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군가의 하루는 시가 되고: 패터슨 [영화]

영화 <패터슨>을 통해 일상을 예술로 바라보기
글 입력 2020.10.3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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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외출이 어려워지면서 더욱더 반복적인 일상에 지치게 된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은 온라인에 파묻혀 사는 하루. 독서마저도 전자책을 이용하니 두통이 점점 잦아지는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 다시 무기력한 태도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나를 좀먹으려 하고 있었다. 뭔가를 하고는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 같은 텅 빈 마음이 나를 몹시 초조하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습관적으로 그리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무기력에 대해 플래너에 적은 적이 있다.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는 매주 플래너를 확인하시고 코멘트를 적어 주셨었는데, 늘 응원의 메시지로 가득 채워 주셨다.
 
그랬던 선생님이 무기력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절대 무기력에 빠져서는 안 돼. 일상을 유지해야 해.'라고. 그때만 하더라도 그게 마음처럼 되나요,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무기력에 져왔다. 어둠이 물러갈 때까지.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러는 사이 흐르는 내 시간과 일상들은 나 자신으로부터 외면되어 왔을 뿐이다.
 
이런 순간에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이다. 이 영화, 참 이상한 영화다. 정말 재미없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재미없는 인물의 재미없는 일주일을 보여준다. 영화라면 뭔가 극적인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이를 통해 등장인물이 각성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관객인 내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태반이지 않나.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상하게도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힘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폭발적으로 솟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몽글몽글' 끓기 직전의 뜨끈한 온도까지만 다다른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위안이 된다. 무리하지 않고도, 내 일상을 유지하고도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묘한 마음에 지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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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의 일주일간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패터슨 씨는 패터슨 시의 버스 운전기사로 근무 중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심지어는 일하는 순간에도 늘 같은 구간을 운전해야 하는 그지만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 그는 '시인'이다.
 
그는 매일 같아 보이는 순간 속에서도 영감을 주는 소재를 찾아 그만의 비밀 노트에 시를 적어 내려간다. 패터슨 씨의 시에는 운전을 하면서 듣게 되는 승객들의 대화, 부인에 대한 사랑, 식탁 위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 등 그의 하루를 구성하는 크고 작은 것들이 등장한다.
 
다시 말해, 그의 일상은 패터슨 씨의 눈과 감상을 거쳐 그대로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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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어낸 듯 같아 보이는 매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하게 다른 하루하루다. 직장 동료의 푸념이 조금씩 달라지고, 우연히 만난 사람과 대화하게 되고, 패터슨 씨와는 다른 성향을 가진 밝고 명랑한 아내의 일상에 포함되기도 하고, 근무 도중 오래된 버스가 멈추는 해프닝도 벌어지고, 키우던 강아지가 내 소중한 물건을 망가뜨리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난다.
 
나에게 일어났다면 오늘 일진 왜 이렇게 사나워, 했을 일도 카메라 렌즈를 거쳐서 인지, 패터슨 씨의 덤덤한 태도로 고요히 정상 궤도에 복귀하는 모습 때문인지 그렇게 큰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탓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꼭 봐야 할 것들을 놓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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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느슨한 끈으로 이어진 하루를 사는 것 같던 패터슨 씨가 넋이 나갔던 것은 그의 반려견이 시가 적힌 비밀노트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때였다. 영혼이 반쯤 나가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그에게 지나가던 일본인이 말을 건다. 패터슨 씨가 들고 있는 노트를 보고 패터슨 씨에게 시인인지를 묻지만 패터슨 씨는 그냥 빈 노트일 뿐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그 행인은 "때론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하고 말한다. 그렇게 패터슨 씨는 버스 운전기사에서 다시 시인이 된다.
 
내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어제와 다른 오늘에 기꺼이 즐거움을 느끼는 것.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 나만 가질 수 있고, 나만 경험할 수 있고, 나만 기록할 수 있는 온전히 나만의 삶에 대해 아끼고 보듬는 마음을 품을 때 비로소 삶은 예술이 되는 것 같다. 패터슨 씨의 일주일을 보고 나면, 그렇게 자주 잊게 되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하게 된다. '자,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자.'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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