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두 초인 3 - 니체의 초인 개념을 통해 본 '광야' [문학]

자유와 책임의 시대, 초인의 의의
글 입력 2020.10.0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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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던 자유에 초인은 없었고 독립은 썰물 뒤의 공백처럼 왔다. ‘일어난’ 독립은 억압의 사슬을 항거로 끊어내어, 당당히 승리하여 쟁취한 자유가 아니다. 쟁취한 때에야 자유는 우리 이루어낸 것, 즉 우리에게 단단히 소유된 것이 됐을 테다.

 

독립이 올 먼 미래에까지 줄곧, 투사들은 적에 맞서고 패배를 거듭하고 그럼에도 정의와 복수를 꾀하며 스스로 연마되는 칼날이었을 테고, 동시에 스스로 두려움에 대결하고 두려움을 이겨내며 인간을 극복하고 있었을 테다. 진정한 자유의 꿈을 키워갔을 테다. 그저 얻어낼 결과론적 자유가 아닌, 쟁취하여 마침내 소유하게 되는 진정한 자유에 대한 꿈. 그 꿈은 끝내 쟁취한 자유와 그 어려운 자유를 쟁취하게끔 할 가장 위대한 인간, 극복된 인간, 즉 초인에 대한 꿈이다.

 

그러나 지상에 인공 태양이 뜨고, 버섯구름이 하늘을 가리니 적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최초의 폭발이 있었고, 곧 그들은 두려움에 파랗게 질려 썰물처럼 도망갔다. 이제 대결의 장이 아닌 비어버린 자리로서의 자유 광장에는, 당당한 승리자인 초인 대신 곧 기회주의자들로 가득 찼다. 제2 혼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적이 사라지면, 또 다른 적이 생겨나는 법이다.

 

한 개의 세기가 지난 지금, 나는 문득 우리가 잃어버린 그 초인이 궁금해진다. 이 땅에 예고된, 아니 언도된 초인은 희미한 형상만을 남긴 채 영영 알아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그 모습은 역사의 물결 아래 영영 잠기어 알 수 없게 되었으니, 나는 못내 먼 나라의 초인에게로 눈을 돌리어보는 것이다.

 

‘두 초인’, 이 땅에서 자유를 쟁취할 백마 탄 초인과 먼 땅에서 인간을 깨우치는 망치든 초인이, 어쩌면 서로 닮은 형제가 아닐까 하는 느닷없는 예기 豫期가 발한다. 비록 초인에 대한 각각의 명명은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둘 모두 인간을 넘어선 어떤 존재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번엔 니체의 초인을 톺아볼까 한다.

 

중략


니체의 초인은 여기까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그가 그리어 낸 초인의 면모에서 나는 백마 탄 초인과의 유사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그 초인의 면모에서 나의 초인인 백마 탄 초인의 초상을 ‘그리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다음의 시간이 나를 찾아와, 백지를 사투하고 있는 동안에나 시나브로 피어날 것이다.


- 두 초인 2 中

 

 

‘초인’

 

내 가장 애호하는 이 단어를 입에 머금어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둘 있다. 이육사와 니체, 서로 상관이라곤 아마 없을 각각의 인물이다. 둘 사이에 있을 머언 공통점이라곤 아마 초인, 그러니까 인간을 넘어선 어떤 인간 존재에 대한 각자의 그리움, 그밖엔 없을 거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짤막한 시에서 제시된 것 말고는 별다를 주석이 없기에, 실질적으로 내 이렇다 할 인간형을 그려내기란 어려웁다. 짤막한 시에서 제시된 아름다운 승리자의 형상, ‘백마탄 초인’은 텍스트 안에 그 초상(肖像)의 단편, 말하자면 그려낼 퍼즐 조각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굳이 떠올려보자면 시인 그 자신, 그러니까 시 바깥에서 실재하였던 시인 자신의 수형번호 정도가 전부이다.

 

이제 그 시를 보고 느끼는 독자인 나로서는, 백마 탄 초인의 형상이란 엷디엷은 실루엣에 지나지 않다. 즉, 그것에 색을 불어넣고 뼈대에 살을 붙이는 것은 오롯 나의 몫이란 뜻이다. 만약 독자인 너와 내가 이제, 그 초인을 원하고 그리워하게 되었다면 말이다.

