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존의 문법들을 모조리 뒤엎다, 연극 '웃기는 어둠'

대중을 향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과감한 노크
글 입력 2020.10.2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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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씨는 바바리를 걸치고 흐린 봄날 / 서초동 진흥아파트에 사는 시인 이승훈 씨를 / 찾아간다 가방을 들고 현관에서 벨을 누른다 / 이승훈 씨가 문을 열어 준다 그는 작업복을 / 입고 있다 아니 어쩐 일이오? 이승훈 씨가 / 놀라 묻는다 지나가던 길에 들렀지요 그래요? / 전화라도 하시지 않고 아무튼 들어오시오 / 이승훈 씨는 거실을 지나 그의 방으로 이승훈 씨를 / 안내한다 이승훈 씨는 그의 방에서 시를 쓰던 / 중이었다 이승훈 씨가 말한다 당신이 쓰던 시나 / 봅시다 이승훈 씨는 원고지 뒷장에 샤프 펜슬로 / 흐리게 갈겨 쓴 시를 보여 준다 갈매기, 모래,/벽돌이라고 씌어 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오? / 이승훈 씨가 황당하다는 듯이 이승훈 씨에게 / 묻는다 갈매기는 강박관념이고 모래는 환상이고 / 벽돌은 꿈이지요 뭐요?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 아닙니다 틀렸어요 갈매기는 모래고 모래는 / 벽돌이고 벽돌이 갈매깁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게 / 아닙니다 바다는 갈매기가 아닙니다 그건 모래가 / 벽돌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벽돌은 바다가 / 아니니까요 바바리를 걸친 이승훈 씨와 작업복을 / 입은 이승훈 씨가 계속 싸운다 마침내 화가 난 / 이승훈 씨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 좋아요 좋아! 그는 문을 쾅 닫고 사라진다

 

- 이승훈 <밝은 방>, 고려원, 1995

 


읽다 보면 멀미가 날 것 같은 위 시는 국내 해체시로 유명한 '이승훈' 시인의 시 '이승훈씨를 찾아간 이승훈씨'이다.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장석주)'에는 해체시를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 있다.

 

 
파괴와 일탈의 자아로부터 불거져 나오는 탈규범의 반형식, 해체시.
 
 
조금 쉽게 말하자면 기존 규범을 아예 뒤엎어버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갈래인 해체주의에 속하는 시의 양식이다. 그런데 이 시와 비슷한 연극이 대학로 한 복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는가. 놀랍게도 이 황당한 낱말의 나열 같은 시와 비슷한 연극 <웃기는 어둠>이 대학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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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온도 체크를 마치고 까만 리본을 티켓 대신 팔목에 두른 뒤 어두컴컴한 극장에 앉아있는데 꼭 잠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연극의 내용도 꼭 뒤죽박죽 섞인 꿈같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로 말이다.
 
공연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로 진행된다.
 
1. 먼저 소말리아 해적 한 명이 한국 법정에 서서 자신이 왜 배를 침략해야 할 수밖에 없었는지 변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은 원래 친구와 함께 산 '희망'호를 타고 어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한국 등 다른 나라의 불법 조업으로 물고기의 씨가 말라 결국 유명 대학에서 '해적학'을 전공 한 뒤 해적질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도 안 되는 변론은 너무도 진지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진짜 해적학 전공이 있나?' 하는 의문을 들게 할 정도다.
 
그는 해적학 전공 후 친구와 첫 임무로 침략한 한국 배에서 잡혀 법정에 서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며 그와중에 자신의 친구가 죽어 너무도 큰 상처를 받았음을 눈물로 호소한다. 그의 호소는 스토리텔링이 분명하고 진지해서 범죄를 저질러 잡혀온 그의 입장이 이해가 갈 정도이다.
 
2. 이야기는 아예 바뀌어 시간과 공간이 불투명한 곳에서 특수전사사령부의 상사와 하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상사는 아프가니스탄 밀림에서 함께 간 동료 두 명을 살해한 혐의로 수배 중인 중령을 찾아야 하는 임무를 안게 되었는데 탈북민 하사에게 중간에 중령의 얼굴을 그려 간접적으로 하사에게 임무를 알려주기는 하지만 본 임무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둘은 밀림으로 가던 중에 전혀 미개하지 않고 당연한 행동을 하는 원주민들을 '미개하다'고 하는 일본인 중령을 만나게 되고, 또 가족들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강하게 믿고 있는 방문 판매상을 만나기도, 또 원주민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구원을 알려주겠다고 왔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더러운 사랑을 원하는 종교인을 만나기도 한다.
 
하사는 논리나 이성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연속해서 만나다가 미쳐버린 것인지 손에 든 과일을 쪼개고 과육 속에서 자신이 살던 집과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현장을 발견한다. 상사는 하사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윽박지르듯 그것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한다. 둘은 계속해서 어둠 속을 헤쳐가고 상사는 하사를 총으로 쏘고 싶다는 마음을 느낀다.
 
