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스크 좀 벗고 싶다 [시각예술]

마스크 뒤에서 찾은 자유의 정체
글 입력 2020.12.01 02:5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마스크를 써서 답답한 사람들 천지라지만 난 마스크 뒤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을 생각한다. 마스크 뒤에는 스스로 숨겨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배트맨은 정체를 숨겨야 했고, 오페라의 유령의 에릭은 흉측한 상처를 숨겨야 한다고 여겼다. 마스크맨은…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든 마스크를 써서 더 과감해진 건 분명하다. 요즘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마스크 덕에 많은 위기를 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img.jpg

 

 

한 번은 연극을 보러 갔다가 뒤에 앉은 중년 남성 둘이 뒤척거리며 “음…”, “킁킁”, “컹컹” 소리를 계속 내는 통에 관크(*관객 크리티컬)를 당했다. 하필 연극은 여성의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지 않느냐에 관한 내용이었고 유독 컹컹거리던 중년 남성이 여성 주인공이 완전한 자유를 외치는 독백에서 “서론이 너무 기네.”라고 말하는 걸 듣고 감정이 폭발했다.

 

나, 내 옆, 내 앞 여성 관객들이 일제히 마스크를 쓴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봤고 가장 가까웠던 내가 마스크 뒤에 숨어 그에게 시끄럽다고 소리내 말했다. 자리를 안내하던 어셔에게 반말을 서슴없이 뱉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연극이 끝나고 위협을 당하진 않을까 무서웠지만 돌아본 여성 중 누가 말했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마스크 뒤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기괴한 설정만큼 이를 실현하는 마스크 형상도 기괴한가 보다. 오페라 유령의 가면과 배트맨의 가면은 아름답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를 지키는 마스크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K94 마스크도 아름답다고 부르기 민망하지만 좀 더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자크 블라스의 『얼굴 무기화 세트』가 있다.

 


index.jpg

 


마스크를 벗은 모습이 위협적이지 않았던 시절 가벼운 원피스 차림으로 봤던 국립현대미술관에 불온한 데이터 展에서 관람한 작품이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 벽에 기괴하게 일그러진 마스크와 그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인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기괴한 마스크는 “동성애자의 안면인식 데이터를 수집하여 그 일관성으로 다른 동성애자를 가려낼 수 있다”는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안면인식 기술로 탐지될 수 없도록 고안되었다. 다수의 얼굴 정보를 베이스로 조합해 만든 익명 마스크이기 때문에 기괴한 모양새를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작품의 제목처럼 이 마스크들은 표준화에 맞서는 무기다.


벤 샨은 《예술가의 공부》에서 일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의 경우에는 그저 왜 그렇게 각종 통계나 일반론을 꺼리는지 자문하는 것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얻은 답은 간단합니다. 저는 그런 자료가 개인을 담고 있지 않아서 싫어합니다. 모든 것의 평균이라 함은 어떤 특별함도 없다는 뜻입니다. 가령 ‘평균적인 미국인’을 구상하려 한다면, 모든 미국인의 공통적인 속성을 지녔지만 그 어떤 미국인의 별남과 특이, 독특도 담고 있지 않은 인물상을 만들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사회학자가 통계를 근거로 추출한 고등학생처럼, 이 인물상은 모두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닮지 않았을 거에요.

 

| 벤 샨, 《예술가의 공부》, 유유

 

 

하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이제 우리는 모두 안다. 마스크는 불편하다. 시야를 가린다. 습기가 찬다. 내 입 냄새를 실감하게 한다. 무엇보다 데이터가 수집되지 않는 대신 내 얼굴도 드러나지 않는다. 안면 인식기는 사실 마스크를 쓰든 안 쓰든 개인을 분류할 수 있다. 최소한 '인식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 우리를 분류할 것이고, 모두 인식되는 중에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도 무언가를 의미한다. 이 마스크 뒤에서 찾는 자유는 내가 선택한 자유인가? 기괴한 마스크를 쓰고 안면 인식기 앞에 섰을 때 이것은 무기이고, 이것을 소유했으니 권력이 있다고 정말 말할 수 있는가?


또 내가 그 중년 남성에게 시끄럽다고 말할 때, 나는 여성 일반에 속했기 때문에 안정감을 느끼지 않았나? 나와 함께 돌아본 젊은 여성의 얼굴들과 내 얼굴이 - 마스크 덕분에 더욱 - 비슷할 것이기 때문에 더 당당하지 않았나? 페미니즘을 외치는 작품의 관객 일반으로 속했기 때문에 더 강하게 말할 수 있지 않았나?

 

벤 샨은 일반적인 예술과 보편적인 예술은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보편적인 것이란 말하자면 만물의 고유성을 긍정하는 독특한 것입니다. 보편적인 경험은 곧 사사롭고 개인적인 세계를 비추는 사적인 경험입니다. 그 세계 안에서 우리 각자는 자기 삶의 주된 부분을 살아가죠. 그러므로 예술에서 광대한 보편성을 지니는 상징은 아마도 의식의 가장 외지고 내밀한 구석에서 끌어낸 어떤 형상일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고유하고 주체적이며 가장 완전히 깨어 있기 때문이에요. (…) 두 그림이 불러내는 경험은 어떤 평균적인 것이 아니라 극한의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며, 두 그림은 모두 위대한 보편성을 담고 있습니다.

 

| 벤 샨, 《예술가의 공부》, 유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도 마스크 뒤에서 내가 느낀 감정을 구분하기 어렵다. 하나는 확실하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싶지 않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안전하고 자유롭기를 바란다.

 

 

[유보미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