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술 '잘' 마시는 법 - 아무튼, 술 [도서]

글 입력 2020.11.2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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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충동적으로 이북리더기를 구입했다. 새 제품도 아니고 중고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그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물욕의 일부였던 것 같지만, 그래도 구입한 이후로는 꽤 요긴하게 쓰고 있다.

 

이북리더기로 처음 완독 한 책은 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이다.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들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 에세이로 분류된 이 책에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이 책이 내 도서목록에 자리잡은 이유는 순전히 제목에 “술”이 들어갔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렇게 묵혀 둔 책을 다시 꺼냈을 때는 우연히도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술에 대한 책이라니, 주사 얘기나 실없는 무용담으로 가득할 것이란 생각에 별 다른 기대도 없었지만, 하나같이 대상을 오랫동안 바라봐 온 사람의 애정과 관심이 진득하게 녹아 나오는 이야기들은 금세 나를 사로잡았다.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좋았던 것은 마지막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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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술에 관대하다. 그 주체가 미성년자여도, 범죄자여도, 심지어는 환자여도, 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용을 베푼다. 나는 항상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 자신이 술을 좋아하고 또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서도 충분히 술을 즐길 수 있는데, 어째서 많은 사람들은 통제와 규율을 벗어난 술자리를 치켜세우는 걸까.

 

술을 좋아한다면서 이런 얘기를 하면 범생이, 아니면 ‘헛’ 주당 취급을 받았다. 그렇기에 작가의 글은 나에게 소중히 다가왔다.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음주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기뻤다.

 

술을 마셔야만 사람과 친해지고, 또 놀 수 있느냐는 사람들의 비판이 전혀 근거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가의 말마따나 서로가 적당히 무뎌지고 허물어져야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특히나 나 같이 좀처럼 속 얘기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그건 내가 여럿이 모인 자리보다 둘, 혹은 셋이 모인 술자리를 더 선호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서 채워지고 비워지는 술잔을 두드려가며 온전히 서로를 위해 나누는 시간이 좋다. 서로 마음 한 구석에 꾸려 놓았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 놓으며 나는 그런데 너도 그런가, 하고 묻는 것이 좋다.

 

생각해보면, 그래서 우리나라의 술 문화가 그런 형태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타인에게 제대로 나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은 금기이기 때문에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을 하는 것이 재밌다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좁은 땅에 붙어살며 스트레스를 풀 만한 것이라고는 음주가무 밖에 없으니, 그걸 과하게 즐기는 것이 미덕이 된 것이다.

 

이렇게 엉망으로 취하는 것을 즐거운 이야깃거리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한 사회에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 또한 꽤 자주 그 분위기에 편승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숙취에 찌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이미 휘발되어버린 기억을 더듬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까지 타인에게 내보였을까, 그래서 상처를 줬을까 두렵다. 시간이 지나면 부끄러운 기억이야 사라진다지만, 나에게 상처 입은 사람은 오래도록 그것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후회를 불러온다.

 

미디어에서 과하게 음주를 조장한다는 사람들의 비판이 점점 거세지는 요즘, 올바른 음주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야 한다. 기억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은 술을 잘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술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또 깨달아야 한다. 음식점, 편의점, 동네 슈퍼, 대형 마트까지 생필품보다도 쉽게 술을 구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논의가 더 빨리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놀랍기까지 하다. 술이 대체 뭐 길래, 우리는 이토록 넓은 아량을 베푸는가.

 

맛있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적당히 즐기고, 딱 물러지고 싶은 정도로만 물러질 수 있는 있는 사람, 평소에는 꺼내기 어려웠던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용기는 생기지만 다음 날 고통스러운 후회를 불러올 무모함은 생기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 나는 그다지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계속 술을 못 마시는 사람으로 남으리라는 것은 아니다.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주량과는 상관이 없다. 주량은 영영 늘지 않을 테지만, 술을 ‘잘’ 마시는 방법은 점차 몸에 익힐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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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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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볼살천사
    •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주량과는 상관이 없다. 이 문장이 참 인상 깊네요 !

      '잘'마신다는 것은 주량과는 별개라는 말, '어떻게' 마시는 행위가 더 중요하다는 말 크게 인지하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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