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퀴어한 상상력을 향하여! - 언니밖에 없네 [도서]

언니밖에 없네
글 입력 2020.10.25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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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삶, 다양한 사랑, 다양한 선택’ 내 노트북 한쪽에 붙여둔 스티커다. 보라색 글씨를 괜히 쓰다듬고 속에 담아본다. 일부러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둔 이유는 계속해서 다양성에 대한 상상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 상상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세상이 제시하는 딱 하나의 방식밖에 떠올릴 수 없게 되어버릴까 봐. 우리의 상상력을 튼튼하게 하는 이야기에 계속해서 눈을 돌리고 싶다. 아니, 솔직히, 하루에 내가 하는 생각만 해도 수만 가지 방향으로 달라지는데, 사랑하는 방식이 딱 한 가지만 존재한다는 게 더 이상 하지 않아?

 

‘퀴어(queer)’

‘기묘한, 괴상한’이란 뜻으로 성소수자를 지칭한다. 애초 동성애자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으나, 현재는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모두 아우르는 말로 사용된다.

 

친구는 퀴어한 상상력을 삶에 적용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퀴어한 상상력’ 곱씹을수록 따뜻한 향이 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정답이라고 말하는 딱 하나의 모습만이 ‘정상’이라고 한다면 나도 기꺼이 ‘퀴어’한 방향성으로 흐르고 싶다. 곧고 빠르게 흐르는 길만이 ‘정상’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위에 구불거리게 길을 파고 돌을 놓고 싶다.

 

다양하게 흐르면서 우리 삶에 스며들고 싶다. 동성 결혼을 할 수도 있고, 3명이 함께 사랑을 할 수도, 여러 친구들과 공동 주거 공간을 꾸며갈 수도 있고, 아이를 혼자 키우거나 낳지 않을 수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세상에는 각자 지닌 저마다의 특성이 다르듯이, 그 수만큼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차례

사랑하는 일 • 김지연

아미 오브 퀴어 • 정세랑

깃발 • 정소연

엘리제를 위하여 • 조우리

가장 큰 행복 • 조해진

숨 • 천희란

나의 아나키스트 여자친구 • 한정현

 

 
큐큐퀴어단편선의 세 번째 책 《언니밖에 없네》가 출간되었다. 김지연, 정세랑, 정소연, 조우리, 조해진, 천희란, 한정현 작가가 참여했다. 여성 작가로 구성된 이번 작품집에는 우리가 ‘퀴어’라고 부르는 삶의 모습들에서 미래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함께하기 위해 오픈 릴레이션쉽을 시도해보는 여성 퀴어 커플(〈사랑하는 일〉), 인터섹스가 보편이 된 세상(〈아미 오브 퀴어〉), 항성 간 이주가 가능한 세계(〈깃발〉), 혈연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를 아끼는 조카와 이모(〈엘리제를 위하여〉), 계속되는 재난 속에서도 25년을 함께 한 남성 퀴어 커플(〈가장 큰 행복〉), 노년기 비혼 퀴어 여성의 고요하지만 단단한 삶(〈숨〉), 트렌스젠더 퀴어가 된 전 남자친구와의 새로운 시작(〈나의 아나키스트 여자친구〉) 등 신중하고 따뜻한 일곱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언니밖에 없네》는 7명의 여성 작가가 각기 다른 목소리로 퀴어한 상상력을 써 내려간다. 오픈릴레이션쉽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처음부터 떠나는 사랑을 시작해보기도, 인터섹스가 보편이 된 세상과 아이를 키우는 상상, 혈연이 아닌 가족, 남성 퀴어 커플, 비혼 퀴어 여성, 트렌스젠더 퀴어가 된 전 남자친구까지. 짧은 단편이지만 담백한 이야기들은 진하게 여운을 남긴다. 인물의 마음을 함께 헤아려보고 요동치는 감정을 함께 느껴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내 사랑을 상상해본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퀴어, SF, 전쟁소설. 정세랑의 <아미 오브 퀴어>를 장르로 나눈다면 저 단어들이 수식어가 될까. 미래의 세상, 도시 국가를 이루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근대 시대로 돌아가려는 시코드 시티는 ‘발전’ ‘혁신’ 등의 단어를 뱉어내며 전쟁을 선포한다. 퀴어한 전쟁은 어떤 모습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조차 거부감을 느끼지만 어쨌든 이 전쟁에서 질 수 없다. 이런 불가피한 상황에서 퀴어한 전쟁을 표현하는 방식이 재밌다. 마취 총과 태풍, 알록달록한 의자들은 내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이 나오게 했다.

 

다들 캠핑 의자에 의자를 펼치고 모여 앉아 시간을 죽였으므로, 그리고 그 캠핑 의자가 알록달록했으므로 분위기는 더욱 전쟁같지 않아졌다.

