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그빌' 속 악인의 '조건' - 주체의 공백 [영화]

글 입력 2020.11.1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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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고대 성악설과 성선설의 흐름에서 시작된 선과 악에 대한 근본적 물음은 어떠한 정답도 없다는 점에서 인간을 끊임없이 그리고 앞으로도 괴롭힐 문제이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인간 스스로 버텨내야 하는 ‘시시포스의 바위’와도 같다.

 

이번 글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을 통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영화 <도그빌>(2000)에 나타난 인간이 ‘악마화’되는 과정을 보고자 한다.

 

 


1) 악은 무엇인가 ; ‘어떻게 악인이 되어가는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독일 출신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독일 나치당 원으로 활동했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 과정을 직접 참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한 책이다. 1932년 나치당 자위대에 지원했던 아이히만은 효과적으로 유대인을 추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등 전반적인 유대인 호송을 총괄했던 인물로 1942년 ‘반제회의’ 이후에는 뉘른베르크 강령을 따라 ‘홀로코스트’를 주도하기도 했던 전범 중 한 명이었다.

 

독일 패망 이후 아르헨티나로 망명했지만 1960년 이스라엘 정부 요원들에 의해 붙잡힌 아이히만은 유대인에 대한 범죄, 불법조직 가담죄, 전쟁 범죄 등 15개의 죄목으로 국제 사법 재판소에 기소된다.

 

재판을 기다리며 사람들은 그가 전형적인 악인의 외모와 함께 비정상에 가까운 정신 질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와 달리 아이히만의 모습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에 가까웠다. 심리 상담에서도 정상 판정을 받은 그는 재판 과정에서도 독일 군인 공무원으로서 합법적 절차 내에서 주어진 일을 담당했을 뿐 직접적으로 유대인에게 피해를 입힌 적이 없다고 진술한다. ‘신이 아닌 법 앞에서 당당하다’는 주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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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참관하며 아이히만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아렌트는 평범한 노동자 출신이었던 그가 지인의 권유로 생계유지를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던 사실과 함께 나치당원이자 군인 공무원으로서 그의 ‘근면성’이 발현되었을 뿐, 그에게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 혹은 동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그녀는 진술 과정에서 아이히만이 자주 이야기했던 “관청 용어만이 나의 유일한 언어입니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국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말하는 것의 무능’이 발현되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가 나치당 아래서 타인의 관점에서 공감하지 못하는 ‘사유의 무능’ 즉, 완전한 ‘무사유’의 상태에 빠져있음을 주장했다.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당의 ‘자행’에 대해 관료제 차원에서 해석하고자 했던 기존 주장과 달리 ‘악마화’의 과정을 통해 발현된 악과 그로 인한 사유와 말하기의 무능을 제시했던 아렌트의 주장은 나치당을 정당하게 옹호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악이 ‘근본적으로’ 고정된 모습을 갖는다는 일차원적, 결과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악이 얼마든지 ‘다양하고 쉽게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다차원적, 과정적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했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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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들의 ‘마을’, 개들의 ‘마음’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통해 살펴볼 영화 <도그빌>은 전지적 시점의 해설자가 미국 조지타운 근처 오래된 폐광 옆 작은 마을 ‘도그빌’을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작가를 꿈꾸는 주인공 톰을 비롯해 가난하지만 마을을 ‘사랑하는’ 인물들이 모인, ‘선량한’ 마을 도그빌. 때는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 톰은 의문의 총소리와 함께 도그빌을 찾게 된 의문의 인물 그레이스를 만나게 된다.

 

신원불명의 그레이스에 대해 몇몇 주민들의 의심과 경계에도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실례’로써 보여주고 싶던 톰은 갱단에게 쫓기고 있던 그녀를 도그빌에 머물 수 있게 주도한다. 주민들의 ‘호의’를 통해 2주간 도그빌에 머물게 된 것에 보답하기 위해 주민들의 생업을 돕던 그레이스는 특유의 일솜씨와 인성을 인정받게 되어 어느 정도의 보수와 자신의 거처와 함께 도그빌에 더 머물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마을을 방문한 경찰들로부터 그녀가 은행 강도 사건과 연관된 범죄자일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주민들은 점차 그레이스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레이스의 노동을 당연시하고 그녀를 하대하였으며 심지어 밀고를 빌미로 폭력과 강간을 자행하기에 이른다. 이에 그레이스는 그동안 연인으로서 의존해왔던 톰과 함께 탈출하고자 하는 계획을 여러 차례 세웠지만 그녀와 주민들의 의견 사이에서 갈등하던 톰 때문에 탈출에 실패하게 되고 오히려 주민들의 미움을 더 사게 된다.

 

그 이후로 목에 족쇄를 찬 채로 생활하면서 주민들의 폭력과 강간으로 고통받던 그레이스에게 톰은 마지막 방법으로서 주민들 앞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할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레이스를 돕는 과정에서 공동체와 자신의 미래를 비롯한 이상을 포기해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결국 톰은 주도적으로 그레이스를 감금하기에 이르고 그녀를 찾고 있던 갱단에게 연락하게 된다. 마침내 도그빌에 나타난 갱단을 환영하면서 톰을 비롯한 주민들은 보상을 받을 생각으로 기뻐하지만 두목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와 만나 과거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본 그레이스는 갱단과 함께 도그빌을 잔혹하게 없애며 복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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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은 다양한 인물 설정과 실험적 기법을 통해 낯선 공동체에 들어서게 된 이방인과 그를 의심하는 공동체의 시각을 보여준다.

