 길을 걷는다. 그러나 저승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아내가 따라오고 있는지 궁금한 나머지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고, 결국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내려가야 했다.


세 여성이 모여서 오르페우스 신화를 읽는 장면에서 소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르페우스가 참아야 했다고 말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돌아본 것은 아내와의 사랑이 아니라 추억을 택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엘로이즈 역시 말한다. 어쩌면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먼저 뒤돌아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고.


이승으로 가는 길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처음이자 마지막 조우의 순간이 그들에게 작별의 시간이었을 수도 있듯이, 두 여인도 마찬가지로 서로 사랑하면서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 상대방을 보내준다. 엘로이즈는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이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마리안느 역시 그녀의 초상화를 완성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시간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이야기하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헤어짐은 현실에의 순응이 아니라 선택이다. 사랑이 아닌 추억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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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작별 장면을 그려 전시에 출품한다.

 

 

두 사람은 훗날 밀라노의 공연장에서 다시 재회한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은 비발디의 사계 여름 3악장.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와 나란히 앉아 피아노로 쳤던 곡이다. 여름에 강하게 휘몰아치는 폭풍을 묘사한 곡이라고 한다. 마리안느는 공연장에 앉아있는 엘로이즈를 보지만, 엘로이즈는 그런 그녀를 보지 못한다. 곡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이에 동요하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화면에 나오지는 않지만 이를 지켜보는 마리안느의 모습은 또 어떠했을지.

 

 

“처음 느껴봐요, 후회를.“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요.”

 

 

사랑이 아닌 추억을 택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이제는 함께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른 길을 걷게 되겠지만, 이들은 아마 계속해서 그 기억들을 돌아보며 상대방을 떠올릴 것이다. 참으로 애틋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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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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