 

백마 탄 초인,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 압제 하의 인간이 가지게 되는 소망, 고통으로 벼려진 끝에 분출되는 그리움이었겠으나, 이제 시대를 넘어 내게 닿았을 때는 한없이 멀고도 먼 얼굴이 되어버린다. 나는 여하간 자유인이기에, 억압받은 이의 빠알간 소망을 체험하지 못한 까닭이다. 즉 초인은 글 안에 갖힌 채, 시대를 넘어 여기 내게로 닿을 그 길을 잃어버린 채 있었던 것이다. 바라던 자유에 초인 없었으므로.

 

나는 별안간 그 모습을 다른 초인에게서 찾아보려는, 이상스런 생각을 갖게 된다. 말했듯, 내가 이제 그를 원하고 그리워하게 되었으므로… 그러나 육사의 초인을 니체에게서 찾아보는 이 일이란, 기실 그 구상의 단계에서부터 우스운 일이리다. 둘 사이에 당초 그 무엇 연관이 있겠느냐는 의문은 내게 가장 먼저 찾아온 회의로운 질문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도 불구하고 내 그를 일단 찾아보겠노라 밀고 나아온 까닭이란 다만, 내가 그를 원하고 그리워함, 그 뿐에 다른 것일랑 없다.

 

*


‘초인’

 

이 애매한 단어, 그러나 그만으로 능히 나를 홀리어 몇 밤을 새우게끔 한 이것은 과연 무엇이었느냐. 나는 이제 차라투스트라를 덮으며, 드디어 이 ‘다음의’ 질문에 도착한다. 칠부 능선에 오른 인간이 할 수 있고, 또 하게 되는 바로 그 질문, 여지껏 걸어 올라온 이가 드디어 밟아온 길의 의미와 의의를 스스로 물어보는 바로 그 질문이다.

 

여전히 초인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초인이 내게 무엇이었느냐고는 스스로 물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의 불가한 소망이외다’고, 나는 내게 퉁명스레 답하게 된다. 불가한 소망. 초인은 자신을, 정확히는 자신의 ‘그 무엇’을 초월했다고 여겨지는 인간이되, 실상인즉 여전히 그는 인간으로서, 그가 초월해내야 했던 ‘그 무엇’의 수원을 아마 영영 간직하고 있을 한 명의 인간 존재이기에 그렇다.

 

초인이 인간인 이상에야, 또 초월의 대상인 ‘그 무엇’이 우리가 인간인 이상 완전히 벗어낼 수 없는 것인 ‘오욕 五慾의 부산副産’인 따름에야, 그것과의 영영 작별은 불가한 일일 것이다. 적어도 좀체 불가해 보이는 일이다. 내 제아무리 그를 열렬히 바라고, 눈물로 소망한들 말이다.

 

초인, 가정된 초월한 인간은 분명히 여전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 무엇’을 일단 초월했다고 가정한들 그는 여전히 인간이다. 초인은 결코 신에 도달할 수 없기에. 그렇담 초인 그는 대저 무엇이고, 무엇 의의를 가지는가. 아니, 그 전에 그가 극복한 ‘그 무엇’의 실상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어떻게 인간은 그것을 끝내 극복하였노라고 표명할 수가 있는가. 이것들이 바로 초인에 대한 나의 질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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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초월의 대상으로 삼는 것, ‘그 무엇’의 공란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을 테다. 니체가 언급한 ‘영혼의 빈곤함과 더러움과 가련하기 그지없는 안일함’이 있을 것이고, 오욕, 나약한 의지, 합리화와 자기기만 등 그 외 많기도 할 테다. 나는 이러한 ‘너무도 인간적인’ 많은 것들이 끝내 정복될 수 있는 것이라곤 추론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어느 위대한 승리를 마지막으로 하여 그러한 모든 욕망과 안일함들이 더 이상 이 마음 안에 샘솟지 않게 되는, 그런 정복의 순간이란 결코 없을 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육체는 자체로 끊임이 없는 수원, 그것이 피올리는 오욕과 또 오욕이 부르는 부산물들이 있었으니, 이 순환은 존재의 역사 안에서는 영겁의 일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육체가 생존을 위해 언제까지고 욕망하고 꿈꾸는 한 말이다.

