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사랑, 나르시시즘 [시각예술]

글 입력 2020.10.1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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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ee." 초등학교 때 배웠던 문장이다. ‘보다’라는 동사를 사용했지만 ‘알았어.’로 해석하라고 배웠더랬다.
 
우리는 보면 이해한다 믿는다. 한국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백번 글로 읽느니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던가, ‘너 거기 가봤어? 그거 해봤어? 노래 들어봤어?’ 등 ‘보다’라는 단어는 항상 이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사람도 그러한가? 그리고, 사랑도 그러한가? 오늘, ‘시선’과 ‘사랑’에의 사색에 여러분을 초대하고싶다.
 
 
 
신화 속 에코와 나르시스

 
에코와 나르시스도 함께 초대하자. 나르시스 신화는 몇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에코가 함께 등장하는 버전이 필요하다. 에코는 익숙하다. 노래방 에코 효과나 메아리라는 우리말도 있지 않은가. 왜 그녀의 이름이 메아리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는지는 그녀의 뛰어난 화술과 아름다운 노래 실력에 따른 불운이었다고 할까.
 

그리스의 신들은 정력이 넘친다. 에코가 두 번 다시 대화하고 노래할 수 없게 된 것은 제우스의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다. 아내인 여신 헤라는 그 날 아마 남편의 불륜 현장을 잡아내려 혈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 때 헤라를 막아선 것은 에코. 에코는 세치 혀로 헤라의 관심을 자신에게 끌어 모아, 제우스가 거사(!?)를 치를 시간을 벌어주었다. 분노한 헤라는 이에 저주를 내린다.

 

“이제, 넌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오직 타인의 마지막 말만을 반복하게 되리라.”

 
사랑은 타이밍이라던가. 에코는 이 저주를 받은 뒤, 나르키소스를 조우한다. 불길한 타이밍이다. 나르키소스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에 빠트리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에코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터. 문제는 이 애타는 마음을 전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짝사랑을 멀찍이 바라만 보고 있던 에코에게 순간 기회가 왔다. 사냥 중 동료와 길이 엇갈린 나르키소스가 숲에 대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드디어 나르키소스가 말문을 여는 그 첫 순간!
 
 

[크기변환]John_William_Waterhouse_-_Echo_and_Narcissus_-_Google_Art_Project.jpg

 

 

“야! 네가 안보여! 너 어디냐!”
“...너 어디냐!”
의지와는 달리 그의 끝말만 따라하고 있는 자신의 입술을 바라보는 에코의 마음은 얼마나 속이 탔을까.
 
“아!? 너구나! 나 여깄어!”
“...나 여깄어!”
비극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뭐라는거야!? 그냥 너 오지마!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
“아니, 내가 간다고! 거기 있으라고!!!”
“... 있으라고”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야속하게 끝말만 반복하며 오해가 커지자 답답함을 참지 못한 에코는 어두운 숲속에서 확 튀어나와 나르키소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화들짝 놀란 나르키소스는 불쾌함에 에코를 거칠게 던지듯 밀쳐내며 참... 가정교육 못 받은 것 같은 말들을 퍼붓는다.
 
“너 뭐야? 아 진짜, 이건 또 뭐야. 다들 나만 보면 날 사랑해.”
“...날 사랑해.”
“아, 뭐야!? 널 사랑하느니 내가 차라리 죽고 말지. 내가 죽으면 그때서나 내 옆에 눕던가.”
“...내 옆에 눕던가.”
“와... 뭐야 이여자.. 날 좀 내버려 둬!!”
“...내 버려 둬.”
 
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참한 저주인가. 매몰차게 사랑을 거절당한 에코 역시 우리네가 실연 후 겪는 모든 후유증을 경험하는 걸 보니 요정도 별수 없나보다. 단지, 우리는 가슴 아파도 밥은 먹고 살지만, 에코는 식음을 전폐하여 육체가 소멸하고 말았다. 저주받은 '메아리'만 남은 채.
 
 

131.jpg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덜 비극이었을 것을,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정의의 이름으로 나르키소스를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에게 내려진 저주는
 
“그는 오직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것이나,
그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으로 죽음에 이르리라”
  
비로소 이 지점부터 우리가 모두 아는 유명한 이야기다. 연못의 물을 마시려 몸을 숙인 순간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물그림자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슬프게도 에코의 메아리는 또 한번 비극을 향한 마지막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만다. 그녀의 목소리는 계속 나르키소스 곁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넌 너무 아름답구나.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반복적으로 만져도 보고, 안아도 보지만 물그림자가 그를 다시 안아줄 리 없다. 허나 내 사랑 고백에 대답은 계속 해주지 않는가? 이것이 에코의 메아리인 줄 알 리 없는 나르키소스는, 줄 듯 말듯한 사랑에 메말라간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결국 그 물그림자가 자신의 환영인 것을 깨닫고, 사랑에 시들어 삶을 마감한다.
 
