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의 날개는 이미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11.05 09:2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 엘라 휠러 윌콕스, <고독> 中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2003)에 나온 시의 한 구절. 시인은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한 여인을 생각하며 지었다지만 2개의 문장이 주는 그 무게감은 무심히 우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지게 한다. 금이 간 거울처럼 우리를 비추면서도 부분 부분만을 곱씹게 하는. 이번 글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을 통해 영화 <버드맨>을 살펴봄으로써 알고 싶지만 알기 어려운 ‘고독’에 대해 물어보고자 한다.

 

 


1) 우리는 어떻게 개인으로 ‘탄생’하는가



독일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은 그의 대표작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근대 이후 개인의 자유가 형성되고 확장되어가는 과정에 주목하고자 했다. 그는 종교개혁과 전체주의 집권 등 거시적 차원에서부터 사디즘, 마조히즘 등 미시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근대 사회를 살아간 개인들이 그동안 보여준 자유의 모습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고립감과 무력감을 통해 자유의 ‘양면적’인 모습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프롬에 따르면, ‘코기토’ 정신으로 대표되는 이성의 ‘발견’을 통해 근대 사회 속 개인은 점차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와 그 자원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개인이 되었다. 이를 통해 개인은 출생과 함께 주어지는 생리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해결함과 동시에 사회적 관계의 형성 및 확장에 대한 욕구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개인들이 자유를 확보하며 더욱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게 될수록 자신의 외부에 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가능성과 동시에 자신의 외부에 귀속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크기변환]erich-fromm-painting.jpg

 

 

프롬은 이 부분에 주목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결정되는’ 소극적 차원에서의 ‘~로부터의 자유’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것’(소유)에 머무는 것을 경고한다. 대신에 그는 개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적극적 차원에서의 ‘~에 대한 자유’를 가짐으로써 ‘자기 자신’(존재)를 생각하는 개인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방법으로 그는 근대 이후 발견된 이성의 자유와 함께 감성의 자유를 합일시킴으로써 ‘자유의지(자발성)’를 가져야 함을 주장한다. 인간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지면서도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적인 존재임을 공고히 주장했던 프롬은 개인의 자발성 실현을 통해 진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욕구 충족으로 대표되는 생존의 능력을 발휘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발현해 앞으로 보다 나은 개인, 보다 나은 세계로의 발전을 주장하고자 했다.

 

 


2) 스스로의 의미를 찾아 날아오른 남자의 이야기


 

개인의 자유에 대한 에리히 프롬의 견해와 함께 살펴볼 영화는 <버드맨>(2014)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리건 톰슨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과거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버드맨’ 캐릭터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어쩌면 자의로, 어쩌면 타의에 의해 갇힌 과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는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존경을 담아 카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로서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연극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와 가치관으로 인해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버드맨으로서의 자신과도 갈등을 일으킨다. 남편, 아버지, 연출가, 연극배우 등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회적 관계에 있어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그의 도전을 그저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자 하는 행동으로 생각하면서 결국은 부정당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대중들 또한 연극배우로서 새로 시작하고자 하는 그의  모습보다는 과거의 ‘버드맨’의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면서 기어코 인정해 주지 않는다.

 

 

[크기변환]17BIRDMAN-jumbo-v2.jpg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던 리건은 술을 통해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는 과정에서 자신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과거의 명성 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에게 족쇄처럼 다가왔었던 버드맨 캐릭터라는 자아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존재가 점점 흩어져 가는 리건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리건은 더 이상 과거의 인기와 명성을 떠올리거나 자신이 건재함을 알리기보다는 자신이 연극배우로서, 연출가로서 자신의 무대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개인적인 존재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고 영화는 그가 밝은 표정으로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을 비추며 끝이 난다.

 

 

 

3) 그렇게 우리는 개인이 되어간다


 

프롬의 시각에서 바라본 리건 톰슨은 어떤 인간일까? 그는 프롬이 제시한 개인상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는 어떤 과정을 통해 진정한 개인이 되었는가?

 

리건이 자신의 존재를 되찾기 전까지 그는 ‘정적’으로 적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버드맨 캐릭터를 통해 개인적인 성공을 이루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저 버드맨 역할을 연기했던 영화배우’라는 수식어에 갇히게 된다. 어쩌면 그의 딸이 이야기한 것처럼 리건은 자신이 아직 배우로서 건재함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버드맨이라는 외부 세계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가 아닌 자신이 ‘소유’했던 캐릭터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연극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있어 ‘동적 적응’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심각한 무력함과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연기와 연출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긴장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지인들과의 관계 또한 버텨내지 못한 채 불안감에 휩싸여 술을 통해 ‘도피’하고자 한다. 이때, 영화는 주인공 리건뿐만 아니라 리건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이 자살을 생각하거나 술이나 마약 등에 의존하기 시작하거나 혹은 이성애자임에도 동성애적인 스킨십을 갈망하는 코드들을 삽입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확립하고 확장시키는 데에 있어 개인들이 도피하게 되는 과정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고자 했다.

 

 

[크기변환]image.jpg

 

 

또한,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리건이 점점 버드맨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고 비로소 자유를 되찾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물론, 그가 연극배우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방식을 뚜렷하게 나타내고자 노력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오히려 버드맨을 닮아갔다는 점에서, 그가 벗어나고 버려야 하는 과거의 속박 속에 다시 갇혔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자발성’을 꾸준히 실현하고 보다 자기 자신을 확장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그가 진정한 개인이 되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리건의 주변 사람들도 자신의 무력함 앞에 도피하고자 했으며 일반 대중들 또한 확실하게 과거의 굴레 속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 즉, 자유의지를 통해 자발성을 실현하는 것은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고독감과 무력감은 불가피한 것인가?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굳은 ‘믿음’과 나아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실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 빛난다’.

 

- 레이먼드 카버(Raymond Clevie Carver)

 

 

영화 초반, 주인공과 함께 등장하는 미국의 대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말이다. 영화 내내 리건은 카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에서 현실을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사랑에 있어서 누군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역할을 연기한다. 그는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생각하지만 결국 이겨내지 못한 채 자살로서 도피하고 만다.

 

이 부분 또한 앞서 이야기한 프롬의 견해를 빌리자면 역시나 무력감과 고립감에 ‘복종’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프롬이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대표적인 활동으로서 사랑과 생산활동을 꼽은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하고 생산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차근차근 만들어가야만 한다.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쟁취하면서 우리는 진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자. 우리는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빛을 받아야만 보이는 ‘행성’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고유의 빛을 가지며 누군가를 비춰줄 수도 있는 ‘항성’이라는 점을.

 

 

[남윤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