 

초월한 인간을 가장한들 여전히 그는 신 아닌 인간으로서, 초월의 대상인 ‘그 무엇’을 영영 내재하고 있는 한 마리의 인간이다. 그렇담 ‘그는 어떻게 스스로 초월하였노라 공언될 수가 있는가’라는 다음의 질문이 잇따르는데, 나는 그를 다만 ‘영원한 투쟁’의 방식에 의함이라 표명하기로 한다. 오욕이 거기 자꾸만 있고, 내가 그것과의 대범한 대결을 시도도 해보았다간 언제나 패배하여 나는 자꾸만 번민과 회의만을 가지곤 마는데, 결국의 언젠가 내게 그 대결을 아주 놓아버리고 싶은 체념이 짙게 떠오른들, 떳떳하고 마땅히 그를 놓아버릴 수가 추호 없다면은!

 

없다면은! 땀으로 눈물로 거듭 가는 것밖에 수 없다. 오욕이 제아무리 무성하고 영원한들, 그 앞에 내가 떳떳이 패배한 다음 능히 거두어질 수 없다면은…… 이 거둠은 나의 높은 나, 나를 바라보는 보다 높은 나에 의함. 나의 나에 대한 인정과 자긍의 원리를 따르는 행위이다. 초인은 이러한 우리들 중 가장 아름답게 피어있는, 매일이 피어나는 나약함을 너끈히 이겨내는 어느 굳건한 존재의 상상이다. 매일 승리하는 이, 언제까지고 승리하는 가상의 존재. 즉, 초인은 더 이상 번뇌 없는 존재라기보다는, 어떤 번뇌와 얼마간의 번뇌로도 끝내 꺾이지는 않을 존재인 것이다. 이 ‘이상 개념’의 의의는 어렵고 마땅한 우리 대결을 위해 저기 피안에 표지되는 상징, 곧 이정표로써의 기능에서 생겨난다.

 

즉, 내게 있어 초인의 개념은 영원한 목표이자 이정, 영원한 바다이고 우리는 그 바다를 향해 언제까지고 나릴 하얀 손수건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한 이상, 정복될 수가 없기에 도착 없는 목표이고, 그렇기에 더욱 아름답게 저기 피안에 서 있어야 한다. 내가 그를 흠모하여 자꾸만 거듭하게 하도록, 혹 다시 일어나게 하도록.

 

일찍이 극복의 대상인 오욕과 그 부산물, 온 인간적 한계들은 이제 그저 대결의 대상이 된다. 대결엔 끝이 없으니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가 이에 할 수 있는 것이란 극복과 승리가 아닌 패배하지 아니함이 될 테다. 즉, 이제 초인의 가르침은 영원한 대결의 의지로 읽힌다. 그리고 이로써 초인에게는 굳건함과 비장함이라는 의의가 생겨난다. 그려보라, 패배할 줄을 알고서도 영영 투쟁을 멈추지 않는 이의 뒷모습을. 어쩌면 실패뿐일 기특한 대결로 나아가는 자의 뒷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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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초인에 대한 키워드는 지난 화, 두 초인 2에서 톺아보았다. 키워드는 ‘밧줄과 심연, 경멸과 몰락, 그리고 창조’이다. 니체가 한 초인의 교설을 요약하자면, ‘우리는 짐승으로부터 초인을 향하여 심연 위에 가로놓인 밧줄이고, 그 위 어느 곳이건 가만 멈추어 있을 수 없는 곡예사이다. 우리는 이 줄을 타고서 저편 피안 너머인 초인을 향해 가야 한다. 나아감은 경멸을 통한 자기 창조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그 뒷모습은 몰락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이것, 몰락은 역설적으로 보이나, 경멸을 통한 자기 창조의 숙명이다’라고 줄여볼 수 있겠다.

 

니체는 초인이 극복해야 하는 것을 ‘그 무엇’이라는 애매한 단어로 표현하였다. 또한, 그 무엇을 극복해 낸 인간인 초인을 가정함에 있어, 예언과 예고의 방식을 택하였다. 차라투스트라 그는 초인을 ‘예고’하는 자로서, 그가 교설하는 초인의 가르침이란 그 실상에 대해 논한다기보다는 무수한 가정법을 택하고 있다는 말이다.


초인은 저편 피안 너머의 존재, 완성된 인간상의 가정임에. 우리가 여기 인간의 대지에 서서 저편을 상상하고 가리킬 때에는 하나의 단어, 모종 확언을 담보하는 단어를 통해서나 명기된다. 그러나 위와 같이 그 실상을 톺아보면 그것은 결코 완성되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까닭인즉 우리가 언제까지고 우리의 인간적 한계를 내포할 까닭이다. 인간적 한계, 그것을 계속이 퍼올리는 하나의 수원은 곧 이 육신이었으니, 죽지 않고서야 끝 날 일 없을 이 인간적 한계는 거듭 내게 주어지는 하나의 도전, 시험이다.

