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그 옷이 참 안어울린다는 말

입고 싶은 옷 입으세요!
글 입력 2020.10.3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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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브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력 때문인지 종종 옷을 골라달라는 말을 듣는다. 색을 배합하는 일도 귀찮아 대충 검은 옷과 흰 옷, 간혹 남색이나 회색옷만 걸치는 내가 무슨 조언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한마디 건넨다. “입고 싶은 옷 입어!”


광고나 인스타그램의 셀럽처럼 입고싶은데 체형에 맞는 옷을 골라달라는 말인 것을 모를리가 있나. 그래도 그렇게 말한다.


한때 내가 옷에 신경을 썼던 이유는 외적인 모습으로 참 모진 말을 많이 들었고, 체형을 바꾸면서 같은 양의 상반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것들이 당시를 넘어 아직까지도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다. 힙합에서 아메카지룩까지 모든 장르를 섭렵해야할 것 같았을 때가 있었다. 이 외모지상주의에서 정작 내 일은 언제 할 수 있단 말인가.


악세사리는 한가지만 오래 착용하고, 옷에는 무채색 이상을 쓰지 않도록 기준을 세운 것이 그 때문이다. 휘황찬란한 것들에 한 눈 팔고 싶지 않았다. 나는 패션업계에 종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으므로. 동시에 외적인 모습으로 피해를 받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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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purce

 

 

깔끔하게 보이는 옷들만 남겼다. 4년 정도 전만 해도 내 짧은 목 때문에 셔츠나 카라가 있는 옷들이 참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너또셔(너 또 셔츠)’라는 말과 함께 “셔츠 잘 어울려서 좋겠다.”는 말을 듣는 웃긴 현상이 발생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익숙하지 않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보다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려니”하는 순간이 온다. “아예 신경을 쓰지 말라”고는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 어쨌든 시각적인 자극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형은 확실하게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일종이다. 그러나 보조적인 수단이다. 예를 들어 발표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발표내용을 숙지한 후에야 말의 속도, 제스쳐, 목소리 크기 등을 조절하는 것이 순서다. 즉 중심 컨텐츠가 무엇인지가 선순위에 위치한다. ‘옷을 입은 나’에서 중요한 컨텐츠는 ‘나’라는 것이다.


화려한 포장지를 끝없이 풀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공기 뿐이었더라.


‘패완얼’을 확장시켜보면 같은 옷이라도 사람마다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말이다. 외모와 체형 뿐 아니라 한 사람 자체가 옷에 미치는 영향이다. 비슷한 체형과 외모라고 하더라도 특유의 분위기가 다르기 마련인데, 과도하게 이 포장지가 나의 결여를 덮을 수 있을 것이라 의탁함이 소용 없는 까닭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평범하게 옷을 입는다. 그러니까 ‘평범’이겠지. 비범한 사람들이 정말 옷을 센스입게 착용하거나, 정말 센스없이 착용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속해 있는 범주이기 때문에 ‘평범’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그냥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것은 경제적인 방법이다. 보통의 사람으로서 나의 옷은 평범할 것이고, 요란함으로 뒤덮지 않아도 나는 내실을 유지하는 사람이며, 옷이 나의 분위기를 입는 것이다.


지금 당장 내가 원색으로 옷장을 뒤엎는다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인 즉슨 ‘어색하다’, ‘하지 않던 짓을 한다’, 정도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과 거울 속의 나는 생각보다 이른 시일 내에 ‘나의 원색 옷차림’에 익숙해져, 또 어울려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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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고 싶은 옷이 없다면 추구하고 싶은 이미지의 옷들을 고르는 것도 고려해본다. 마찬가지다. 셔츠에 슬랙스를 즐겨입는 내가 농구저지를 골라 나는 이 옷의 분위기를 입는다고 가정하자.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제시할 보조 정보를 선택한 것.


내가 그다지 자유분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나와 대화를 나누는 10분안에 판별이 날테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싶은 분위기를 염두에 두며 행동하고 말투를 구사하고, 옷이 보조적인 수단으로 가속화시킨다면 해당 이미지를 입을 수 있다. 옷은 보조제같은 역할이다.


사춘기의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성인은 ‘잘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의 할 일을 착실하게 해내는 반전’의 모습이었다. 참 귀엽다 싶은데, 재밌게도 대략적으로 주변에서 듣는 현재의 내 인상과 들어맞는다. 스타일링으로 ‘착실한 분위기’를 구현할 수 있을까? 곧 들켜버렸을 것이다.


수많은 인생들 사이에 끼어있는 내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다. 카메라의 수와 구도, 편집에 따라 조작이 용이한 것이 아니다. 과연 몇 사람 앞에서 대본을 갖추고, 긴 시간의 편집까지 마친 정성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나? 나는 긴 시간 착실했고, 성실한 분위기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각이 있는 셔츠를 주로 입었고, 현재는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셔츠도 참 오래 입었다.


그러니 그냥 큰 문제가 없다면 입고 싶은 옷을 입어라. ‘나’는 천쪼가리를 뚫고 발현될테니. ‘나’에게 옷이 들러붙기 시작할테니. 그리고 사람들은 본인의 것이 아닌 것에는 더 쉬이 익숙해지므로 곧 잘 어울린다고 말할테니.

 

 

[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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