정세랑 <아미 오브 퀴어>, 61쪽

 

연천의 AI는 무기 설계에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는지 연합 도시에서 다수 채택한 설계도를 받아 쓰기로 했다. 결과물은 세 종류의 마취 탄환을 쏠 수 있는 총이었다. (…) 방아쇠를 당기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 훈련은 쉽지 않았다.

정세랑 <아미 오브 퀴어>, 56~57쪽


김지연의 <사랑하는 일>은 퀴어 커플과 가족, 그 사이에 오가는 말들에서 우리의 연결점들을 느끼게 한다. 공감되는 대사들이 마치 옆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소연의 <깃발>은 이주와 그 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회사. 그리고 떠나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유나. 3명이 함께 사는 삶과 이주에 대해 잔잔히 생각하게 한다. 조우리의 <엘리제를 위하여>에서는 나의 포근한 동굴을 떠올려본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원하고, 그리고 공간에서 안전한 말들을 나누고 싶은 이들이 모이는 엘리제를.

 

조해진의 <가장 큰 행복>에서는 공항 노동자로 만나 25년간 함께 한 게이 커플의 이별하는 날을 담담하게 담는다. 천희란의 <숨>은 청소 노동자로 살아가는 60대 해옥과 70대 정희의 이야기를, 쓸쓸하고 고독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은 문장들로 들려준다. 한정현의 <나의 아나키스트 여자친구>는 트렌지션을 한 전 남자친구 이수호를 만나러 간다.

 

《언니밖에 없네》의 7편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더욱 튼튼하게 한다. 생각의 흐름을 더욱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더욱 끈끈하게 연결되게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계속 울고 웃고 보듬고 껴안을 것이다.


페페는 엘리제를 동굴이라고 표현했던 혜주의 말을 떠올렸다. 페페도 그 표현에 공감했었다. 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 페페가 말하고 싶은 동굴은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숨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냥, 좋아서, 모여있고 싶은 곳이었다.

조우리 <엘리제를 위하여>, 136쪽


“저는요. 소문내고 싶어요. 점심으로 맛있는 우동을 먹어도 소문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에요. 길 가다 귀여운 고양이를 만나면 소문을 내는 게 인지상정이라고요. 근데 우리 은호 좀 보세요. 얼마나 귀여워요. 아버님도 거기 앉아서 계속 본인 자랑만 하셨잖아요. 뭐 별 대단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저도 동네방네 소문내고 자랑하고 싶어요. 동네 사람들 다 모아놓고 잔치라도 열었으면 한다고요. 다들 그렇게 하면서 살잖아요. 근데 저희가 남들 은 다 하는 그 잔치 열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어디 광고할 것도 아니고요. 그냥 거짓말 안 하고 살겠다는 거예요.”

김지연 〈사랑하는 일〉, 9~10쪽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내 몸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감지하며 그에게 소식을 전할지 말지 고민하게 될 그 순간에 나는 오늘을 후회하며 떠올릴 것인가, 아니면 깊이 안도하며 되새기게 될 것인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확답하지 않았고, 대신 행복했다고, 함께하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행복했다고 대꾸했다. 그가 웃었다. 아니, 거의 웃는 듯했다. 나는 그가 어떤 감정 상태로 우는 듯 웃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웃고 싶고 울고 싶은 마음이 한데 섞일 수도 있는 거니까, 하나의 마음으로만 한 사람을 겪지는 않을 테니.

조해진 〈가장 큰 행복〉, 166~167쪽


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수호를 놓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전혀 아니었다. 수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던 거다. 나는 남성을 사랑하는 헤테로 여성이었던 것이다. 수호가 성별을 바꾸었다고 수호가 아닌 사람이 되는 건 아닌데 난 왜 수호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이 두 가지는 끝없이 나를 괴롭혔다.

한정현 〈나의 아나키스트 여자친구〉,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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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김지연 장편소설 《빨간 모자》가 있다. 

정세랑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보건교사 안은영》, 《이만큼 가까이》, 《피프티 피플》, 《시선으로부터,》와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목소리를 드릴 게요》가 있다. 

정소연 소설집 《옆집의 영희 씨》와 중편소설 《이사》가 있고, 옮긴 책으로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어둠의 속도》, 《다른 늑대도 있다》, 《허공에서 춤추다》 등이 있다. 

조우리 소설집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과 경장편소설 《라스트 러브》가 있다. 

조해진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여름을 지나가다》, 《단순한 진심》과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 《빛의 호위》가 있다. 

천희란 지은 책으로 소설집 《영의 기원》과 경장편소설 《자동 피아노》가 있다. 

한정현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와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가 있다.

 

 



[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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