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꺼이 불편하게 살아가기 [영화]

글 입력 2020.09.27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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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쓴다.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은 있었지만, 나의 삶이 더 바빴다. 그렇게 나의 행위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어쩌면 이 회피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삶을 좌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최근 방 청소를 했다. 영화 굿즈로 나의 책상을 채우는 걸 참 좋아했던 사람이라 사용하지 않지만 그저 그 자리에 있다는 점에 의미를 두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없는 빈 곳을 만들어서라도 그 인형의 짝꿍을 만들어준다. 혼자서 외롭지 않도록.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건 비싸서, 어떤 건 추억이라서 어떤 건 그저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서란 핑계로 결국 많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끝났다. ‘가치’, ‘추억’, ‘행복’이란 추상적 명제들에 인해서 결국 진짜로 바라봐야 하는 현실은 외면하고 살아간다.

 

최근 휘몰아치는 삶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다시 본연의 나를 찾아야만 했다. 채식 선언, 코로나 그리고 지방에 머물고 있다는 쓰리 콤보는 생활에서 결국 소외되게 된다. ‘기꺼이 불편한 사람이 되겠다’라고 선언한 2020년의 첫날은 그렇게 점차 저물어가고, 인스타그램 속의 나의 환경에 대한 항변은 그저 빠르게 지나가면 되는 한 사람의 말에 불과하다. 늘 나오는 플라스틱, 고기, 아쿠아리움, 동물원의 이미지 앞에서 그저 추억, 행복하다는 말과 함께 웃고 있는 인스타그램 속 사람들을 보면서 혼자 환경을 향해 항변하는 나의 모습에 일종의 무력감 더 나아가 불필요함을 느꼈다. 이곳에 나만 없다면 모두 완벽해 보였으니 말이다.

 

결국 그렇게 도피하면서 살았지만, 결국 나는 같은 의제서 머물게 된다. 떠난다고 바뀔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가. 하필이면 핸드폰, 노트북 배경화면이 환경 다큐이 한 장면인 것 때문일까. 그렇게 돌고 돌아 이곳에서 다시 항변한다. 일종의 죄책감 덜어내기다. 나는 환경을 향해 항변했다는 증거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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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에 입맞춤’을 ‘산호초를 따라서’란 작품을 보았다. 모두 환경 다큐멘터리며 봐야만 하는 현실이다. ‘대지에 입맞춤’은 끝까지 보지 못했다. 영화의 첫 시작, 내레이션을 맡은 배우이자 환경운동가인 ‘우디 해럴슨’가 자신은 이렇게 영화로 소리치지만 세상이 바뀌리라 보지 않는다는 말 때문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말이 아니었다. 현실을 모두 안다면 바뀔 수 있다는 희망 가득 찬 말 그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한 작품이 ‘산호초를 따라서’다. 물론 이 영화도 결국 나의 바람은 채워주지 못했다. 그 이유는 추후 설명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을 거다. 현실은 바뀌지 않으니. 다큐 ‘산호초를 따라서’는 현재 죽어가는 ‘산호초’를 조명한다. 왜? 라는 의문이 먼저 들겠으나, 산호초는 중요하다. 삶의 전반에 깔려있다. 우리가 생선을 먹을 수 있는 이유도 암 치료제도 백신도 대다수 산호초에서 시작된다. 산호초 자체의 생명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훌륭하다. 바다 전반에 깔려있는 산호초는 우리의 바다를 깨끗하게 해준다. 잠깐, 우리의 바다가 아니다. 그들의 바다가 맞는 표현이다. 나는 그 환경을 파괴하는 빌런일 뿐이다. 어쨌거나, 산호초는 바다를 깨끗하게 정화하면서, 다른 생물들과 유기적으로 살아간다. 서로 공생하면서 그들은 ‘생존’한다.


그들은 그저 생존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생존이 우리의 ‘생존’과도 연결된다. 산호초가 무너지면 바다 전반의 생태계가 망가지게 된다. 생존하던 바다 생명들은 생존할 수 없다. 철저하게 먹이 사슬 구조로 운영되는 바다 시스템에 의해서 한쪽이 무너지면, 차례대로 다른 한쪽이 무너지게 된다. 이제 우리는 푸르른 바다가 아닌 푸프렀던 바다로 돌아가게 된다. 지난 30년간 지구상의 산호가 50%가 소멸되었다. 남은 50%로 현재의 바다가 유지 중이다.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버티지 못하면 우린 자연이 섭리에 결국 우리를 맞길 수밖에 없다.


나는 인간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자신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환경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환경 운동가의 말이 있다.


