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때다 싶은 날 [음악]

순간과 음악
글 입력 2020.11.0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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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이 탁 풀리는 순간이었다.

 

새벽까지 글을 쓰고 졸업 과제를 하다 문득 바깥을 보니 쓰레기를 실어 가는 차가 삐- 삐-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조심하라'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겠지. 그런데 그 신호가 비수처럼 꽂혀 버렸다. 괜히 가슴께 어딘가를 문지르다 창문을 닫았다. 알 게 뭐람.


소주잔 밑바닥에 일렁일렁, 삼키지 못한 방울들이 흐트러진다. 우리 졸업하면 뭐 하냐, 친구가 물으면 또 다른 친구가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한다. 나는 문화인류학과를 다니고 있고, 어떤 애는 철학과고, 어떤 애는 순수예술 전공이다. 녹록지 않을 법한 미래들을 곱씹으며 연거푸 잔을 넘겼다.


맥주 한 캔과 함께 돌아오니 다시 혼자였다. 방 한 칸에 몸을 구겨 넣고 어떻게든 가벼운 안줏거리를 찾는 내 모습이 노트북 화면에 비추었다. 그래서 평소엔 잘 듣지 않던 음악들을 뒤적여 재생했다. 내가 지나치게 동경하는 나머지 매일매일 듣고 읽는 아티스트나 작가들에겐 이런 마음을 내보이고 싶지 않아서.

 

우연히 만나 서랍에 넣어둔 곡들을 조심스레 꺼내보는 시간을 가졌다. 꼭 누가 오래전에 써 준 편지처럼.

 


 

 

I'll take one more sleepless night

Then book the cheapest flight

Buy my head some space to clear

 

- 'Cheapest Flight' 중

 

 

바이러스가 온 세상에 창궐하기 직전, 나는 유럽에 있었다. 생각 없이 들른 한 잡화점에서 이 앨범이 나오고 있었는데, 검색만 해두고 따로 저장은 않아 실로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올해는 꼭 사랑에 빠질 것이며 졸업 전에 일자리를 가질 거라고, 그것도 아니면 또 여행을 갈 거라 막연히 기대했다.

 

그런데 어느 것도 잡지 못하고 겨울이 왔다. 그립다. 내가 가졌던 설렘의 감정이, 당시 가졌던 미래에 대한 기대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걱정이라는 푸념마저. 이 노래는 한가한 베짱이의 노래가 아니다. 충분히 많은 고민을 했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창구로 '가장 싼 비행기표'라는 답을 찾았을 뿐이다.

 

모든 경로가 막힌 지금, 우리의 답은 어디에 있을까. 몸은 신이 나는데 마음은 신나지 않은 곡, 오히려 멍하니 벽만 바라보게 되는 나의 비행기 노래.

 

 

 

 

이때다

싶어 몰려온 나의 맘

속에 피로를 깨우는 

너의 그림자 어두워 무서워

 

- '이때다' 중

 

 

봄이 반쯤 지났을까, 갓 면허를 딴 나는 운전을 하게 되었다. 초보 운전자에게 지나치게 요란한 EDM이나 락 같은 장르의 곡들은 사치였다. 마냥 즐겨 듣지도 않던 기리보이의 앨범을 골랐다. 단지 앨범 커버에 코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내 긴장감을 상기시켜줄 것 같아서.

 

조금씩 운전이 익숙해질 무렵, 가사가 귀에 들어왔다. '행복은 폭풍전야이자 또 저주' 라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안도감이 든다. 장기하처럼 툭툭 던지는 가사를 가졌다는 점, 그에 걸맞게 모든 것들에 덤덤하게 군다는 점이 그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곡을 계속해서 곱씹다 보면 어디 한 군데가 저릴 때가 있다. 저온화상 같은 앨범.

 


 

 

Losing my faith, I'm losing my faith

Slipping away, You're slipping away

I'm not okay, No I'm not okay

 

- 'I'm not okay' 중

 

 

작년 겨울, 어색한 동기 언니와 우연히 산책을 했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학교 호수 공원을 몇 바퀴나 돌고, 이따금 오리 소리 같은 이상한 것에서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어 번은 같이 있으면서도 각자 사색하는 시간을 함께 즐기다가, 언니가 졸업을 했다. 딱히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진 않았고, 서로가 떠오르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사진을 보내는 등 참 희한한 방식으로 안부를 확인했다.

 

어느 진탕 취한 날, 내가 언니에게 뜬금없이 '자지 마'라고 문자를 보냈다. 서로 넘지 않던 묘한 선을 불쑥 흩트린 것이다. 언니는 곧장 메시지를 읽고, 또 그 의미를 용케 알아듣고, 이 앨범을 추천해 줬다. 내가 재워줄 수 없으니 이 노래라도 들어 보라며.

 

아직까지 우린 그런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이민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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