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 영혼의 울타리를 매만지다 - 윤곽

글 입력 2020.09.3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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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데미안>을 이해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알을 깨고 나온 새. 고등학생이었던 어린 나는 그 알이란 것이 얼마나 두텁고 무거운 것인지 알지 못했다.

 

더욱이 그 알이란 것이 사실은 번데기에 가까운 것임을, 끊임없이 성장하고 우화를 반복하며 몇번이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파괴해야 했음을 알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파괴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라, 물 흐르듯 이어지는 삶 속에서 당연히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도.

 

사랑의 절대성을 의심하면서도 굳게 믿었던 나는 천진난만하게 아름다웠던 꽃밭의 환상에서 벗어나 사랑의 새로운 정의를 내리는 중이고, 신의 보호 아래 죽음이 크게 두렵지 않았던 또 다른 나는그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버리고 막막함 속에서 새로운 생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 과정을 거치며 참 많이 달라졌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꿈꾸던 이로서 글에 부여하던 가치도 극단적으로 변했다. 아름다운 감정을 속삭일 뿐인 예쁜 말들, 와닿지 않는 숭고한 가치를 읊조리는 멋진 표현들은 실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여긴다. 포근하고 예쁘게 포장한 예술적인 글 한편보다, 설령 굶주린 길 위의 동물에게 음식 한조각 건네는 일일지언정 누군가의 생에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는 일이, 그 삶 속의 치열한 투쟁과 경험을 나누는 것이 더 가치 있다.

 

처음에는 내가 이해하고 있던 가치와 기준이 무너지는 순간 세상 속에서 나란 존재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내 생도 끝나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쓰러질 때마다 내 영혼과 자아를 다시금 그러모아 새로운 초상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삶이었다.

 

책 <윤곽>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여성이 자신의 윤곽을 다시 그려나가는, 혹은 발견해나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작가 레이첼 커스크의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인지 글은 전혀 인위적이지 않다. 여러 사람들의 힘든 삶들이 날 것 그대로 펼쳐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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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겪고 자신이 믿어온 일상이 산산이 무더진 파예. 무너진 일상은 그녀의 자아와 영혼마저도 파괴해버렸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자신이 일궈온 삶의 어렴풋한 윤곽만이 남은 시점, 그녀는 다시 일어날 준비를 한다. 쌓아왔던 삶이 모조리 무너졌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살아가야갈 내일이 있다.

 

글쓰기 강의를 하러 아테네로 떠나면서 그녀는 자신처럼 이혼의 과정을 겪은 다양한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경청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앞으로 어떤 삶을 꾸려갈 것인지 답을 찾아간다.

 

이야기의 전개는 낯설고 불친절하다. 그녀가 아테네에 가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직 들을 뿐이다. 이야기는 파예의 시선을 따라감에도 그 이야기 속에 주인공의 존재감은 없고 그저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 귀만 있다. 몇번이고 이혼했음에도 사랑을 믿고 살아가는 남자, 이혼과 괴한의 습격을 받은 후 삶에 대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여자 등 요동치는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뎌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다만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오히려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떠나 말하는 이들의 관점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은 파예와 독자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준다. 삶의 속성 역시 그러하기에. 이처럼 타인의 삶에 귀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 파예는 오히려 자신의 자아와 삶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됐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흘러가듯 듣는 낯선 전개가 이어지나 금새 어렵지 않게 적응한다. 읽어나가다 보면 오히려 깊게 빠져든다. 그 사람의 삶이 어떤지 신이 아닌 이상 전지적으로 살펴볼 수 없고, 오직 그 삶을 경험한 사람의 관점을 통해서만 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이해의 한계. 그 이해의 한계는 실제 우리의 삶을 닮았고 이야기의 주제와도 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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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레이첼 커스크는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솔직하게 써내려간 자전적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윤곽을 찾아갈 기회를 선물한다. 특히 아내와 어머니로서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의 고통에 동조한다는 점도 이야기의 핵심이다.

 

책 <윤곽>은 3부작 중 하나로,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사회 속 여성관에 갖힌 이들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변해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 방법은 무언가 격동하는 상황에 자신을 밀어넣는 것도 아니고, 실천과 행동을 강조하는 것도 아닌, 그저 고요하게 타인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침묵 속에서 내면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는 여러 삶들. 책 <윤곽>은 긴 삶의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채우고 비워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해준다.

 

 

*
 
윤곽
- 삶의 윤곽을 그려나가는 이야기 -
 

지은이 : 레이첼 커스크
 
옮긴이 : 김현우

출판사 : 한길사

분야
영미소설

규격
128*188

쪽 수 : 304쪽

발행일
2020년 08월 10일

정가 : 15,500원

ISBN
978-89-356-6854-0 (03840)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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