"지구 온난화로 최후에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동물이다. 동물은 변해가는 환경에서 진화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인류는 진화하지 않는다. 결국 지구 마지막 날 인간은 존재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온난화는 동물 멸종이 무서운 것이 아닌 인류가 없어진다는 것에 초점 두어 생각해야 한다. 인류는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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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초가 죽어가고 있다. ‘백화’현상이라고 불리는 죽어감에 과정이 세계 곳곳에서 보이는 상황이다. 일정한 유기체를 이루는 산호초가 자신의 일을 점차 그만두고, 환하게 투명하게 자신을 보인다. 그 백화된 모습이 환경오염이 되었음에 증거란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백화’ 현상이 죽음이 과정임을 알게 되는 순간 바닷속에서 마치 시체처럼 보인다. 그리고 곧 그것들은 마지막 숨을 다하고 결국 죽게 된다. 죽어가는 과정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산호초’는 아름다워야만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알기에 더 환하게, 더 하얗게 자신을 보인 것 아닐까.


이런 백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다의 온도가 2도 상승했기 때문이다. 고작 2도라고 생각되겠지만, 그 2도의 차이가 세상의 전반을 바꾸고 있다. 생태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들고, 모든 생명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 현재 백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지역을 보면, 대한민국의 영토와 크기 비교가 가소로울 만큼 거대하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고, 지구는 계속 열을 뿜어내지 못하고 있다. 하필이면 지구에서 바다의 분포가 넓다는 것이다. 바다에 가장 많은 열이 쏟아지고, 결국 온도는 그렇게 상승해버린 것이다. 백화 현상의 이유는 한 줄로 서술 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유의 이유를 찾아가는 것은 길고도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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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로 백화 현상이 된 것들이 대다수이지만, 오히려 다르게 변화한 것들도 존재한다. 생명의 위대함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나는 이를 ‘최후의 발악’으로 통칭하고 싶다. 산호초가 스스로 햇빛에 영향을 덜 받기 위해서 ‘형광색’으로 빛난다. 더워진 바다 온도에 적응하고, 앞으로도 받을 햇빛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인간이 환경 파괴를 멈추지 않기에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변화해야 했다. 그저 아름답게 빛나는 그 환한 형광색의 네온 산호초는 살려주세요라고 발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죽으면, 바다 시스템이 망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산호초는 모두 알고 있듯이 바다 밑에서 존재한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란 작품이 나오기 전 ‘빙하를 따라서’란 작품은 현재 없어지고 있는 빙하를 추적한 다큐멘터리다. 같은 지구온난화를 다루지만, 한 곳은 대지에서 한 곳은 바다에서 촬영한다. 대지는 끔찍한 환경을 계속 목격하고 있어야 하지만, 계속 숨을 쉴 수 있다.


하지만 바다는 다르다. 숨을 쉬기 어려우며, 하루 종일 바다에서 머물 수 없다. 장시간 바다 촬영의 변수는 너무나도 많으나, 그 변수들을 계속 확인하면서 촬영하면 촬영의 본 의미가 퇴색되어버린다. 그들의 첫 바다 촬영 후 남은 것은 초점 없는 바다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분노는 바다를 향하지 않는다. 미처 그 변수를 생각하지 않은 자신을 탓한다. 오히려 자연에게 미안해한다. 자신의 실수로 버려진 그 시간 속 구하지 못한 자연들에게.


그들은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때아닌 태풍으로, 촬영이 어려운 상황이 닥치게 된다. 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촬영진들은 자신이 힘든 길을 선택한다. 매일 50곳이 넘는 곳을 각 2분마다 같은 촬영 장소, 같은 이미지를 2주간 촬영하는 것이다. 단순한 노동처럼 보이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일하는 곳은 바다다. 하루 4시간 이상을 바다에 머물면서 죽음을 촬영한다.


촬영진들은 무기력에 빠진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죽어가는 것을 촬영하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무력함이다. 바다에서 산호초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온 촬영진이 힘들게 올라오려고 하다가, 바다에 다시 빠진다. 그리고 플라스틱 쓰레기를 줍는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산호초가 죽어가는 걸 찍는데, 또 다른 문제가 있네.” 그렇다. 환경 문제는 유기적이다. 어느 한 곳만 해결된다고, 환경 오염의 의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어느 한 곳이 좋아지면 다른 곳도 좋아질 거란 희망이 생길 수도.


