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포스트 코로나, 이제는 새로운 미술을 기대할 때 [시각예술]

퍼포먼스 예술가 브루스 나우먼의 궤적을 밟아보며
글 입력 2020.10.1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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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데믹 시대의 퍼포먼스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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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데믹 시대의 미술관 전시는 여러 측면에서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코로나 19 발생 이후로 1년 가량이 흘러간 지금, 결코 안정 궤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많은 미술관들은 나름의 대안책을 찾아나가고 있다. 크지 않은 전시 공간의 경우 안전수칙을 지키며 전시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정 규모 이상의 미술관들은 VR전시나 온라인 중계 등을 통해 전시실의 전경을 온라인상으로 옮기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마로에빅이 박물관의 세 가지 기본 기능을 보존과 연구, 그리고 '소통'으로 정의한 만큼 미술관의 전시 역시 가시적인 이미지의 제공으로만 완성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관람객의 상호 작용은 온라인 전시에서 언제나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타격이 큰 것은 관객의 참여가 작품의 의미를 완성시키는 유형의 미술이다. 동시대 미술관에서 이러한 유형을 대표하는 것은 단연 인터랙티브 아트나 퍼포먼스 아트라고 할 수 있다. 펜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현재의 위기는 꽤나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새로운 방안은 어쩔 수 없이 모색되어야 한다. 시간 예술이라는 점에서 퍼포먼스 예술과 궤를 같이하는 연극 등의 공연 분야를 보면, 이들은 많은 경우 온라인 생중계 등으로 활동 장소를 변경했다.

 

그러나 퍼포먼스 예술의 경우 일반적인 공연과는 달리 온라인상으로 실연되기에 여러 가지 제약을 갖는다. 퍼포먼스 예술의 시작이었던 6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퍼포먼스 장르만의 특성이란 재현되거나 기록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생생한 퍼포먼스 현장 속에서 발화되는 작가와 감상자 사이의 신체적 상호작용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퍼포먼스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퍼포먼스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들은 현 시점에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문득 최근 전공 수업 시간에 다뤘던 작가 브루스 나우만을 떠올렸다. 퍼포먼스 예술의 초기 단계에서 활약했던 그의 궤적을 밟아가다 보면, 새로운 소통 방식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브루스 나우만, 스튜디오 퍼포먼스의 시작


 

브루스 나우만은 20세기 말 퍼포먼스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스스로의 신체를 작품의 재료 삼아 시도했던 여러 가지 실험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한 실험 자체는 60년대 초반에 등장한 전형적인 퍼포먼스 예술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퍼포먼스는 주로 홀로 진행되었으며 스튜디오에서 영상으로 녹화되었다는 점에서 조금 다른 관점을 필요로 한다. 그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5년 플럭서스 그룹의 일원이었던 백남준은 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였던 소니사의 포터팩이 출시되자 그것을 구입해 최초의 비디오 작품을 제작했다. 비디오카메라는 시간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예술의 판도를 뒤집었다.

 

이렇게 백남준을 선두로 예술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된 비디오카메라는 퍼포먼스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행위를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디오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나우만을 비롯한 스튜디오 퍼포먼스 예술에서 비디오라는 매체는 단순한 기록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마이클 러시의 저서 <뉴미디어 아트>에 따르면, ‘나우만은 관객과 상호작용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 말뜻은 무엇일까?

 

마이클 러시의 글을 계속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의 퍼포먼스는 사적인 일이자 자신들의 스튜디오에서 한 연습이어서 녹화되기는 했으되 꼭 대중 앞에서 상영될 필요는 없었다. (중략) 조각이나 회화처럼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오브제 대신, 예술작품을 만드는 육체적 과정 자체가 작품이 되었다. 비디오카메라는 ‘타자’ 또는 관객을 의미했으며, 전통적인 예술 작품 제작이라는 속박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도구기도 했다.”

 

- 마이클 러시, <뉴 미디어 아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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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uce Nauman, Art Make-Up: No. 1 White, No. 2 Pink, No. 3 Green, No. 4 Black, 1968

이미지 출처 - MoMA Learning

 

 

러시의 이 설명은 나우만의 영상 작업들 속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트 메이크업>(1967-1969)에서 작가는 자신의 얼굴에 흰색, 붉은색, 녹색의 물감을 계속해서 덧바른다. 여러 가지 색깔이 섞여버린 결과 그의 얼굴은 검은색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가리고 지워버리는 은유적 행위인 셈이다. 이때 그는 자신의 얼굴과 신체를 캔버스처럼, 즉 작품의 재료처럼 취급한다.

