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020년, 은둔의 재정의 - 조르조 모란디 [시각예술]

글 입력 2020.11.1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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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는 볼로네제 파스타와 젤라또의 도시였다. 적어도 처음 볼로냐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땐 그랬다. 일 년 전 겨울, 나는 교환학생 신분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볼로냐는 원래 계획에 있던 도시는 아니었다. 기왕 여행을 왔다면, 많이 둘러보는 것이 좋겠지. 그런 생각으로 급하게 정한 행선지였다. 기차 안에서 구글맵을 검색해서 유명한 장소 몇 군데를 찍었고, 볼로냐 현대 미술관은 그러던 와중에 우연처럼 같이 찍힌 장소였다.

 

그곳에서 모란디의 그림을 처음으로 보았다. 볼로냐 거리에 가득 찬 벽돌색과 황토색 건물들처럼, 모란디의 그림 역시 탁하지만 정갈한 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방문한 이 도시와 참 잘 어울리는 그림들이라고 생각했다. 첫인상은, 볼로냐를 방문한 여행자에게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유독 날씨가 흐렸다. 흐린 날씨로 부옇게 뜬 도시의 정경은 그림에 그대로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우연히 방문한 미술관에서 내가 느낀 도시의 감상을 나눈듯한 그림을 발견하는 건 여행자에게 최고의 행운이 아닐까. 그런 낭만적인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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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디는 볼로냐에서 태어나 볼로냐에서 생을 마감한 작가이다. 평생 다른 나라는 고사하고 다른 도시 역시 방문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는 창작 활동에 새로운 자극들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4평 남짓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평생을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렇게 그려진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 역시 무척이나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병과 컵, 주전자, 창문 사이로 비치는 풍경들. 그런 것들이 사실 전부다. 어디서든 볼 수 있었을 것 같은 낡은 병들을 그린 그림들은 병의 모양과 구성만 미묘하게 바뀐 채 미술관 벽을 채우고 있었다.

 

은둔의 화가. 밋밋하고 칙칙한 별명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 화가는 놀랍게도 살아생전에 많은 타인들의 인정과 명성을 누렸다고 했다. 당시에 주류를 이루던 화려한 추상미술 작품들 사이에서 사물과 풍경의 본질을 추구하던 모란디의 작품은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특정 유파에 속함 없이 과거로부터 받은 여러 영향을 토대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해갔다. 끝없는 새로움에 쓸려가지 않은 고유한 개성은 그의 작품에 힘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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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여행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 있다.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많이 봐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성실하게 보는 것이다."

 

 

당시의 나는 여행을 교환학생의 의무쯤으로 여기고, 더 많은 곳을 둘러보지 못하면 어쩌지, 항상 조급해하던 참이었다. 어찌 보면 볼로냐에 방문하던 그날도 바쁜 마음의 속도에 휩쓸려서 우연처럼 도착한 것에 가까웠다. 그토록 스스로를 닦달해서 새로운 곳에 도착해도 재촉된 걸음과 구글맵에 들어박힌 시선 사이로 흘려버리는 것이 더 많았다. 어느 곳에 가면 다음 장소를 생각했다. 현재에 충실하기가 이렇게나 어렵다.

 

미술관에 길게 늘어선 작품들의 끝에 반갑게도 한국어 도록이 한 권 놓여있었다. 그곳에서 저 문장을 보았다. ‚전 세계를 여행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 있다.‘ 쫓기듯 도착한 나 같은 여행자에게 건네는 말 같았다. 모란디는 평생을 한 공간에 바쳐 그 본질을 겨우 캔버스에 옮겨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것들도 보지 못하면서 걸음만 새로이 옮겨 다니느라 바빴다. 내 인생은 모든 본질을 꿰뚫고 남을 만큼 유난히 긴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껍데기뿐인 새로움에 매번 목매는지. 이미 놓여있는 것들에 지루함을 느끼는 건, 내가 지금 보는 것들에 충분히 성실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성실하게 보는 것‘은 사실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놓지도 못한 마음 한 켠의 숙제처럼 남았다.


그리고 2020년. 예상치 못하게 발이 묶인 시간은 기약 없이 늘어졌다. 나는 이제 한국, 내가 더없이 오래 머물러왔던 내 방에 계속 멈춰있다.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새로움이 그리웠고, 같은 풍경은 지겨웠고, 인생이 낭비되고 있다며 시시때때로 지루함을 호소했다. 그래서 다시 열어 본 작년의 여행 사진들 사이에 모란디가 있었다. 잠깐 동안의 정주마저 끔찍하게 여기는 나에게 사진이 주는 기억은 위로이자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남겨져 있던 숙제를 마저 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만 한 나의 공간도 어쩌면 평생을 여행하기에 넓은 곳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주어진 지금 당장에 좀 더 성실해질 필요가 있었다. 답답하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과 모란디 그림의 목소리를 나누고 싶었다. 지루한 지금이 익숙함에 가려진 깊숙하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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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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