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두 초인 2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서]

백마탄 초인과 망치를 든 위인
글 입력 2020.09.2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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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그의 가난한 노래가 기원하는 초인의 낯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영영 알 수도 없이, 범람하는 역사의 물결 속에 수몰되었다. 바라던 자유에 초인은 없었던 까닭이다. 그가 부르는 초인의 노래, 그 기림의 노래를 거머쥘 주인도 없이 바라던 자유는 찾아버리었다. 이제는 영영 알 수도 없이, 그 초인은 역사의 물결 아래 침몰한 것이다.

 

혹은 아직 머언 천고를 넘어오고 계신가. `다시 천고의 뒤에` 오실 당신 모습이란 내가 또한 흠모하는 모습. 이제 내 흠모하는 초인의 그 모습을, 흰 얼굴에 큰 눈을 한 모습 속에서 찾아보아야겠다. 두 초인, 그들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쩌면 형제일지도 모르기에. 육사의 초인도 니체의 초인도 여기 우리의 불가한 실현, 백마 탄 초인과 망치를 든 위인은 모두 인간의 자식일 터이니 말이다.

 

- 지난 화, 두 초인 1 中



바라던 자유에 초인은 없었다.

 

대한 독립은 쟁취된 것이 아니었다. 시인 이육사와 독립의 투사들이 예고하고 기리던 이 땅 대한의 자유는 이 땅 위의 인간, 백마 탄 초인에 의해 도래하는 것. 즉, 핍박 하의 ‘대한독립’ 네 글자에는 독립을 향한 짙은 그리움과 고대함에 더불어, 그 어려운 독립을 가능케 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이 깃들어 있다. 그 ‘인간’의 이름은 위대한 리더, 혹은 초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라던 자유에 초인은 없었고 독립은 썰물 뒤의 공백처럼 왔다. ‘일어난’ 독립은 억압의 사슬을 항거로 끊어내어, 당당히 승리하여 쟁취한 자유가 아니다. 쟁취한 때에야 자유는 우리 이루어낸 것, 즉 우리에게 단단히 소유된 것이 됐을 테다.


독립이 올 먼 미래에까지 줄곧, 투사들은 적에 맞서고 패배를 거듭하고 그럼에도 정의와 복수를 꾀하며 스스로 연마되는 칼날이었을 테고, 동시에 스스로 두려움에 대결하고 두려움을 이겨내며 인간을 극복하고 있었을 테다. 진정한 자유의 꿈을 키워갔을 테다. 그저 얻어낼 결과론적 자유가 아닌, 쟁취하여 마침내 소유하게 되는 진정한 자유에 대한 꿈. 그 꿈은 끝내 쟁취한 자유와 그 어려운 자유를 쟁취하게끔 할 가장 위대한 인간, 극복된 인간, 즉 초인에 대한 꿈이다.


그러나 지상에 인공 태양이 뜨고, 버섯구름이 하늘을 가리니 적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최초의 폭발이 있었고, 곧 그들은 두려움에 파랗게 질려 썰물처럼 도망갔다. 이제 대결의 장이 아닌 비어버린 자리로서의 자유 광장에는, 당당한 승리자인 초인 대신 곧 기회주의자들로 가득 찼다. 제2 혼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적이 사라지면, 또 다른 적이 생겨나는 법이다.


한 개의 세기가 지난 지금, 나는 문득 우리가 잃어버린 그 초인이 궁금해진다. 이 땅에 예고된, 아니 언도된 초인은 희미한 형상만을 남긴 채 영영 알아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그 모습은 역사의 물결 아래 영영 잠기어 알 수 없게 되었으니, 나는 못내 먼 나라의 초인에게로 눈을 돌리어보는 것이다.