 

개인의 ‘자격’과 ‘권리’를 ‘신뢰’하고자 했지만 이방인에 대한 배척과 이기심, 끝없는 욕구에 의해 상처를 받게 되면서 자신만의 ‘기준’을 냉철하게 확립하게 된 그레이스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 간 ‘조화’를 꿈꾸었지만 감정에의 편향과 이상주의적 사고로 인해 결국 자기 자신을 확립하지 못한 톰의 모습. 이에 더해 도시에서 도그빌로 ‘유입’된 존재로서 그레이스에게 본능과 감정으로 대표되는 도그빌의 실상을 경고했지만 스스로 감정에 사로잡힌 척 그리고 보편적으로 잔혹한 면모만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존재이지만 스스로의 이성적 기준을 강조한 그레이스의 아버지까지 영화는 선과 악,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적 사고관에서 끝없이 부딪치고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영화는 감독을 대신하는 전지적 해설자의 설정을 비롯해 연극적 장면 구성, 단순한 음향과 복잡한 조명, 그리고 ‘방관하는 듯, 감시하는 듯한’ 카메라 구도를 통해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기법을 시도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계속되는 긴장과 이완의 느낌을 느끼게 되고 나아가 ‘악의 마을’의 모습을 보다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가 끝나갈 때 우리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잔혹하고 무서운 개가 될 수 있다는 충격과 함께 인간이 ‘불안정’한 존재이자, 결국 ‘불완전’한 존재임을 몸소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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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면의 동전’보다 가볍고, ‘양날의 칼날’보다 무서운



이렇게 ‘위태로운’ 영화 <도그빌>은 배경적 요소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대사, 행동 등에서도 연극적 구성을 활용함으로써 다소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 수도 있는 상징적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사실적이고 극적으로 다듬어낸다.

 

영화 제목에서부터 다뤄지는 ‘개’의 이미지는 “개는 배가 고파야 도둑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라는 척의 대사를 통해서 낯선 이방인 그레이스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품고 결국 그녀에게 족쇄를 채운 주민들을 의미하고 있을까? 아니면 주민들의 각종 폭력(시선 폭력, 언어폭력, 신체폭력)에 의해 파괴되면서 결국 자신의 감정에 휘말린 이후 “개는 매번 익히면 유용한 재주를 부릴 수 없다.”라는 아버지의 대사를 따라가 주민들에게 잔인함을 보이는 그레이스를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는 이처럼 상징을 담은 대사와 함께 이성을 상징했던 그레이스와 감정을 상징했던 주민들이 점차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을 담은 대사를 통해 때로는 친근하지만, 때로는 잔인한 개처럼 인간 또한 이성과 감정의 ‘양면성’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관객들로 하여금 과연 도그빌이라는 마을에 있어 그레이스의 존재가 이름 그대로 ‘은총’이 될 수 있는지, 과연 그레이스를 대표하는 눈이 덮어버리는 도그빌의 모습은 ‘더러운’ 곳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게끔 유도함으로써 ‘양면성’ 그리고 ‘악’이 발현되는 ‘과정’에 참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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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영화는 이성과 감정으로 대표되는 대립 항의 대결 그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도그빌과 ‘함께 한’ 사람들 즉, 톰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과 그레이스 그리고 그레이스의 아버지까지 영화는 다양한 나이대와 성별, 성장 배경을 갖지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악마로 변하게 되는지 다시 말해, 어떻게 ‘도그빌이 되어가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렌트의 주장과 맞닿아있다. ‘개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아렌트의 말처럼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점에 맞춰 타인을 이해하고 함부로 판단하려고 함으로써 ‘사유’의 무능함 나아가, 서로가 서로의 말을 따라 하며 자기 자신만의 ‘말하기’의 무능함을 보여준다.


 

“그의 삶의 터는 부채꼴, 넓은 데서 점점 안으로 오므라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은혜와 둘이 안고 뒹굴던 동굴이 그 부채꼴 위에 있다.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이 꿈이 다르지 않느니. 어디선가 그런 소리도 들렸다.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에 서 있다. 삶의 광장은 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중략)”


- 최인훈, <광장> 中

 

 

최인훈의 <광장> 속 주인공 ‘명준’이 격렬한 이념 대립으로 인해 갈등과 혼란을 겪고 있는 대목으로 작가는 부채와 사북자리로서 이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서, 어쩌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명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영화 종반부에 그레이스가 톰이 직접 지은 이야기에 대해 ‘보편적’인 제목으로서 체념하듯 추천하는 것처럼 인간은 어쩌면 이성과 감정뿐만 아니라 수많은 ‘광장’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악마화’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립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다르다고 이해할 수 있는 ‘사유’를 갖추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기’의 가능성을 갖추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마을의 ‘유일했던 개’ 모세는 ‘광장’에서 누군가를 향해 짖고 있다.

 

 

[남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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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Kimmk
    • 주인공의 이름인 그레이스에는 은총이라는 뜻과 함께 다양한 뜻이 존재합니다.
      우선 그레이스는 불어의 여성형 명사로서, 은혜, 은총, '호의'라는 뜻이 있습니다. 글 중에서 작가님이 언급하신 톰의 이상향을 위한 호의가 그레이스에게 행해지는 것으로 그 이름의 상징적 의미를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재밌는 것은, 프랑스에서 grace는 coup de grâce라는 어구에서 최후의 일격이라는 표현을 완성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 또한 도그빌이라는 영화의 마지막에 그레이스가 마을 사람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상징적 의미 수행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도그빌의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는 히틀러를 옹호한 것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도그빌에서 관찰되는 악의 평범성과 인간의 불완전성은 라스 폰트리에 감독 자신이 '히틀러의 마음을 이해하고, 측은하기까지 하다' 고 말한 것을 영화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히틀러를 이해한다는 말은 다소 충격적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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