초인은 인간을 벗어날 수 없기에, 초인의 시험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테다. 고로 우리는 어느 시점의 인간에게 비로소 초인이라는 칭호를 하사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초인이란 하나의 이정표, 불가한 목표라는 이상적 기치의 상징으로써 기능한다. 초인의 실질적 의의는 끝없을 대결에서 비롯된다. ‘밧줄인 인간은 심연을 넘어 저편 피안의 초인을 향해 언제까지고 나아가야 하고, 그런 때에나 사랑스러워진다’는 니체의 말이 이와 같지 않은가. 초인은 노스텔지어이고, 그를 향해 언제껏 나부낄 나는 하얀 손수건이다. 깃발은 바람에 맞서 나부낄 때, 역경 속에 제 온몸을 자랑스레 펼치는 그때에야 사랑스럽다.


*

 

여기까지 사고를 전개한 다음 백마 탄 초인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그 초인은 어떤 이인가. 아니 어떤 이일 것인가. 분명히 제시된 모습일랑 없고, 각주와 설명 또한 부재하니 형상화는 그를 그리는 나의 몫이다.

 


광야(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나의 눈에는 이 짧막한 시 안에서 숨쉬고 있는 백마탄 초인에게도 이상의 초인 개념이 보이는듯하다. 이 초인은 천고의 뒤, 까마득한 세월 뒤에나 오실 이, 기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이이다. 그는 여기 광막한 들판에 오신단다. 무엇으로 오시는가, 어이 오실는가. 그는 시인에 의해 소환되고 있다. 시인이 눈 내리는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림으로써 천고 뒤 초인을 소환하고, 그로 하여금 광야를 두고 호령토록 ‘하리라’고, 즉 그러한 염원을 빚고 있는 것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그렇담 그 초인은 어떠한 이인가. 그는 태초 이후 단 한 번도 범犯해지지 않은, 가장 순결한 땅 광야에 도착하곤, 그 앞을 호령하는 이이다. 어떤 산맥도 넘보지 못한 이 땅에 최초로 강림하실 이, 아마 가장 순결하고도 고고한 이이다. 이 순결성은 백마의 이미지와 쉬이 결부된다.

 

아무도 온 적 없는 순결한 그 땅, 광야. 초인이 도착한 그곳은 어떤 의미에서의 ‘새’ 땅이었을까. 현실적으로 어떤 산맥도 침범하지 못했고 발견되지도 않은 땅일랑 있을 리가 없다. 시인의 입장과 배경을 고려해보자면 차라리 이것은 가상의 땅으로, 의식이, 아마 민족의 의식이 당도할 어떤 새로운 대지라 보는 편이 타당치 않을는지. ‘의식의 새 대지’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묘연하다. 그럴 것이 이 새로운 땅을 실제적 의미에 입각해 바라보자면 시의 메시지는 새 땅을 찾아 새 터를 잡고 아주 새로운 국가, 혹은 천도를 선포하자는 의미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 개척되지 않은 땅일랑 없는데도 말이다.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광야는 45년 발표되었다. 동생의 손에 의해서, 즉 그가 이미 떠나고 없는 때에. 시가 언제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시인 육사는 43년에 구금되어 1년의 옥살이 중 44년에 옥사했으니, 아마 옥중 獄中에서 쓰이지 않았겠는가 추정한다. 그렇기에 시는 더더욱 의지적이다.

 

끝없는 광음 光陰, 빛과 그늘, 즉 주야 晝夜를 지나, 계절과 역사와 시대가 흐른 끝에 ‘비로소 큰 강물이 길을 열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광막한 대지에 씨앗을 뿌릴 때가, 즉 초인을 염원할 때가. 백마를 타고 오실 초인, 옥중에서 그를 그리는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 것이며, 그 의도는 무엇이었겠는가. 눈이 내리고, 매화 향만 홀로 가득한 지금 여기, 옥중에서 시인은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뿌린다. 시작 詩作이다. 시는 노래의 ‘씨앗’인 것이다. 그 씨앗이 발아하여 피어날 노래란 무엇인가. 그 노래가 바로 초인이다. 그 씨앗인 시 詩가 여기 심기이고, 천고 뒤 언제든 발아하여 피어나면 노래가 될 것이니, 그 노래가 바로 초인이다. 그 노래는 ‘광야에 목놓아 부르는 초인’의 음성일게다.

