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유약한 인간이기에: '루비 스팍스' [영화]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글 입력 2020.11.0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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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 정확히 말하면 난 혀끝에서 맴돌 때가 아닌, 입 밖으로 내뱉어졌을 때 그 언어가 갖는 힘을 믿는 사람이다. 들숨과 날숨 사이를 비집고 나와 이내 공동으로 흩어져버린 언어는 결코 주워 담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는 그 특정한 순간부터 내 곁을 감돌며 내게 책임을 다그치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이를 역이용하기 시작했다. 호흡을 통해 증폭된 언어의 힘을 건설적인 삶의 생산을 위한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꽤나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휴학하면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를 할 거라고 떠들고 다녔더니 진짜 에디터가 되어 글을 쓰게 되었고 문화예술의 장에서 함께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부산국제영화제의 자원봉사자로 최종 합격할 수 있었으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한 달 매출 천만 원을 창출하겠다고 큰소리쳤더니 실로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나 같은 사람이 적진 않은 모양이다. 익히 들어본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가 존재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Pygmalion effect, 정신을 집중해 어떠한 것을 간절히 소망하면 불가능한 일도 실현된다는 심리적 효과

 


국어사전에 기재되어있는 피그말리온 효과의 풀이이다. 덧붙이자면 이는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이상적인 여인 그 자체인 조각상을 만들었고 자신이 만든 그 조각상을 사랑하고 열망하게 된 것이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의 간절함을 받아들여 조각상에 숨을 불어넣고 실제의 여인이 되어 여인과 피그말리온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 그리스 신화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데,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면 어떨까? 그토록 갈구하던 상상 속의 이상형이 실재로서 내 연인으로 눈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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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스팍스>의 주인공 캘빈은 기이한 경험을 겪게 된다.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캘빈에게 정신과 의사는 아무거나 써보라는 숙제를 던져 주고 캘빈은 말 그대로 아무거나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리곤 타자기를 마구 두드려 한 여자를 창조한다. 의사가 용했던 걸까. 도통 쓸 수 없던 글이 그녀에 관해선 막힘없이 써지고 그녀가 보고 싶어서 한시라도 쉬지 않고 글이 쓰고만 싶어진다.

 

아무튼, 캘빈은 몸의 흉터나 점, 머리칼과 눈동자의 색, 사소한 습관, 말투, 취향을 포함한 모든 걸 그녀에게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창조주였고 그렇게 그의 글 속에서, 그의 손끝에서 루비가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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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날 아침, 루비가 캘빈의 주방에서 요리하며 환한 웃음으로 잠에서 깬 캘빈을 맞이한다. 그는 헛것을 본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숨이 느껴지고 부드러운 살결이 만져지는 이는 현실이었다. 혼란스러움도 잠시, 캘빈은 자신이 만들어낸 여자가 완벽하다고 느껴 글쓰기를 중단하고 행복을 만끽하며 루비와의 사랑에 열중하기로 결심한다.

 

꿈에 그리던 이상형과의 연애라니, 흠잡을 곳 없어 보이지만, 캘빈이 루비에 관해 쓰기를 중단한 상태에서 루비의 삶은 지속되니 점차 루비 자신만의 자아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루비와 캘빈의 충돌과 대치가 반복되고 이내 캘빈은 다시금 타자기 앞에 앉는다.

 

처음엔 아주 사소한 부분들을 조금씩 고쳐 나갔지만 머지않아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굴복시키는 광기 어린 지경에 이른다. 개처럼 네발로 기며 컹컹 짖으라는 장면은 보기 불편할 정도로 섬뜩하며 폭력적인데, 상대의 주체성, 인격의 입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짓밟는 묘사였기에 그랬으리라.


캘빈의 폭력이 멈추었을 때 루비는 도망친다. 도망치는 루비를 붙잡지 않고 캘빈은 그녀의 모든 기억을 지운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을까? 피조물에 대한 마지막 권력의 행사였을까? 어찌 됐건, 그렇게 그들은 남이 되었고 서로가 없는 삶을 살아가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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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은 루비를 알아보지만 그에 대한 기억이 일절 남지 않은 루비는 처음의 그 환한 미소로 캘빈을 향해 웃어 보인다. 왠지 모르게 이터널 선샤인이 떠오르는 엔딩이다.

 

이들은 운명인 걸까? 이들의 재회는 해피엔딩일까 새드엔딩일까? 정답이 없는 사랑에 끝없는 물음표만이 남는다. 개인적으로 재회는 새드엔딩에 가깝다고 믿는 편이지만, 다시금 사랑에 도전하는 그들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

 

앞서 나는 말이 지닌 힘을 믿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예시로 들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는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한정된 것이다. 간절히 소원하고 행동한다면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주체인 타인을 내 의지대로 만들어내고 바꾸겠다는 건 그저 폭력의 서사가 시작될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유약한 인간이기에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쉬이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나조차도 때때로 애인이 줄 수 있는 사랑 혹은 주고 있는 사랑은 간과한 채 내가 바라는 사랑을 달라며 억지를 부리곤 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능숙한 이가 있을까.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에 서로 보듬고 사랑하며 계속해서 상대를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변화해야 한다.


우리의 찌질한 캘빈 역시 루비를 계속해서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변화하길 바라며 이만 리뷰를 마무리한다.

 

 

[강안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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