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나의 글이 당신에게 가닿기를

-지영, 커피이며 낙엽이며 새벽이며 바람이며 강가인
글 입력 2020.10.3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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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지만, 되도록 나만 보고 싶은 것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 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그 세계의 것들에 매혹되었지.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하던 보르샤트 선생이 잠재태에 대해 설명하며 ‘앞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죠. 지금 눈이 내리지 않지만, 겨울이 돠면 한 번 눈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내가 감동한 것은,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 강의실에 앉은 젊은 우리들의 머리칼이, 키 큰 보르샤트 선생의 머리칼이 갑자기 서리처럼 희어지며 눈발이 흩날리던 그 순간의 환상을 잊을 수 없어.

 

- 한강, 『희랍어시간』 116쪽

 

 

한강 소설, 『희랍어시간』 의 문장을 좋아한다. 애정하는 좋은 책들이 많지만, 책의 세계로 더 깊숙이 빠져들게 만들어준 책이라서 이 책은 그 어느 책보다도 내 손길을 많이 탄 책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는 일은 덩달아 나라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책 속의 문장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충만하게 만드는 책과 영화 속에 나오는 문장들, 이들을 곱씹는 일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나의 편지가_1[크기변환].jpg

나의 기록장: (아래서부터)일정노트/독서노트/모닝페이지노트/일기장

 

 

세상에는 읽고 보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나는 자연스레 자신을 스스로 ‘독자’의 자리에 남겨두었다.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에디터로서 글을 쓰기 전까지 나의 정체성은 오로지 ‘읽는 사람’에 멈춰있었다. 분명 아주 어릴 때부터 울자 겨자 먹기로 담임선생님께 검사를 받기 위해 쓴 일기들이 있었고, 각종 글쓰기 대회에서 쓴 글도 꽤 많았다. 대학에 올라와서는 과제를 하기 위해 매일같이 쓰는 하루를 보냈고, 심지어 두 개의 문예 창작 동아리에도 속해 있었다. 그 외에도 간간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소재를 던져주는 글쓰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쓴 기록과 핸드폰 메모장 속의 기록은 여전히 쌓여가고 있다. 이렇게 나의 기록과 글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고,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느낀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시를 쓰던 순간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책상을 밝히는 스탠드 불빛 아래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썼던 시.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아무에게도(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사이에 내 마음을 숨기듯 썼던 그 시의 분위기는 지금까지도 내 글 안에 남아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를 위해서만 글을 써왔다. 잊고 싶지 않은 문장과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기록하고, 나의 이상적인 세계를 녹여내서 시와 소설을 썼다. 나의 글에서 독자는 오로지 나 혼자였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나의 세계에 갇혀 있었던 것이었다.

 

좋아하지만 되도록 나만 보고 싶은 것. 내 글을 스스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말로 꺼내지 못했던 마음을 글로 옮기는 순간, 스스로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문장을 기록하는 순간의 행복감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행복을 세상과 공유할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닌, 타인인 독자가 생긴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맨 처음 자각했던 것은 내 글에 내가 아닌 독자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막연한 책임감이 생겼다. 나의 취향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과 목청껏 소리 내고 싶은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썼다.

 

상상의 독자를 두고 글을 쓰는 순간, 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평소에 일기장, 혹은 창작 노트에 끼적이듯이 단어들을 흩날리는 것이 아니라 또박또박 신중하게 적어야 내 글을 읽는 다른 독자들의 마음에 와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백하자면, 매주 기고 요일을 지킨 적이 별로 없다. 나만의 중력을 가진 글을 내가 아닌 타인이 읽었을 때 닿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쓰는 일은 새로웠지만 어려웠다. 문장의 힘을 아는 만큼 두려워한다. 어느 날 일기장에 “그동안 너무 쉽게 글을 써왔다는 생각”이라는 문장을 쓰고 난 뒤에 한동안 어떠한 글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허공에 글자들을 날려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애꿎은 문서창을 닫았다 열기를 반복했다. 나 혼자 쓰고 보는 글에서 한 단계 나아가는 일이 불러온 성장통은 예상보다 많이 아팠다.

 

그러다 어느 날은 “좀 더 가볍게 살고 싶다”라고 썼는데, 그날 이후로는 잘 안 되는 느낌이 들더라도 일단 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일단. 그래서 매주 써야 할 글이 있다는 것은 글 쓰는 힘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써야 하기에 억지로라도 내 안에서 없는 힘을 찾아서 끌어내야 하는 일이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에디터 활동 하는 동안 매주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정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도 모르게 글 쓰는 힘이 조금씩 늘어났다.

 

 

 

더듬더듬, 앞으로 쓰면서 나아가기



문장을 읽기만 하던 나는 문장을 더듬더듬 쓰는 사람이 되었다. 나 자신만을 위해 글을 썼던 내가 세상에 눈길을 주며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여하고 싶어졌다.

 

 

"자신 없으면 자신 없다고 말하고 가끔 말하고 가끔 넘어지면서 살고 싶다. 무리해서 뭔가를 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것이 싫다."

 

-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88쪽

 

 

긴장하지 않고 나의 시선을 최대한 또박또박 상대방이 알아볼 수 있는 글씨체로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이 마음이 담긴 글이 누군가에게 진실로 와 닿기를 바란다. 아직은 여러모로 스스로 아쉬운 점이 많다. 글씨체를 아름답게 꾸며도 두서없이 쓰는 편지는 상대방이 읽기 편할지는 몰라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간혹 내 글이 그렇게 쓰이고 있을까봐 겁이 난다. 지금은 자신 없다고 그냥 말하고 싶다.

 

그래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한 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렇게 글을 써나가고 있다.

 

 

나의 편지가_2[크기변환].jpg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근래 가장 좋아하는 문장들.

 

 

추신.

나의 글이 당신에게 진심으로 가닿기를 바랍니다.

-지영, *커피이며 낙엽이며 새벽이며 바람이며 강가인

 

*박솔뫼, 『을』 중에서 ‘-씨안, 담배이며 술이며 사과이며 햇볕이며 옥상인’를 차용하였습니다.

 

 

 

에디터_전지영_명함.jpg

 

 

[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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