 

옥 안에서 의지의 노래를 지었다. 때가 되었노라며. 그러나 시인은 거기 홀로 남았고, 씨앗만이 여기 바깥으로 전달되었다. 정말이지 그것은 씨앗이었구나. 시는 세기를 지난 지금에까지 길이 남은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노래가 언제였는지, 혹 언제일는지 모르겠다. 바라던 자유에 초인은 없었기에. 1부에서부터 거듭 말하였듯, 시인이 예고한 초인은 역사로 증명되지 않아 알 수 없어졌다. 이후 그 누가 있어 이 초인의 빈자리에 걸맞겠는가. 나는 모르겠다. 이 백마 탄 초인의 빈자리는 너무도 무겁고 숭고한 자리이기에. 아직도 천고 뒤를 오고 있는가.

 

보았듯 시 ‘광야’는, 초인에 대한 예언의 서 書이다. 그 예언엔 기한도 없고 어떤 약속도 없다. 다만 언제고 초인은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짜인 아름다운 노래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마 옥살이, 강점, 온 억압 하의 인간에게서 익어가다간, 마침내 터져 나온 희망에 대한 자기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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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인의 의도를 참작하여 백마의 초인을 그려본다. 이는 다분 상상과 추론에 기대어 보는 일이다. 천고 뒤에 오실 님은, 실은 오실지 아니 오실지 모를 보기 드문 님. 하마 시대의 초인은 불분명한 예언, 미덥지 못한 약속처럼 여기에 짜여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시인의 의지는 이에 대비되며 돋보이는데, 그가 언제 도래하건 여기 내 뿌린 노래의 씨앗은 그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이며, 기어이 이 태초의 땅에 오신 때 목놓아 부르게끔 하리라는 것이다.


이 시를 이해하는 열쇠는 초인에 보다는, 그 초인이 도래할 곳인 광야에 대한 해석에 가로놓여 있는듯하다. 하늘이 열린 이래, 억겁의 지각 변동 속에서도 오롯이 보존되어 온 너른 땅 광야. 드디어 이 땅 위로 큰 강이 길을 텄단다. 물이 차니 과연 씨를 뿌릴 때이다. 때는 이른 3월, 매화 향이 봉오리를 가득 채우는 계절에 때늦은 눈마저 내리니 더 없이 씨 뿌릴 때이다.

 

그야말로 사방 산인 여기 반도 땅, 너른 대지는 예로부터 우리께 귀하였으니 거기엔 만민을 배불릴 곡식이 자라고, 인간의 터전이 따라서 자란다. 바다로 내달리듯 가파르게 이어진 산맥을 양팔에 끼고, 멀리 지평이 보이는 여기는 누가 보아도 새 기틀을 잡을 터이다. 고로 초인은 이 새 땅에 시작을 선포하는 이, 즉 건국자이거나 지도자이다. 아마 이것이 초인의 부르짖음, 선포함인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하였듯 실제 의미로서 여기 태초로부터 간직된 새 땅은 없을 것이니, 시가 그리는 광야는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좋겠다. 즉 이 상징으로서의 광야, 상상 속 새 땅은 일찍이 없던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체제의 국가이니, 대한제국도 아니요, 속국도 아니요, 새로운 국가인 것이다. 시인의 시점에 국한해서 바라보자면 그로선 경험한 적 없는 새 나라, 대한민국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초인의 부르짖음으로써 선포되는 새 형태의 국가이다. 강도 일본으로부터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세우는 새 나라이고, 대한제국의 구습을 털어버리며 세우는 새 나라로서 여기 상상되어 있다. 희망의 속성이 그렇듯, 더구나 온갖 고초와 억압과 박해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속성이 더욱 그렇듯, 이것은 다분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형상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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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광야와 초인에 대한 가정을 마쳤다. 이 도화지 위로 드디어 백마 탄 초인을 그려볼 때가 온 것이다. 한편으로는 친일과 민족주의가,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각자의 진영을 고수하며 첨예히 대립하는 와중에 단결과 단합력은 약해졌으니, 나라를 집어삼킨 적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부국과 강병보다도 단합이 먼저인 시기이다. 백마 탄 초인이 절로 강렬한 지도자의 이미지로 그려진 까닭은 이렇듯 시대의 요구인 것이다.

