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근에 주변에서 장애인 본 적 있으세요?

글 입력 2020.11.2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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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와 통계청이 발행한 ‘2020 통계로 보는 장애인의 삶‘에 의하면, 우리나라 장애인 인구는 251만 7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5%를 차지하고 있다. 100명 중 5명, 20명중의 1명이 장애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주변에서 장애인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나의 경우에는 도움반(장애인 학급)이 따로 편성되어있던 중학교 때를 제외하면 23살이 될 때까지 장애인을 만난 것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장애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 질문은 꽤 오랫동안 내가 마음에 품고있던 질문이다. 장애인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매커니즘을 방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의식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기도 했다. 나는 평소 다양한 운동을 즐겨했는데,  운동을 하다 보면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그 중에는 꽤 위험한 운동도 있었다. 어느 날은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아 목으로 떨어져 일시적인 마비를 겪거나, 발목이 꺾여 병원 신세를 져야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에게도 언제든지 장애가 찾아올 수 있겠구나.’


장애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 혹은 내 가족에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문제이고, 관심이 없었을 뿐 우리 주변에는 장애 혹은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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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일상에서 크고 작은 불편을 겪는다. 장애등급을 받지 않았을 뿐, 우리는 다양한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만성적인 통증이나 관리해야 하는 질환 때문에 약을 꾸준히 챙겨먹는 사람도 있고, 안경 같은 보조기구의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다. 장애인/비장애인은 이분법적으로 나눠지는 개념이 아니라 스펙트럼 선상에 존재한다. 장애인은 우리보다 불편함을 조금 더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장애인이라는 특정 집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장애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고, 사회와 환경에 따라 규정된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타도 거동의 제약이 없는 완벽한 Barrier-free 건축 환경이 구축된다면 휠체어를 타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장애라고 규정받지도 않을 수 있다. 안경을 쓰는 것도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특별히 장애라고 규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특정한 기구나 약의 도움 없이는 생활에 큰 불편을 겪는다면 그것도 이미 장애의 일종 아닐까.) 장애에 대한 규정과 인식은 시대적 산물이다.


그런데 장애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나. 무시 받고 차별받는 삶 그 이전에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장애인, 그들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아니, 알아야했다. 이전에 그렇게 느끼지 못했을 뿐. 그것이 이미 나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장애인 관련 영상과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희망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이상하게 느껴졌다. 장애인의 삶은 꼭 감동적이어야 할까. 삶의 한 단면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고, 짧은 시간동안 이야기를 전달해야하는 콘텐츠의 특성에 따른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장애라는 코드를 어떻게 소비하고 있었나 질문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장애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면서 이야기를 나눴던 한 장애인은 나에게 ‘감동 포르노‘를 만들지 말아달라고 했다. 영상에서도 장애인들이 직접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장애는 감동이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고 정체성의 일부다.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주체의 시선을 가진, 장애인들이 하고싶었고 듣고싶었던 그 이야기들은 어떻게 해야 전달할 수 있을까. 장애인들이 보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고 다양한 콘텐츠도 그 역할에 함께해야 할 것이다. 콘텐츠는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강력하고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중에서도 ‘문화예술’을 통해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예술을 통해 장애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장애와 함께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예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들에겐 어쩌면 ‘장애’라는 꼬리표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장애인이라는 시선 이전에 하나의 예술가로 그들을 만나고 싶다.


글과 그림 앞에서, 마술과 무용 앞에서 그들은 하나의 예술가일 뿐이다. 실제로 신체적인 특징을 가리고 그들의 예술을 보면 비장애인의 예술과 다를바가 없다. 물론 무용은 신체적인 특징을 가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지점에 장애인 무용의 가장 큰 특장점이 묻어난다. 몸 때문에 불편을 겪는 이들이 자신의 몸을 통해 말한다는 것. 그 의미를 자꾸 곱씹게 된다.


우리에게는 동시에 이런 고민도 필요하다. 장애인 중에는 스스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의 예술가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예술가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두고 엄격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도태되도록 가만히 두어도 되는 걸까. 어려운 문제다. 장애인이 예술가로써 활동할 수 있는 인프라나 교육환경, 신체적인 특성 그리고 장애인이 예술을 했을 때 우리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사회, 함께하는 예술이 공존하는 사회를 꿈꾼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인 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듣는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감동적인 장애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이 세상에 더 많아지고, 우리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장애인을 마주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 책과 머리로만 배우는 장애 인식 개선보다 함께 부딪히며, 실제로든 콘텐츠를 통해서든 함께 이야기해나갈 수 있을 때 그런 세상에 조금 더 가까워질 것이다.


장애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 질문의 답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이제부터 우리가 장애인과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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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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