‘두 초인’, 이 땅에서 자유를 쟁취할 백마 탄 초인과 먼 땅에서 인간을 깨우치는 망치든 초인이, 어쩌면 서로 닮은 형제가 아닐까 하는 느닷없는 예기 豫期가 발한다. 비록 초인에 대한 각각의 명명은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둘 모두 인간을 넘어선 어떤 존재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번엔 니체의 초인을 톺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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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2004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넘어서 그 무엇인가를 창조해 왔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이 거대한 밀물의 한가운데서 썰물이 되기를, 자신을 극복하기보다는 동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중략


형제들이여 말해다오, 그대들의 몸이 그대들의 영혼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를. 그대들의 영혼 자체는 빈곤함과 더러움과 가련하기 그지없는 안일함이 아니던가? 그렇다. 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바다이며, 그대들의 커다란 경멸은 그 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그대들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다. 그대들의 행복, 마찬가지로 그대들의 이성과 그대들의 덕이 역겨워지는 순간이다.


중략

 

그대들을 그 혀로 핥아줄 번갯불은 어디 있는가? 그대들에게 접종되어야 할 그 광기는 어디 있는가?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초인이 바로 번갯불이며, 바로 광기인 것이다.

 


사실, ‘초인’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아무래도 니체일 것이다. 그중에도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책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란 관련 학과인 서양 철학의 대학원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해했다.


서양 철학 근처도 가보지 않은 나로서는 이렇다 할 공신력 있는 해석을 선보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이런 무모해 보이고 얼핏 쓸모없어 보이는 시도를 하는 까닭이란, 다만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초인의 사이에 얼기설기 다리를 이어보는 일이란, 오직 나의 원함과 내 홀로 즐거움 말고는 까닭이 없을 것이다.


초인의 개념은 한창 생의 의미를 갈구하던 시기에 내게 스며들었다. 쓸쓸한 허무주의. 내 보잘것없는 슬픔의 시절 내내를 함께한 의식, 또한 보잘것없는 나에 대한 자의식이 피 올린 한없는 초라함의 벗. 상술할 생각일랑 없다. 다만, 그때 초인의 낱말이 내게 닿았고, 내 그를 친애하였으며, 그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그때의 내게 초인이란 강철 같은 신념의 소유자, 딱 그 정도로만 해석되었다. 그리고 그만으로도 족했다. 의미가 없이는 납득이 어려운 내 존재의 본질됨에, 그것은 쉬이 스며들고선 막연하나마 하나의 이정표로 기능하였다. 부여받거나 수여받는 의미가 적어지는 생의 시점, 그때 비로소 인간은 잠깐의 방황을 겪고서 의미의 창조자로 거듭나기 시작한다는… 초인은 나의, 어쩌면 유일한 동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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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이 극복의 대상이라는 말쯤은 누구나가 생의 어느 순간부터 인식하게 되는 명제이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영영 어려운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는 문제일 테고 말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이란 종은 ‘인간’으로 퉁쳐서 표현되기에는 종잡을 수 없는 존재. 우리의 종은 하나의 설명으로 포착되기에 개체 간 일관성이 적은 듯하다. 그 다른 표현으로는 자유의지가 있고, 손쉬운 표현으로는 개성이랄게 있지.


그러나 어디 개체 간 공유하는 보편적인 특성에서만 그러할까. 우리는 내적으로도 하나의 서사나 설명을 획득하지 못하는 존재. 존재를 표상 짓는 하나의 분명하고도 지속 가능한 설명은 우리에게 획득될 수 없었다. ‘나는 어떠어떠한 존재이다’라는 표현함, 그러한 표현과 특정지음을 통해 우리는 개인의 특정한 의미를 찾고자 애써보았지만, 다들 그렇게 실패하곤 했다. 내가 분명한 나를 찾고자 하고, 사유하고, 표현함으로써 마침내 나에 대한 앎을 가졌노라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찰나만큼만 불고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이것, ‘일체가 끊임없이 생멸함으로써 한순간 조차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바로 그 무상 無常함인 것일까.