 

당시 지도자는 어디서 오고, 어떻게 오는가. 미국의 원조를 약속받곤 바다를 건너서 오겠는가, 중국 공산당의 원조를 약속받곤 만주를 넘어서 오겠는가. 어떤 부국과 강병의 약속 내지 프로파간다를 퍼트렸던들 그로서는 분열된 의식을 헤쳐 모을 수 없을 터이다. 모든 산개된 투사들을 한 데에 모으고, 운동을 전개하여 3·1 정신을 다시금 만민에 고취시키고, 평화 시위와 무력 투쟁을 동시에, 그리고 꾸준히 전개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강력한 하나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현실적 방안에 더불어 단단한 대의와 명분, 그리고 이력을 가지었어야 한다. 그 이력이란 명예나 보이지 않는 훈장과도 같은 것, 그러니까 투쟁하는 삶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었을 게다. 모든 투사들의 마음으로부터 수긍과 존경을 훔치는.

 

여기까지만 그리어 놓고 생각을 해보아도, 과연 이런 이가 있을 것이냐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절로 든다. 가히 천고 뒤의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온다면은, 만약에 온다면은 하는 마지막 소망마저 꺾어낼 길일랑 그들에게 없었다. 어쩔 것이냐, 그가 영영 오지 않는들 적국에 납작 엎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테니 말이다.

 

고로 지도자이기 위해선 현실적 방안과 명분, 그리고 내력을 가지었어야 옳다. 전자는 차치하고 후자를 두고 논해보자면, 결국 당시 한 명의 강력한 지도자는 투쟁을 지나왔어야 옳다는 결론이 나온다. 참으로 당연한 이야기이다. 고로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가장 훌륭한 투사에서 나온다는 결론을 여기서 도출한다. 민족 지도자는 그 이전에 투사들을 단결하는 지도자여야 하기에. 가장 훌륭한 투사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고 나아가 겨레의 지도자로 거듭나는 수순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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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초인을 논할 때, 나는 오래된 투사들의 이야기부텀 떠올리게 된다. 까닭인즉, 가장 옳게 된 투사들이 행한 내적 고뇌와 대결들은 전부 초인을 위한 투쟁과 닮아 있었던 까닭이다. 오욕의 고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인간적인 한계들과 두려움에 능히 꺾이고자 하는 정신을 휘어잡고선 꺾이는 어느 때까지 몸으로 몸으로 밀고 나아가 전력으로 대결한 그들의 내적 여정이란 바로 초인으로 가는 그 길이 아닌가, 나는 생각드는 것이다.

 

앞서 수차례 언급했듯, 초인에는 도달이 없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각성하여 이 모든 인간의 것들로부터 아주 자유로운, 즉 이 모든 것들의 싹이 마르고 수원이 고갈되는 일일랑 없으리라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초인으로 가는 길에는 대결로 영위되는 여정 혹은 실패만이 분명하게 놓여 있다. 그러므로 초인으로 가는 순례자들은 아름다운 것이다. 세기를 지난 지금에까지 말이다.

 

인간을 초월한 인간, 초인의 개념은 참으로 역설적인 이상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듯 자연스레 피어난 까닭이란 우리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인 바로 그 이유일 테다. 더군다나 그것이 대의와 목표, 예컨대는 독립을 위해 더더욱 통렬히 요구되는 것일 때에, 투사들의 여정은 더욱 첨예한 것, 칼날 위에 마련된 것이 된다. 그들의 여정은 더욱 가차 없는 것이 되어 있고, 여정인 밧줄과 실패의 심연 사이 간극은 더욱 아득하게 멀어 있는 것이다.

 

독립은 예상과 달리 일어나버렸지만, 일어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던 일. 그때에 투사들이 강렬히 소망하고 염원하던 것은 다만 독립이었고, 생각해낼 수 있는 방안이라곤 투쟁이었다. 그리고 투쟁을 통해 당당히 쟁취한 독립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을 테고 말이다. 역사는 다르게 흘러가 버렸지만, 또한 역사에 만약이란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백마 탄 초인이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 바야흐로 억압의 잔재를 말소시킨 뒤 새 나라의 시작을 선포했더라면 어땠을는지. 여기 고대하던 독립을 쟁취하였고, 우리는 이제 쓴 역사를 밟고 서서 새로이 시작하겠노라 선포하였더라면 어땠을는지. 이것이 새로운 땅, 마침내 광야에 당도한 초인의 목놓은 부르짖음이었을 것이다.

