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생각의 외주화'와 '혐오의 취향화'에 대한 단상 [사람]

'사이다 발언'과 '쿨'함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9.2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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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외주화


 

 

생각할 수 있는 근력이 없기에,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대신해 줄 강력한 타자를 갈구한다.

 

_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어크로스, 2020)

 


자신의 의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의견은 어떤 사안에 관련한 자신의 생각이나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견지하는 신념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견에 대한 근거를 어떤 식으로 마련할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신뢰하는 공적 타자나 매체의 의견을 자신의 의견으로 치환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하등 이상할 것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과정에서 비판적 태도가 결여될 때 발생한다. 의견은 빌려올 수 있으나 사고체계는 결코 양도될 수 없다. 개별적인 존재로서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독자성인데, 이 특권을 포기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trans]누벨바그.jpg
영화 누벨바그의 한 장면.

 


너무 많은 사건과 화두가 오고 가는 사회에서는 모든 일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쌓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휘발성 의제의 축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만들고 발설하는 것에 회의나 부침을 느끼면서 점점 자신이 (근거에 의해서가 아닌 심리적으로) 믿을만한, 그렇지 않다면 목소리가 크고 좀 더 앞에 나와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의견에 대한 신뢰의 판단 근거가 정합성이 아니라 강력함에서 비롯된다는 얘기다. 위에 인용한 “자신의 생각을 대신해 줄 강력한 타자”는 ‘사이다 발언’ 같은 행위를 제공하며 우리가 어떤 통찰 같은 것을 지녔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본인의 정신적 근력에 대한 과신을 유발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생산되는 것은 이런 자신의 모습과 의견(이라고 착각하는)의 주목을 바라는 영웅심리와 타인의 의견을 응시하는 게 아니라 재단하는 속단적 속성의 배양일 뿐이다.


결국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커튼 뒤편을 들춰봐야만 진실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 당연히 혼란스러운 과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진실은 결국 진실화 과정 속에 있다.” 그 실현 의지 안에서 사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하고 은연중에 그것이 유일한 해답처럼 얘기한다면 그런 사람의 의견에는 과감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 좋다.

 

 

 

혐오의 취향화_‘쿨’함에 대하여


 

 

(실존주의가 아닌) ‘싫존주의’라는 신조어는 부정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불호 표명과 타인의 혐오에 대한 정당화 사이에서 한국 사회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취향화된 혐오는 오늘날 사회 구성원이 함께 머리 맞대며 지켜나가야 할 사회의 기본 가치를 ‘미감’의 차원으로 소비하는 데 익숙하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억눌림 당해온 이들의 정의 어린 호소를 ‘구린 감각’으로 쉬이 판단된다.

 

_김신식 『다소 곤란한 감정』 (2020, 프시케의 숲)

 


가감 없는 호불호의 표현이 ‘쿨’함의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그거? 난 싫어요. 싫은 게 내 마음인 걸 어떡해요?’라는 식의 자기표현이 마치 어떤 멋스러움을 드러내는 척도로 쓰이기도 한다.

 

단순히 취향에 대한 재기 넘치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취향으로 눙쳐진 수많은 것들에는 타인의 존재 가치나 의견을 소거해버리는 무심함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우리들의 오랜 편견과도 관계가 있다.


비평가 김신식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런 즉각적인 감정 체험에 도모하지 않고 발언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감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감정의 시차”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정의 시차를 상상하는 힘에는 누구도 외따로 남겨놓지 않는 ‘따뜻함’이 있다.

 

이 따뜻함이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추앙받는 쿨함보다는 차라리 주목받지 않는 따뜻함의 언저리에 남고싶다. 나를 포함하여 냉기보다 온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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