한 개인을 설명하고자 가만 들여다보면, 그는 자꾸만 흐르는 강 같다. 이 안, 실존의 순간과 그 순간이 모여 이루는 서사는 무정형의 흐름이라 강 같다. 어느 정도의 연속상을 보이나, 특정 계기를 통한 찰나에 방향을 틀고 용틀임을 하는 듯한. 한편, 그 강은 가까이서 보자면 좌우와 고저를 막론하고 변화무쌍히 흘러가나, 멀리서 바라보면 단 하나의 거대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가리키는 곳이 아마 바다일 것이다. 가장 낮고도 가장 넓은 궁극의 그곳 말이다. 더 이상 오르내림 없이 평온하고도 잔잔히, 드디어 완벽히 멈출 수가 있는 그곳.


그러나 내 실존의 서사, 흐름, 즉 여정이 궁극적으로 바다를 가리킨들, 그것만으로 바다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어느 순간 시나브로 체화한바, 스스로에 대한 체념일 것이고 말이다. 고로, 중한 것은 바다를 향한 우리 여정을 스스로 어디까지 밀고 나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일 테다. 이 또한 우리가 어느새 지각하는바.


그가 묻는다. ‘그대의 몸, 즉 지각하고 직감하는 주체는 그대의 영혼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고. ‘그것은 비루함과 안일함이 아니었느냐’고. 그가 이런 짙은 부정의 단어인 모종 ‘경멸’을 남발하는 까닭이란, 그것이 비루함과 안일함에 멈추려는 스스로의 정신을 몰아댐으로써 존재의 서사를 바다를 향해 흘러가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 아니었을지. 강의 비유인 존재의 서사는 언제까지고 흘러가게 마련이라지만, 어느 샌가부터 그 물줄기를 잠그는듯하다. 적당히 표류하며 머물고자 함으로써. 그리고 그 까닭이란 정말이지 정신의 비루와 안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표하는 경멸이란 우선 듣는 이에 앞서 말하는 이 자신에 대한 것. 나를 포함한 만인이 스스로의 행복과 이성과 덕에 대해 경멸하게 하고, 결핍을 느끼게 하고, 그로써 다시 스스로를 몰아대고, 흘러가게 하고, 극복하게 하고, 결국 바다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초인이 바로 번갯불이며, 바로 광기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개인에게 극복됨이라는 과제를 떠올리게 하고, 머물고자 하는 모든 개인에게 자기 경멸을 일깨우고자 ‘번개’와 ‘광기’를 내리치는 주체가 바로 니체가 표한 첫 번째 ‘초인’이 된다. 응당 초인 그 스스로는 먼저 이 채찍, 번개와 광기의 주체로 상정되어 있다. 즉, 스스로 존재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몰아대고, 삶을 밀고 나아가는 존재. 그런 와중에 타인에게 번개와 광기를 내려 일깨우는 존재, 초인.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가운데 있는 것도,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마음껏 경멸하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마음껏 숭배하는 자이며, 저편 물가를 향해 날아가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과 희생의 근거를 별들의 너머에서 구하지 않고 언젠가는 대지가 초인의 것이 되도록 대지를 위해 희생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인식하기 위해 살며, 언젠가는 초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인식하려는 자를. 이러한 자는 몰락하려고 한다.


중략


나는 사랑한다. 행동에 앞서 황금의 말을 던지고 언제나 약속한 것 이상으로 행하는 자를. 그런 자는 자신의 몰락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인간의 머리 위에 걸쳐 있는 검은 구름으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 같은 자들을. 그들은 번개가 칠 것임을 알려주고 예고자로서 파멸한다. 


보라, 나는 번개의 예고자이며,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다. 이 번개야말로 초인이 아니던가.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사이의 존재이다. 까닭인즉, 우리 실존이 고정되고 박제됨으로써 하나의 이름표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요, 말인즉 무한히 변화하거나 변화되는 존재이자 영원한 여로 위의 존재요, 또한 그럴 수가 있는 존재인 때문이다. 짐승과 초인은 여기서 두 가지의 극단, 분명한 표지. 우리 인간의 좌표는 그 사이를 계속이 오가는, 영원한 진행상을 띠고 있을 터이다.


