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보다는 커피 마시는 그 시간이 더 좋은 거겠지”
9시 수업을 들으려 일찍 학교로 향한 날에도, 근로장학생으로 근무할 때도, 사이버 강의를 듣는 지금도 늘 아침에는 커피를 한잔 마신다. 큰 플라스틱 컵에 얼음을 가득 채워 나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대학생의 포션(물약)’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흔하고 상징적인 음료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단 음료가 아니면 마시지 않았지만, 이제는 생존을 위해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보았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만성적인 피로로 어깨가 무거워져 가는 와중에 눈을 부릅뜨기 위해 커피를 마시기도 하지만, 음료는 여유로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각성의 효과만 있을 뿐 정작 생존에 필요한 허기를 달래는 데는 별로 효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피곤한 순간이라도 음료를 마시던 때의 기억은 비교적 좋은 편이다. 뭔가를 마시고 있으면 바쁘게 달리던 트랙을 벗어나 바깥의 세상을 슬로우 모션으로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시간 블렌딩>은 잠시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며 떠오른 단상으로 채워진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보낸 시간의 단위를 커피나 카페의 음료 이름으로 호명한다. 금요일은 패션프루트, 오전은 아보카도, 여름은 모히토로, 그렇게 새로운 이름과 의미를 얻는다.

사진 위에 그려진 독특한 문양의 그림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프랜차이즈 카페의 익숙한 풍경은 전통 무늬와 단색의 그림으로 개성을 얻는다.
이 무늬들은 유물을 촬영하는 저자의 직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예상해본다. 판화처럼 반복되는 작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을 관찰하고 자신의 눈으로 자유로이 해석하는 책의 방향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음식이 아닌 음료로 시간을 재조직하고 일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발상이 신선하고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내가 음료를 마시던 순간들로 지나온 시간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당시 새벽부터 늘어선 줄로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던 블루보틀 커피를 여행 중에 마셨던 때가 떠올랐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여행 일정이 비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때, 블루보틀에서 카푸치노를 사서 The Broad라는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예약하지 않아 오픈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는데, 겨울에도 뜨거웠던 LA의 햇살과 달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카푸치노의 맛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가격에 비해 깜짝 놀랄 만큼 유의미하게 맛이 있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많이 마신 커피는 학교 후문 앞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8시 40분경 지하철역에 도착해 카페로 가면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학생들과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빠르게 나온 커피를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시면, 몸에 붙어 있던 지하철의 답답한 숨이 조금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후문을 가로막은 큰 언덕을 숨이 차게 오르지만, 커피를 들이켜며 눈알을 자꾸만 위로 굴리곤 했다. 그 짧은 여유가 숨통을 트이게 했던 것 같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 계정을 운영하며 사진을 많이 찍게 되었다. 별것 없는 일상까지도 소비되는 콘텐츠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조금은 씁쓸하지만, 나의 시간을 기록하는 일이고, 글감을 모으는 일이라 생각하면 마냥 내 일상이 상품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음료를 마시고 자리를 떠나 다른 일을 했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모은 기록으로 이렇게 책을 만들기도 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엮어갈까를 고민해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