3. 장면은 아예 바뀌어 누군가 방에서 휴대폰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를 확인하고 있다. 그는 아마 이 극의 작가인 모양인데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을 고민하고 그러다 갑자기 아버지와 채소로 배나 기차를 만들며 즐거워한다. 그러는 와중에 살려달라는 하사의 애원이 들리고 장면은 다시 상사와 하사가 있는 밀림으로 바뀐다.
 
무뚝뚝해 보였지만 하사가 사라진 뒤 패닉 상태였던 상사는 하사를 발견하고 화를 낸 뒤 둘은 함께 밤을 보낸다. 다음 날 그들은 애타게 찾던 군인을 마주한다. 누구보다 정신병자일 것이라 생각했던 중령은 그러나 누구보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목소리로 자신이 왜 함께 간 두 명의 군인을 죽여야 했는지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는 함께 간 두 명의 군인들과 24명의 적을 죽여야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은 사람을 더 많이 살리려 군인을 자처한 그의 가치관에 반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과 함께 간 두 동료를 죽이는 것으로 신념을 지켜냈다고. 그의 이야기들을 듣고 하사는 중령 옆에 앉고 상사는 돌아간다. 갑자기 중령은 이 극의 작가가 되어 극의 결말을 어떻게 낼 것인지 고민하고 하사는 자신이 사실은 없었던 배역이었음을 이야기한다.
 
혼자가 된 상사는 어둠 속에서 미친 듯이 웃고 처음 등장했던 소말리아 해적을 보게 된다. 소말리아 해적은 계속해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상사는 그를 총으로 죽인다. 그리고는 작품 중반에 그린 중령의 몽타주를 이어 범죄 현장에 자주 등장하는 전신 라인을 그려 그림을 완성하며 극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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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이고 맞다고 생각한 모든 '이성(理性)'들이 전복되고 해체되는 순간

  

극이 워낙 난해하고 전위적이어서 보는 이들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는데 필자는 이 극의 캐릭터들도 그리고 형식도 모두 기존의 것을 뒤엎고 의심하게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닮아있다고 해석했다.

 

 

포스트 모더니즘 (탈근대주의)

 

철학사조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폭 넓은 회의주의·주관주의·상대주의적 특징을 보이며, 이성에 대한 총체적 의심이자 정치·경제적 권력을 유지·주장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다.

 

 
먼저 배역들로만 보자면 우리가 직접 접하기 전 이름으로만 들었을 때 정상적이며 이성적이고 논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캐릭터들은 한결 같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이야기만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인 중령, 방문 판매상, 선해 보이는 종교인 등 밀림을 탐험하는 중간에 도움을 줄 것처럼 나타난 모든 이들은 다들 미친 것처럼 보이는 말만을 해댄다.
 
반면 소말리아 해적이나 앞서 정신병으로 동료 두 명을 살해했다는 설명의 중령 등 이름만으로도 거부감을 주는 배역들은 의외로 굉장히 논리적이다. 그 둘의 어쩔 수 없는 스토리에 관객들은 빠져들게 된다. 특히나 상사와 하사가 계속 찾아 헤매는 중령 같은 경우 도대체 얼마나 불가사의하고 돌아버린 인물이 나올지 기대가 되는데 결국 그는 자신만의 신념을 사람일 뿐이었다.
 
즉 인물들로만 보아도 우리가 흔히 정상적 이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모순되고 위선 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과 흔히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자보다 훨씬 이성적일 수 있다는 극의 설정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는 듯하다.
 
둘째로 연극 자체의 형식이 기존의 연극 문법을 완전히 엎어버렸다. 이야기의 진행을 따라가려고 하다 보면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나중에는 그냥 꿈속에 들어와 있는 듯이 비논리적인 일들을 그저 받아들이게만 된다. 그만큼 극은 앞뒤가 맞지 않고 기승전결이 없으며 인과관계가 부정확하다.
 
또 보통 연극을 볼 때 허구의 이야기임을 감안,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보게 되는데 고무줄처럼 예기치 않게 그 거리감이 너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한다. 일례로 극의 배역들은 갑자기 그 배역에서 벗어나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기도 했다가 자신의 배역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작품 내적인 요소와 외적인 요소가 붕괴되며 완전히 섞여버리는 현장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마지막의 사건 현장과 같은 죽음의 표시는 우리가 이성이라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의 죽음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해석되었다.
 
 
 
대중을 향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과감한 노크

 

"이거, 연극 처음 보는 사람들이 보면 큰일 나겠는데?"
 
이렇게 전위적인 연극일 줄 모르고 함께 연극을 보러 간 지인에게 당혹감을 드러냈더니 지인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어려운 연극을 시도한 게 오히려 감동적일 만큼 과감했어"
 
지인에 말에 당혹감을 가졌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의 말처럼 이런 시도 자체가 가능한 것이 멋졌다. 다만 독일 원극의 느낌을 살리고 싶어 번역체를 그대로 썼다는 것은 좀 아쉬웠다. 우리 정서에 좀 더 맞게 다듬어졌다면 훨씬 받아들이기 수월했을 것 같다.
 
어찌 되었든 대중을 향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과감한 노크를 응원한다. 그로 인해 연극계에도 다양성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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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사진은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오르는 나체'로 본문과는 무관하다.

 

 



[이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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