좌측 땅인 ‘짐승의 초지 草地’와 우측 땅이자 피안의 너머인 ‘초인의 대지’ 사이에 가로놓인 우리는 밧줄이고, 그 아래에 거대한 구덩이인 심연을 대면하고 있다. 짐승의 땅과 초인의 땅은 아득한 심연으로 이격된 두 공간, 그리고 인간은 짐승에서 출발해 초인으로 이어진 아마 유일한 밧줄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란 우리의 숙명이 초인에 닿아있음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향해 개척하며 밀고 나아갈 때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나아가야만 하는 가장 주된 이유를 드러낸다. 스스로 짐승이길 거부하는 우리는 이제 여정 위의 존재, 어떤 의미나 고귀함을 찾아 헤매이다. 찾을 수 없는 분명하고도 유일한 의미, ‘하나의 의미’ 혹은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밀고 나아가는 이 존재의 숙명이란 생득되는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 여정의 길, 여로는 밧줄이니 곧 위태로움의 비유이다. 우리의 밑에 그 두려운 심연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 사실은 우리의 매일이 또한 심연과의 대결인 때문이다. 이 유명한 심연의 비유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마 매일 밤 우리가 겪고 있는 끈질긴 고뇌와 지독한 회의, 그것의 수원 水源일 것이다. 그것을 달리 무어라 표현해볼 수나 있을까, 끝없이 어두운 구덩이인 심연이 아니고서야.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이 심연의 비유는 짐승에 멈추어 있을 수 없어 올라버린 밧줄 위에서도 우리는 멈추어 있을 수가 없다는, 우리 본질된 속성을 가리킨다. 이렇게 놓고 보면 모든 너와 나는 과연 멈추어 있을 수가 없던 것일까. 인생은 계속되고, 인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한순간조차도 짐승과 같이 무감히 멈추어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한편 전자인 짐승으로부터의 이탈과 후자인 밧줄 위에서의 곡예는 서로 다른 종류의 ‘멈추지 못함’이다. 후자는 전자에 비하여, 조금 더 애틋하고 눈물겨운 속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속성에서 인류가 오래도록 일컫고 칭송해온, 인간의 위대함이 표상된다. 우리는 멈추어 있을 수 없는 존재, 즉 자체로 목적일 수가 없는 존재, 분명히 그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영원한 운동상의 존재, 그러므로 자꾸만 개진되어야 하고, 개신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으로 나아가는가. 자신의 비루함과 안일함을 바꾸며 존재의 불가한 완성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분명 불가한 완성, 그러므로 영원한 목적이다.


그러나 이 얼핏 눈물겨운 숙명이 그럼에도 끝내 사랑스런 것인 까닭은, 이것이 오직 우리의 가능한 일인 때문이고, 그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우리 존재의 가능성을 떠올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밧줄인 동시에 그 밧줄을 밟아 건너는 존재, 우리는 저쪽 피안 너머를 꿈꾸어볼 수 있고 또한 건너갈 수 있는 존재. 그 사실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고, 그렇게 애처로운 고난을 짊어지고 애틋한 대결을 아득바득 부지하며 밀고 나아가는 바로 그때, 우리는 사랑스러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저기 피안 너머로 건너가고자 하는 곡예사들이다. 물론 많은 이들은 줄 가운데 어디쯤에서 심연을 알아버리곤, 줄을 부둥켜안은 채로 잊고 외면하고 잠들고자 하겠지만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기특한 ‘건너감’을 그는 ‘몰락’의 유의어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몰락이란 무엇인가. 얼핏 듣기로는 한없이 부정적이기만 한 것, 과장해보자면 추악한 것으로의 타락을 연상시키는 그 단어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과연 어떤 존재자가 있어 스스로의 몰락을 바랄까. 나는 나를 애틋하게 여기고, 여태 살아온 나의 여로를 못내 자랑스레 여긴다. 돌아보며 애틋히 여기는 나의 여로, 거기에는 어쩔 수 없음이 있고, 영 못난 것들이 있으나, 동시에 퍽 칭찬할 만한 것과 작은 위대함들이 있다. 우리는 이 작은 위대함에서 위안을 얻으며, 스스로에게 인정을 하사하며, 나의 지금을 견디어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곧 심연에 잠식될 것만 같아 두려운 까닭이다.

