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연 있는 악역이 끌리는 이유 [TV/드라마]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글 입력 2020.10.1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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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중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생을 걸어본 자가 있거든 나서거라. 내 그자의 칼이라면 받겠다.

 

- 군도 (2014)

 

 

극 중 백성들을 착취하고 온갖 악행을 일삼던 ‘조윤(강동원 분)’이 성난 군중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전반부에는 조윤의 비인간적 면모에 집중되었던 영화는 후반에 갈수록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에 집중되었다.

 

그렇다고 조윤의 행동이 정당화된 것은 아니다. 결국 의적 도치(하정우)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고 백성들은 기뻐했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들은 조윤을 소위 ‘매력적인 악역’이라고 평가했다. 주인공 도치조차도 조윤의 핏줄인 조카를 거두어주며 어느 정도의 연민을 보인다. 만약 조윤이 서출이었다는 것과 아버지에게 천대받은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관객은 그를 동정하였을까? 아닐 것이다.

 

이처럼 사연 있는 악역에게 사람들은 ‘공감’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동정’을 느낀다. 악역이 악하게 변화하게 되는 상황이 없었더라면 그 또한 선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조윤이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부잣집에 데려가지지만 않았어도, 그는 도치의 편에 서서 또 다른 탐관오리에 맞섰을지도 모른다. 이는 악역이 먼 존재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만들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즉, 악역의 악행을 욕하는 관객 스스로 ‘어쩌면 나도 특정한 상황 속에서 악해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갖도록 만든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내면에 잠재된 인간성이 사연을 가진 악역 또한 단지 불완전한 우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제 영화에서는 차갑고 매정해 보이던 조윤이 끝까지 자신의 조카를 지키다 죽는 장면이 나온다. ‘더러운 땅에 연꽃이 피는 것은 신의 뜻인가, 아니면 연꽃의 의지인가’ 조윤의 독백은 그도 감정 없는 괴물이 아닌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현실에서 아무런 사연 없이 눈 깜짝 않고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보다는 영화 속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악인이 더 마음에 와닿는 것이다.

 

 

 

 

“엄마도 힘들어요?” “엄마가 미안해...”

 

- 스카이캐슬 (2018~2019)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던 스카이캐슬 김주영 (김서형 분)의 대사이다. 드라마 초~중반, 시청자들은 김주영이 대체 왜 저런 악행을 일삼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냥 교육열과 명예에 집착하는 평면적 인간인지, 충분히 눈길을 사로잡는 캐릭터였지만 그녀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후반부에 김주영에게도 사연이 있음이 밝혀진다. 그녀는 지위와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딸을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이후 딸은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자폐 증상을 앓지만 수학 공식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이유가 드라마에 명백히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시청자들은 이러한 열등감과 그에서 비롯된 회피 의식 때문에 캐슬의 다른 사람들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김주영의 사연을 ‘이해’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녀를 ‘연민’하게 된 것은 딸을 붙잡고 미안함을 고백하는 장면 이후부터였다. 잔혹하리만치 냉정하고 굳셀 것만 같던 김주영은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장면에서 시청자는 그녀를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던 악인’에서 ‘악행을 저질렀지만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느끼는 악인’으로 인지하게 된다. 따라서 그녀를 용서할 수는 없어도 안타까워한다. 비로소 우리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이제 드라마에서 강력한 절대 악인보다 평범한 사람이 악행을 저질렀을 때 악역으로 묘사되는 것에 더 동요한다. 드라마 비밀의 숲 시즌 1의 경우는 ‘사연 있는 범인’, ‘사연 있는 악역으로 보였던 선인(사실 선인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갈린다)’, ‘사연 있고 밉지 않은 악역(이마저도 악의 축이라고 할 수는 없다)’이 등장한다. 대놓고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인데 사연이 있다’라고 하기보다 ‘평범했던 사람인데 악역이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던’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사연마저도 ‘아, 그런거면 이해할 수 있지’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범죄라는 사회적으로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이 드라마에서 악역을 꼽으라고 하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사연 있는 악당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들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처음부터 악역이었던 것은 아니다. 각자 놓여있는 삶의 맥락 속에서 버텨내고자 악함을 택했고, 그런 그들이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때마다 결국은 이들조차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경중의 차이일 뿐, 사연 없는 삶이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연 있는 악당에 더 공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향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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