1980년대부터 산호초를 촬영했던, 사진작가를 만나게 된다. 한 카메라 감독은 그 사람을 보고서 꿈을 키웠다면서 감격해 한다.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지금 현재 상황을 알리는 것이다. 1980년부터 활동해서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던 사람이기에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은 이 의제를 다시 중요한 의제라고 선포하는 것과도 같다. 그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하루 사이에 악화되는 현실에 안타까움 그 감정을 내포한 한숨만 계속 쉴 뿐이다.


촬영진으로 일한 ‘ZACK RAGO’는 말한다. 그 현장에 있고 싶지 않았다고, 보고 싶지 않았다고 눈을 감고 싶었다고. 하지만 그는 계속 그 현실을 주목했다. 그 현장에 머물렀으며, 결국 이성적 사고와 감정적 사고의 충돌을 통해 이성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가 찍어간 사진들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길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그런 말을 들은 ‘찰리 베론’은 말한다. 자신은 그래도 그 세상을 보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그는 아름다운 산호초를 보았다. 백화현상이 이뤄지기 전에 그저 자연이 자연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시기의 바다를 목격하고 촬영했다. 그의 미래에는 망가져 간 산호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그는 그 현실에 안타까움도 같이 말했다. 자신이 처음 목격했을 때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가 사실을 고했다고 세상이 달라졌을까. 지금 수많은 과학자가 환경 단체가 위험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성적 사고는 완벽하다. 그러나 수많은 증거에도 변화하지 않은 세상에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정적 호소일 뿐이다.


찰리 베론은 힘들어하는 잭에게 그렇지만 참아야 하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하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잭이 자신의 나이가 되었을 때 후회하게 된다고, 나이가 들어 자신이 자신의 후손에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아요’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그 말이 아팠다. ‘세상을 변화시켰어요’가 아닌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말은 결국 이 의제는 사람들이 인식을 변화해야만 가능한 것임을 다시 상기해준다.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잭은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감의 버거움인지 혹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세상에 대한 슬픔인지 모를 표정을 한다. 하지만 둘 중 어디가 되었든 그는 고통스럽지만 죽어가는 산호초를 찍을 것이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다.


영화 중 선장 파티 장면이 나온다. 죽음 위에서 파티를 즐기는 모습은 그들은 죄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찾은 것뿐이다. 하지만 환경오염이란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이 시점 그들의 행복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영화는 그저 아파하면서 끝이 난다. 해결책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다. 솔직히 그 방법밖에는 없다. 하지만 과연 이 다큐가 누가 소비를 하냐는 문제에 직면한다. 애초에 환경에 관심이 있던 사람에게 돌아간다. 결국 환경 운동하는 이들에게만 이 문제점이 돌고 돌아서, 이 상황 이대로 유지된다. 변화 없이 그대로다.


경각심이란 말이 싫다. 경각심이란 단어가 그들의 행위 촉진에 막아버린다. ‘나는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어’란 말이 그들을 환경오염의 의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각심은 그저 생각일 뿐,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의제임을 우린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번 장마 사건으로 사람들은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인지했다. 자신의 세상 밖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자가 아닌 자신이 환경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그 경각심을 넘어서 행동해야 할 때다.


‘환경’이 나에게 큰 주제로 다가오게 되면서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생일에 많은 친구들이 생일 선물에 대해서 물어봤다. 하지만 웃으며, 모른 척하면서 대다수 받지 않았다. 내가 조금 더 용기 있었다면, 그 돈으로 기부해주면 더 고맙겠다고 했을 수도 있다.(하지만 용기가 없었다.) 생일 선물은 그저 나의 생일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지만 세상은 과연 행복할까란 의문이 들었다. 세상은 나의 탄생을 그리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그동안 파괴했던 사회에 화답하는 방법은 그 환경을 복구해야 함이 아닌 이제는 파괴하지 않음에 있다.


나의 삶은 가족들의 삶에도 연결되기에 가족들은 나의 행동을 ‘유별남’으로 통칭한다. 나는 격분하지만, 그 격분까지도 결국 유별의 한 요소에 포함되는 것뿐이다. 친구들에게는 궁금증의 대상이다. 물음표 살인마처럼, 왜 시작했어? 왜 그래? 왜? 란 질문들은 환경을 지키는 것이 마치 죄처럼 느껴진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고기를 먹지 않는 나를 고깃집에 데려가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이해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유일한 세 명의 친구가 그래하며 인정한다고 답해줬다. 두 명의 중학교 친구, 한 명의 대학교 친구는 그래도 내가 다시 세상을 향해 ‘환경을 지켜주세요’라고 외칠 힘을 준다.


그들의 힘을 빌려서, 나는 다시 외친다. ‘SAVE THE EARTH’

 

 



[박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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