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작품의 가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시각예술]

김가슬 개인전 <An edition-일이 벌어진 자리> 전시 리뷰
글 입력 2020.11.2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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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술을 미술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미술은 근대에 발명된 하나의 발명품이자 제도이다. 미술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박물관과 미술관, 작품을 평가하는 비평가와 작품을 미술시장에서 판매하는 미술품 딜러, 그리고 수집가 등 미술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과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미술 작품은 그저 일상의 일부로 여겨졌을 것이다.

 

미술이 발명된 근대에는 미술사의 판도를 뒤집을만한 또 다른 발명품이 있다. 바로 사진이다. 기존의 미술은 역사적 상황을 기록하고 복제하고 또는 문자를 도해하는 전통적인 역할을 해 왔다. 특히 판화는 예술의 영역이라기보다 역사적 기록을 위한 사료로서 가치를 지녔다. 하지만 사진이 발명되고 미술의 전통적인 역할을 사진이 더 쉽고 간편한 방법으로 대체해버린다. 이에 복제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판화는 그 역할을 상실하고 ‘오리지널리티’를 중요시하게 된다.

 

판화의 존재 이유였던 복제성은 오리지널리티에 있어서는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래서 보통 판화는 에디션으로 제작하고 작가에 의해 몇 장의 작품이 만들어졌는지 1/n 이라는 형식으로 표기한다. 이것은 원화와 구분되는 판화만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어떤 시각물 또는 출판물에 '3/10'이라고 표기되어 있다면 '10'은 '작품(O)'의 총 개수가 10개라는 것을 의미하고 '3'은 그 '작품(E)'이 10개의 작품 중 3번째에 해당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방식의 표기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999/1000'보다는 '5/100'가, '5/100'보다는 '1/10'이 가치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값은 그렇게 매겨지고 여겨진다. 가치가 복수가 될수록 가치가 떨어진다?

 

전시 서문 중 일부

 


그런데 판화 작가 김가슬은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그는 판화 작업을 하며 마주했던 에디션의 개념을 내려놓는다. 0 갤러리에서 11월 27일까지 진행되는 김가슬의 개인전 에서 그의 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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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시 받는 팜플렛과 엽서, 라텍스 장갑

 

 

주택가가 즐비한 동네의 한 건물 2층으로 올라가면 갤러리가 있다. 제대로 찾아온 것인지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문을 열면 자그마한 화이트 큐브에 작품들이 전시된 풍경을 볼 수 있다. 집에 들어가듯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착용한 뒤 전시를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입장 전엔 전시 팜플렛과 엽서, 라텍스 장갑을 받는다. 라텍스 장갑은 판매 중인 작품을 만질 때 필요하다.


작은 원룸 크기의 갤러리 안에는 긴 천에 판화 드로잉이 여럿 찍혀있는 작품과 종이에 찍힌 판화 드로잉, 작품에 사용된 동판, 판매를 위해 가격 별로 작품들이 박스에 담겨 전시되어 있었다. 갤러리가 많지도 않은 이 동네까지 와서 전시를 보기로 한 건 전시의 제목인 “An Edition”이라는 개념에 흥미를 느껴서였다.


 

부정관사 'An '이 붙어버린 'Edition', 'An edition'은 더 이상 어떠한 정보나 의미를 나타내지 못한다. 이 의미를 상실해버린 에디션의 자리에 김가슬은 하나의 그림으로서 '드로잉'을 놓는다. 『No.43, No.8 를 이용한 드로잉』, 작품 제목이 말해주듯 각각의 작품은 판화(Printmaking)라는 방식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결코 반복할 수 없는 하나의 드로잉으로 완성된다. 이 드로잉의 가치는 1/n 로 쪼개질 수 없고 n개의 복수로 늘어날 수도 없다.

 

전시 서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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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6, No.43, No.46-1을 이용한 드로잉』, Intaglio printing, 77x119cm, 2020

 

 

작품들은 모두 판화다. 그러나 그 가치는 판화의 에디션처럼 1/n로 쪼개질 수 없다. 판화를 곧 드로잉처럼 종이에 배치해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 하나하나는 동일하지 않으며 고유의 가치를 지닌다. 마치 원화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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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벌어진 자리』, Silkscreen, 90x900cm, 2020

 

 

작가는 판화가 가지는 복제라는 특성을 전복시킨다. 그러면서도 판화라는 형식은 유효하다. 하지만 전시서문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이 전시가 판화의 가치나 에디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이 벌어진 자리”라는 전시제목처럼 작가는 판화의 전 과정 자체에 집중하여 판화와 에디션의 개념, 그리고 작품의 가치에 대해 주목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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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 중인 작품들

 

 

작가의 이번 시도는 관람객에까지 전래된다. 전시장 한쪽엔 사각형 모양으로 찢어진 판화 드로잉이 가격대 별로 구분되어 있다. 보통의 작품 판매와 다르게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들에게 작품을 쪼개서 판매한다. 가격은 500원, 1000원, 1500원, 2000원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기존의 작품 판매라 하면 대중이 쉽게 접하기 부담스러운 가격으로 책정되기 마련이다. 신진작가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최소 몇 십 만원은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선 전혀 부담 없는 가격에 작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덕분에 구매에 대한 부담없이 작품들을 구경하며 여러 가지 조합을 상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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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른 작품들

 

 

작품이 쪼개진 상태로 판매되기 때문에 작가가 여러 개의 동판을 다르게 조합해 판화 드로잉을 제작했듯이, 관람객들도 판매되는 작품들을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다. 엄연히 말하면 판화의 과정은 아니나 판화 드로잉과 유사한 과정을 관람객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판화의 전 과정 자체의 가치에 주목한 것처럼 관람객도 자연스레 그 과정의 일부가 된다.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작품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문제를 쉬이 결론짓긴 어렵다. 그럼에도 전시가 제시한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예술이 근대의 발명품이듯, 작품의 가치 유무는 의미를 부여하는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닐까. 작품 그 자체로는 그저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 기획자 혹은 비평가 등 누군가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면 작품은 물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여기서 나는 작품의 가치를 발견한다.

 

의미를 부여한 이후엔 같은 것이라도 그것의 가치는 사뭇 달라진다. 김가슬 작가가 판화라는 과정에 집중하고 에디션의 개념을 내려놓은 판화 드로잉을 선보인 것도, 관람객이 저마다의 기준으로 드로잉의 파편을 재조합 하는 행위도 물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전시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가 제시한 담론을 사유하고 파편화된 작품에 자신만의 가치를 부여해보는 경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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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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