 

이것은 마치 모더니즘 미술의 보수성으로부터 예술가를 해방시키려는 몸짓 혹은 예술가로서의 자아에 대한 고민처럼 다가온다. 이때 그의 행위가 담기는 비디오 영상은 그의 행동을 기록하고 또 독립적인 작품으로 분리시킬 뿐, 관람자의 특정한 반응을 요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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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uce Nauman, Walk with Contrapposto, 1968

이미지 출처 - MoMA

 

 

비슷한 사례로 또 하나의 작품을 보자. 이 작품은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걷기>(1968)로, 영상에 등장하는 나우만은 뒷모습을 보인 채 고전적인 인물 조각을 연상시키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유지하며 길고 좁은 복도를 지나간다. 콘트라포스토란 한 쪽 무릎을 구부리고 체중이 반대편 엉덩이에 실린 자세로 고전고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상에서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수되었던 자세이다.

 

그러나 영상 속 뻣뻣한 그의 움직임은 더없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미를 상징하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극단적으로 왜곡해 그 형식성을 파괴하려는 듯 보인다. 이 작품에서 비디오카메라는 마치 CCTV처럼 그의 모습을 말없이 감시하며 작품 속의 불안한 분위기에 일조한다. 이 또한 <아트 메이크업>과 마찬가지로 비디오카메라가 소통의 수단보다는 철저한 타자로 설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기록된 퍼포먼스에서 관객 참여형 설치 미술로


 

그러나 70년대 초부터 그는 비디오 장치와 결합된 설치 작업을 시작한다. 이는 영상으로만 제시되었던 그의 이전 작품과는 상반되는 모습인데, 관람자의 직접적인 참여가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 중에서도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선보인 바 있는 <녹색 빛의 복도>(1970)에서는 앞서 설명한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걷기> 속 복도가 다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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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uce Nauman, Green Light Corridor, 1970

이미지 출처 - 구겐하임 미술관

 

 

그리고 그곳을 통과하는 행위가 관람자의 몫으로 전환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녹색 조명빛 아래의 복도는 한 사람이 겨우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녹화되고 있는 비디오 복도>(1970)에서는 실제 CCTV가 개입한다. 관람자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는 비디오카메라의 녹화 영상은 복도 건너편의 모니터에서 실시간으로 재생된다. 따라서 관람자는 복도의 맞은편에 가까워질수록 모니터 안에서 점점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관람자는 자신의 실체와 모니터 속 이미지 사이의 괴리를 겪게 된다.

 

그렇다면 나우만이 60년대에 비디오를 이용해 스튜디오 퍼포먼스에 도전하고, 70년대부터 설치 작품으로 작업방식을 확장했던 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논문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의 작품에 나타난 ‘신체’의 의미: 비디오 작업을 중심으로」에서 저자 김진아는 나우먼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그가 시도했던 비물질적 미술의 가능성, 곧 난해한 퍼포먼스 예술은 당시 통념상으로는 미술관에서 시도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즉 그가 60년대에 비디오카메라로 퍼포먼스를 녹화하기 시작한 데에는 당시 미술계의 보수적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우만이 70년대에 들어서자 관람객의 특정한 반응을 일으키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새롭게 집중했던 까닭으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는 당시 게슈탈트 심리학에 관한 책과 다양한 물리적 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행동 유형들을 연구한 엘리야스 카네티의 저서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나우먼은 한 인터뷰에서 그러한 책들이 작품의 방법적 측면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

 

앞서 살펴본 내용들을 바탕으로 내가 내리고자 하는 결론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한 예술가가 노선을 변경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주변 환경이 될 수도 있고 개인적인 관심사가 될 수도 있다는,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야말로 혼란에 빠진 동시대미술계에서 앞으로의 방향성을 시사할 수 있다고 본다.

 

퍼포먼스 예술은 대부분 현장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이벤트로 여겨진다. 그러나 브루스 나우만의 시도처럼 비디오카메라라는 하나의 매체가 개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장르가 될 수 있다. 물론 퍼포먼스의 본질은 공유하고 있지만 비디오를 타자로 상정하며 관람객과의 생생한 소통보다는 다소 일방향적인 전달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당시의 여러 상황들을 반영한 결과였다.

 

그리고 현재의 특수한 상황에 이를 대입해 보자. 지금의 위기는 오히려 새로운 방식의 예술로 이어질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화위복' 등의 어구가 다소 진부할지라도, 전례 없는 펜데믹과 우리의 일상이 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서 새로운 방식의 예술이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 지금껏 당연시했던 대면 소통에 제동이 걸린 상황에서, 기존의 소통 방식을 온라인상으로 옮기는 데 급급해 하기보다는 새로운 예술의 등장을 기대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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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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