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두 개의 나

글 입력 2020.10.0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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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수 높은 안경을 쓴다는 사실은 나를 매일 만나거나 어릴 때부터 친한 사람들밖에 모른다. 라식/라섹 수술을 하기도 어려운 눈이고, 수술이 두렵기도 해서 아홉 살 때부터 지금까지 안경을 쓰고 있다. 안경밖에 선택지가 없던 학창 시절에는 두꺼운 안경을 쓴다는 게 큰 콤플렉스였다.

 

렌즈라는 선택지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난시가 있고 알러지도 있어서 눈이 불편할 때가 많은데도 꾸역꾸역 렌즈를 낀다. 오래된 그 콤플렉스를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렌즈를 끼고 있을 때는 내 콤플렉스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렌즈를 벗고 안경을 낀 상태로 돌아오면 그게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닫는다.


안경을 벗은 나가 마땅히 드러내도 괜찮은 나라면 안경을 쓴 나는 그다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다. 전자가 이상이라면 후자는 현실에 가깝다. 이러한 괴리는 콤플렉스와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그것만의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두 개의 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무한히 발견된다. 한 가지 콤플렉스를 운 좋게 극복한다고 해도 두 개로 갈라지는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쾌적하고 안전한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현재의 나와,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한다면 집조차 구하기 힘들 내가 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 그럴듯한 글을 쓰는 나와 안일한 태도로 현실을 살아가는 내가 있고, 문화예술 업계에 종사하는 직업인인 나와 1인분의 생활을 유지하기 빠듯한 임금을 받는 노동자인 내가 있다. 나는 이쪽과 저쪽 사이를 오가며 저쪽에서 이쪽의 나를 들킬까봐, 또는 반대로 이쪽에서 저쪽의 나를 들킬까봐 전전긍긍한다. 둘 사이의 낙차에 휘청대기도 한다.

 

나의 오래된 믿음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실제의 내가 형편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를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누군가에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받으면 이런 나를 간파당한 것 같아 비참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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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단 하나의 자아, 완전히 통일된 자아로 살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다. 내 글이기에 나를 예로 들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대체로 조금씩 분열되어 있다. SNS의 자신과 실제의 자신 사이의 괴리로 괴로워하는 인물은 다양한 콘텐츠의 클리세로 자리잡지 않았나.


하지만 분열이 지속되고 거기서 자기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 사람이 망가진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자신이 생각하는 또는 바라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 괴리를 들킬까봐 허황된 말로 자기 자신을 포장하고 덮으려 한다. 다른 사람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직면해야 할 일들을 피해다니고 과거의 성과만을 이야기하려 든다. 뻔히 보이는 수를 반복적으로 쓰는 그 사람에게 화가 났다가, 실망했다가 이내 안쓰러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최근에는 무척 건강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운동하는 여자를 이야기하는 책의 북토크에 참여한 날이었다. 질문 시간에 참여자 중 한 명이 여자로 사는 게 즐겁다는 책의 한 구절에 의문을 표하며 어떻게 보면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보통 그런 성격의 질문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그런 의미가 아니라든가, 앞으로는 달라지겠다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하기 쉽다. 내가 그런 질문을 받는다고 해도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작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런 부분이 한편으로는 안일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 근데 맞아요. 안일한 거."

 


이렇게만 말한 것은 아니고 앞뒤 맥락이 더 있었으나 핵심은 저 문장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누군가 그 생각이 안일하다고 느낀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라는, '쿨한 인정'. 대답을 하며 작가는 웃고 있었다. 저 대답에서 질문한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나 '나는 이런데 어쩔거냐' 식의 뻔뻔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자신을 변명하려 하지 않고 상대방과 자신 모두를 인정하는 그 태도가 좋은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이쪽'과 '저쪽' 사이의 괴리가 적기에, 자기 자신에게 어느 정도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찰나였지만 그런 탄탄한 자아가 부러웠다. 앞서 말한 사람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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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 극과 극인 두 사람을 접한 이후 건강한 자아는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두 개의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는지도. 나의 현실을 내가 보여지고 싶은 이상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하는 건지 생각하다가 과연 그 두 가지가 일치하는 지점이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렇게 하다가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냥 지금의 나를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자니 어쩐지 포기하는 기분이 든다.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고 또 어디서부터는 노력으로 바꿔나가야 하는 걸까. 나를 인정하는 것과 방치(포기)하는 것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나이가 먹어갈수록 앞서 말한, 허황된 말만 늘어놓는 사람과 닮아갈 거라는 점이다. 중학교 어느 수업 시간, 선생님은 교과서를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뒤로 나가 서서 수업을 들으라고 말했다. 우물쭈물하다 손을 들지 못한 나는 그 수업 시간 내내 다른 교과서를 해당 과목의 교과서인 것처럼 펴 놓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교실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손바닥 가득 땀이 났다. 그 불안감이 생생하다. 오늘날까지 내 마음속 깊은 한 구석에 그런 종류의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다. '두 개의 나' 앞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그 당사자일 테다.

    

스스로 거짓말을 해야만 유지되는 자아, 들키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하는 자아를 가진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지는 않다. 상상하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 손에 잡히는 나는 어디에 있는지 잘 탐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종종 안경을 쓰고 낯선 곳에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무언가를 모른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 좀 더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려 애쓴다. 이런 일들은 단순히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것보다는 내 콤플렉스를 보여주려는 시도에 더 가깝다. 여전히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요즘 어떤 종류의 연습을 하는 중이다. 안일한 거 맞다며 웃을 수 있는 연습을.

 

 



[김선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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