 

몰락이란 이 애틋한 나의 것, 내 삶, 내 생에 대함이라고, 필자는 읽는다. 어줍잖은 동정을 친히 바스러트리는 망치든 철학자, 니체에게 그런 소소하고 비루한 각 개인의 작은 것들을 향한 마지못함이나 연민이나 예의나 체면치레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이지 대범하고도 무례하게도 타인들의 작고 비루한 생과 그 의미들을 정면으로 타격한다.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부수어 정신을 새로 차리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몰락하라’고 명한다.

 

 

그들은 번개가 칠 것임을 알려주고 

예고자로서 파멸한다. 


보라, 나는 번개의 예고자이며,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다. 

이 번개야말로 초인이 아니던가. 


 

차라투스트라의 이 행위 자체는 한편, 벌써 스스로의 몰락을 예견한다. 즉, 그는 자신의 몰락을 알고, 그럼에도 행함으로써 밀고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의 불문율과 상호 간의 소극적 예의와 감정의 마지노선, 이러한 등의 규칙을 부러 어기며 자신의 삶을 밀고 나아가는 이에게는 곧 몰락이 찾는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


한 개인의 작고 비루하고 소소한 일상에 대한 자기 긍정의 태도와 타인의 그것에 대한 긍정의 태도는 이러한 작은 울타리에 감싸인 채, 보호받음으로써 존속되는 것. 만인에게 내면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생각되기에, 감히 이 영역을 침노하며 난동을 부리는 이는 머잖아 만인의 공분을 샀다. 그리고 만인의 동의된 공분과 그에 대한 만인의 추상 秋霜 같이 굳건한 신념과 태도는 이제 그 인간, 성역의 침범자에 대한 심판으로 화하니, 그것이 곧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몰락이다.


그것이 곧 몰락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왜 그래야 했는가. 왜 몰락의 지대한 두려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 몰락으로의 방안을 택했고, 왜 그것으로써 나아가야 하노라 말했는가. 그것은 이 뒤의 경멸에 대한 이해와 이어진다.


 

저들은 그저 서서 웃기만 하는구나. 내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내 입은 그들의 귀에 맞지 않다. 우선 그들의 귀를 치워버리고 눈으로 듣도록 해야 하나? 꽹가리처럼, 참회의 설교자처럼 요란을 떨며 말해야 하나? 혹 그들은 더듬거리며 말하는 사람만을 믿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나름대로 자랑스러운 것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그것을 교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교양이란 게 있어 그들이 염소치기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멸이라는 말을 듣기 꺼려한다. 이제 나는 그들의 자부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그들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말종(末種) 인간이다. 


중략

 

슬프다! 인간이 동경의 화살을 더 이상 자신의 너머로 쏘지 못하고, 윙윙거리며 활시위를 울리게 할 줄도 모르는 그런 때가 머지않아 오겠구나!


