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생애 최고의 기차영화 -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영화]

글 입력 2020.11.1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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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생신을 맞아 오랜만에 집에 가는 KTX 열차에 올랐다. 이렇게 기차를 탈 때면 떠오르는 몇 편의 영화가 있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었다던 최초의 영화인 <기차의 도착>과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광활한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 닥터 지바고 >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 생애 최고의 기차 영화를 꼽으라면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 아닐까 싶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동생인 ‘류노스케’와 떨어져 살게 된 소년 ‘코이치.’ 코이치의 소원은 화산이 폭발하여 온 가족이 다시 뭉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로부터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두 대의 기차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문을 듣게 된 코이치는 동생인 류노스케, 그리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소원을 빌기 위한 비밀스러운 여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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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8번째 장편 영화인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걸어도 걸어도>, <아무도 모른다>, <공기인형> 등과는 다른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다. 따스해 보이면서도 기저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냉소 어린 시선이 깔려있던 전작들과 달리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에 힘입어 활기차게 나아간다. 특히 똑같이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섰던 <아무도 모른다>와 비교하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훈풍은 더욱더 도드라진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역 배우들의 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학원에서 배운 듯한 양식화된 연기가 별로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아이들의 연기는 하나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마냥 생동감이 넘친다. 가령 동생인 류노스케는 엄마와 슬픈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발을 동동거리며 산만한 모습을 보인다. 코이치와 친구들은 선생님의 타박에 슬쩍슬쩍 눈길을 피하며 곤란한 상황을 무마하려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자연스러운 연기를 아이들로부터 이끌어냈는지 궁금해서 한 번 찾아봤다. 알고 봤더니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감독은 아예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아역 배우들을 선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충분한 대화를 통해 아이들의 개성을 파악하고 이를 각본에 반영시켰다고 한다. 이건 그가 < 아무도 모른다 >를 연출했을 때도 사용했던 방법이다. 덕분에 이번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린 배우들과 뛰어난 호흡을 보여줬다. 자연스레 영화 속 세계에 녹아든 아이들의 연기는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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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기존의 가족영화와 아동영화의 틀과 맥락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영화에 숨을 불어넣고, 특히 화산이 폭발하기를 바라는 소년의 이야기라는 다소 황당한 소재는 떨어진 가족이 다시 화합하기를 바라는 바램으로 승화되어 가진 현대 가족의 씁쓸한 이면을 그려낸다.

 

하지만 류노스케가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 장면 뒤에 잠자리를 잡으려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이어주듯이 영화는 우울한 분위기를 오래 끌고 가지 않는다. 누에콩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콩을 심었다는 류노스케의 대사처럼 서로를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을 건네며 이 영화가 결코 슬픈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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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늘날에는 자신의 꿈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 시대에 각자의 소원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꿈을 이루는 누군가가 있다면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하는 누군가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마치 올림픽에서 모두가 금메달을 딸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꿈은 양면성을 지녔다. 만약 화산이 폭발하길 바라는 코이치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코이치는 가족을 만나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단순한 가족영화가 아니다. 소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더불어 살기 위한 조화와 배려를 깨닫는 일종의 성장영화다.

 

영화 속 아이들에겐 저마다 소원이 있다. 하지만 소원을 말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이들의 소원은 변한다. 가면라이더가 되고 싶었던 류노스케는 아버지의 성공을 바란다. 가족의 재결합을 위해 화산이 폭발하기 바라던 코이치는 소원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족을 벗어나 세계를 선택한다. 극 중 ‘오늘은 재가 안 쌓이겠어’라는 코이치의 마지막 대사는 소년이 이제 어른의 세계에 다다랐음을 말하는 기분 좋은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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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행복한 삶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형제의 아버지는 류노스케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엔 쓸모없는 것들을 위한 자리도 있다구. 모든 게 가치 있는 거라면 아마 숨 막힐걸.’ 물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좋다. 하지만 따지 못해도 좋다. 화산이 폭발해서 가족이 다시 만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여전히 가족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며,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다. 그러한 여유를 간직한 삶이야말로 진짜 행복한 삶이다. 어쩌면 영화가 말하는 행복이란 카라멜의 짜릿한 단맛이 아니라 가루칸 떡의 은은한 단맛이었는지도 모른다.

 

방금 열차 하나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무겁게 땅을 뒤흔드는 소리가 아래서부터 부드럽게 올라왔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흐린 하늘 아래 자그마한 언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저 언덕 어딘가에서 코이치와 류노스케, 그리고 아이들이 소원을 빌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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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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