 

[크기변환]freud_narcissus.jpg

 

 
 
엇갈린 시선, 그리고 자기애적 사랑

 
자 이제, 위의 그림들에서 공통적으로 우리는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선’이다.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환영을 바라본다. 헌데 내가 바라보는 대상은 나를 대응하여 바라보지 않는다.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그림은 아마도 마지막 프로이트의 그림이 아닐까 한다. 프로이트는 나르키소스의 환영 부분에서 아예 눈을 그리지 않았다.
 
우린 이 그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기애적 시선의 보편성을 읽어낸다. 나르키소스만 자기애적 사랑을 한 것이 아니다. 에코 역시 자기애적 사랑을 하였다. 상대방을 내 관점에서만 바라보다보니 나는 그를 보고 있으나, 동시에 진정으로 보고 있지 않다. 나의 관점을 투사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정말 사랑일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단연 카라바조가 그린 나르키소스이다.
 
 

[크기변환]300px-Narcissus-Caravaggio_(1594-96)_edited.jpg

 
 
그런데 이 그림엔 에코가 등장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그림처럼 눈을 아예 그리지 않는 방식으로 명백하게 시선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 역시 ‘보는 행위’에 대한 해석을 끌어낼 수 있다.
 
나르키소스는 일단 자신의 외모에 반한 사람이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이 그림에서 가장 광원을 많이 받고 있는 부분은 얼굴이 아니다. 잘 살펴보라. 무릎이다! 생뚱맞게도 무릎이 가장 빛을 많이 받고, 그림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정말 빛나고 의미 있는 것이 저렇게 가운데 떡 하니 있어도 본질을 알아챌 줄 모른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젠 자신의 물그림자를 바라보는 나르키소스의 자세를 함께 보자. 사랑에 사로잡혀, 환영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 한껏 구부려진 팔은 그림자에 비친 팔과 함께 둥근 원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원 한 가운데, 밝게 빛나는 무릎이 있다. 하나의 눈동자 같지 않은가? 무릎은 밝게 빛나는 동공이고, 팔로 인해 만들어진 원 안의 어두운 심연은 홍채인 듯만 하다.
 
이 그림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눈이 아닐까. 작가는 이 눈을 통해 제대로 바라볼 줄 모르는 나르키소스, 혹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상대를 오래 봤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말 이해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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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어려운 질문에 정신분석적, 철학적으로 대답한 이가 있다. 바로 에리히 프롬이다. 그가 하는 말을 잠시 살펴보자.
 

 

Love isn't something natural. Rather it requires discipline, concentration, patience, faith, and overcoming of narcissism. It isn't a feeling, it is a practice.

 

 
그는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란다. 오히려 사랑은 훈련, 집중, 인내, 신뢰 그리고 나르시시즘을 극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프롬이 말한 나르시시즘의 의미도 살펴봐야겠다.

 

The narcissistic orientation is one in which one experiences as real only that which exists within oneself, while the phenomena in the outside world have no reality in themselves, but are experienced only from the viewpoint of their being useful or dangerous to one.

 

   
나르시시즘 경향성이란 오직 자기 안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단다. 프롬이 강조하는 훈련이란, 바로 이 자기애적 경향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림의 에코는 늘 나르키소스를 보지만, 사랑의 열병, 표현불능으로 인한 초조함, 사랑을 얻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기에, 보고 있어도 보고 있지 아니하다. 이에 그녀의 사랑은 상대를 놀라게 하고, 질리게 하고 말았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를 자기애적 관점에 물든 상태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젠, 이런 생각도 든다. 나르시시즘적 시선을 과연 극복할 수는 있는걸까.
 
 
 
질식할 것 같은 사랑은 왜곡된 자기애적 시선 때문일까

 
이 사색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그림을 소개한다. 마그리트의 ‘연인들’이다.
 
 

[크기변환]the-lovers-2_Rene Magritte.jpg


 
연인은 서로 키스하고 있지만, 질식할 듯 흰 천에 감싸여 있다. 이 천의 의미에 대해 다양하게 추측하는 일은 분명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만하다. 그런데 오늘은, 이 천이 나르시시즘적 시선에 갇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답을 내려본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하고도 말이다.
 
이 하얀 천을 스스로 걷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천을 걷어내고 나면 자기애적 사랑에 스스로 질식해 죽고마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인가.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조금 더 새롭게 ‘바라보는’ 하루가 되길.

 

I must try to see the difference between my picture of a person and his behavior, as it is narcissistically distorted, and the person's reality as it exists regardless of my interests, needs and fear.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내가 나르시시즘적 왜곡으로 그려 놓은 상대의 모습 사이의 간극을, 그리고 상대는 나의 이해ㆍ필요ㆍ두려움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이해하려고 해야만 한다.

 

에리히프롬-사랑의 기술

 

 
[배은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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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Andy
    • 글 잘 읽었어요.
      자기애적 사랑만 하면 다행인데 타인에게  그 화살이 가는게 더 비극인거. 같아요. 바이킹처럼 왔다갔다 하면 재밌을텐데 원웨이는 비극이겠죠?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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