 

그 새 땅에 도달하기 위해서 백마 탄 초인은 가장 위대한 투사였어야 한다. 그는 가장 훌륭히 자신을 뛰어넘은 이었어야 한다. 초인의 내적 여정엔 정복일랑 없지만, 매일이 쇄신하는 극복이 있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단결된 의지로 승리를 쟁취하였더라면 어땠을런가. 일제가 물러나자마자 세계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각축장이 되어버렸으니, 그 전선의 최전방에 가로놓인 우리는 새로운 시련을 받고,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따라 결국 분단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아무렴 그렇다 한들, 우리에게 그 초인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있었을 것이다. 씨앗은 노래가 되어, 구전되었을 것이다. 비록 내가 지나친 민족사관을 좋아하진 않지만, 또한 이러한 위인의 이야기야말로 민족주의 프로파간다의 좋은 제물이 되어 있겠지만, 그것은 한편으론 또 여전히 역사 속에 올곧이 누운 채로 구전되는 아름다운 정신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때 초인 개념은 저기 먼 나라의 것이 아닌, 이 땅의 역사로서 보존되고 만인께 기능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신념의 이정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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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초인은 시대 요구의 이상적 형상이다. 그것은 이정표로서 기능한다. 비록 그 예언은 두루뭉술하고 노래는 아직도 이뤄지질 않아, 영영 씨앗으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나는 무엇으로 이 노래를 다시 찾았고, 굳이 형상화해보기 위해 먼 나라의 이야기를 톺아보고까지 돌아왔던가. 글을 따라 걸은 여정이 길어, 이제는 그 첫 동기마저 희미하다. 다만 추측하기론, 내가 어떠한 강력한 의지인 대결의 의지를 그리워했던가 보다.

 

대립은 많지만, 대결은 적은 나날이다. 본디 대결은 나와의 것이자 또한 적과의 것. 바야흐로 지금 적은 어디에 있는가. 완전한 악으로서 표상되는, 분명한 적일랑 지금에 없다. 그러나 어떤 적의와 긴장만이 자꾸 감돌고 있는 것이렷다. 적이 없으니, 이제 이 땅에 서 있는 분명한 대결자는 나뿐이다. 나는 이 안온한 대결마저 가끔에 버거워, 이렇듯 위기 속의 투사들을 기억에서 꺼내어 본다. 잠들려는 정신을 깨우기 위해.

 

나로서는 별것 없는 나날 속이다. 경제가 어떻다느니, 정치가 어떻다느니, 이념이 어떻다느니는 전부 나와 아직 먼 이야기 속이다. 역병이 세계를 잠식했다는 보도는, 내 일상을 아주 조금만 불편케 하고 말 따름이었다. 다만, 늘 그랬듯 거짓과 위선과 기만이 여기에 있고, 위안과 위로를 갈구하는 정신들이 많다는 것만은 알겠다. 버거운 졸음에 겨워하는 정신, 그것은 나의 정신이기도 하기에.

 

이 점에서 나는 내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점만은 단단히 동의하면서도, 가끔은 그것이 하냥 버겁게 느껴지는 때가 이렇듯 찾은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버거운들 포기하고 눈 감거나, 눈 돌릴 수가 없는 것이라면 활로를 찾아야만 할 일이다. 그래 이런 때면, 그 애절했던 투사들로 눈을 돌리어 본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투사를 예언하는 노래를, 위안처럼 찾게 되는 것이었다.

 

초인을 노래하는 씨앗은 아직 본 적 없는 대지에 잠들어 있다. 초인은 아직 먼 천고 뒤에서 오고 계신가. 아니 애초, 작금에 초인의 자리는 남아있던가? 강력한 지도자는 이제 하냥 먼 이야기이다. 계급과 적이 사라진 시대, 지금에는 적의로서 형성되는 분명한 대의와 명분일랑 없을 테다. 바야흐로 자유와 책임의 시대, 정말이지, 정말이지 이제 우리에게는 스스로와의 대결만이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유와 책임의 시대, 드디어 대결의 상대는 오직 나뿐이다. 자유의 이름에 걸맞는 책임을 향하여, 도착일랑 없을 나와의 대결만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기특한 실패를 향하여…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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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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