그대들에게 말하거니와,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인간은 자신 속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슬프다! 인간이 더 이상 별을 낳지 못하는 때가 오겠구나! 슬프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경멸스럽기 그지 없는 인간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경멸스럽기 그지 없는 인간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보기에 과히 불안한 인간이다. 그는 머잖아 몰락하고, 처형될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사실을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만인의 내면을 침노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으로 쏘아대며, 자신이 참 진리를 선포하고 있노라고 떠들어대는 인간에게는 가장 먼저 멸시와 경멸이 쏟아지고, 나아가서는 몰락과 끌어내림과 처형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러했는가. 그는 자기과시의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 어리숙한 인간이었는가? 그렇다기보다는 그가 스스로 필요한 경멸과 필요한 몰락을 바투 거머쥔 것이라 생각한다. 초인의 씨앗들이자 밧줄인 우리의 잠을 깨우기 위해, 번개로 때리고 광기를 접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가 그러해야 하는가? 그냥 그렇게 홀로 살아가도 괜찮지 않은가? 무엇을 위하여 뭇 타인을 번개로 때리고 광기를 접종하고, 각성의 경멸을 던지고, 그로써 스스로 몰락으로 걸어가는가. 글쎄.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타당한 방도일 테고, 그것이 그의 사랑하는 방식이 아닐지. 인간에 대한 사랑은 무던 아껴주고 그저 지켜주고 하냥 품어주는 것이어선 안 된다. 그때 그 사랑의 피조물은 편안한 품속을 파고들곤 그저 잠들기에. 만약 그의 사랑함이 가장 참되고 또한 지혜롭다면, 그는 자신의 사랑을 더욱 높고 아름답고 찬란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것은 내 아버지의 나에 대한 사랑.


그의 이 행보를 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까닭은, 그가 그 스스로를 몰락으로 던질 아무런 까닭이 사랑 말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치광이의 광기처럼 보이는 이 사랑, 아니 그 전에 이 희생에는 까닭이랄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만약 그가 허영심을 주체하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다. 뒤틀린 사랑이란 생각드는가. 그러나 그가 하는 것이라곤 한갓 독한 말 몇 마디에 불과했다. 그리고 아마, 곧 그를 향해 소리 없는 분노와 모의가 찾을지도 모르지. 차라투스트라는 그것을 예견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는 것이다. 가장 충격적이면서 타당한 사상을 교설하고, 그 대가로 몰락당하는 것. 경멸을 잊고 잠자는 이들을 깨움으로써, 그들의 경멸의 첫 번째 대상을 스스로로 지정하는 것. 나는 이 뜬금없는 일이 머나먼 곳에서 불어오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기를, 대중인 과반의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랑스러운 것’이 있고 그것은 ‘교양’이니, 그들은, 그들의 교양은 무례하고 교양 없어 보이는 행위를 거부하고 그러한 사고방식인 ‘경멸’을 부정한다. 그러나 경멸이란 어쩌면 우리의 부끄러우나마 자연스러운 사상의 한가지,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다만 밀어 넣고서 보려 하지 않는 일이다. 개인적으론 이 논리가 경멸의 무조건적 표출을 지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마땅히 경멸할 것을 경멸하라는 뜻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많은 이들은 ‘경멸’을 전방위적으로 부정하고 거부한다. 그렇게 되면 마땅히 경멸해야 할 것마저 무비판적으로 경멸하지 못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 마땅한 것이자 가장 경멸스러운 것이란 ‘말종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참으로 과격하고 파격적인 발언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말종인간,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인간이니, 자신의 비루하고 안온한 것들을 소중하고 애틋히만 여겨, 그것을 품고 깊이 잠드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품고 잠든 자들, 그들에게 내면의 혼돈은 없다. 그들에겐 자기 자신이 완벽하다 생각되진 않아도 그럭저럭 보아줄 만 하고 그럭저럭 인정해줄 만 하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나름대로 자랑스럽다고 여기기도 하겠다. 이것은 필요한 안락함, 그러나 그 안에서 잠든 이에게는 쇄신이라는 창조가 없다. 창조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언제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창조에서마저도 그것은 결핍과 못마땅함, 차라투스트라식으로 하자면 그 대상에 대한 ‘경멸’이 우선 필요했다.


사랑하여 그저 아끼게 되는 것을, 제 손으로 부수어낼 수는 좀체 없는 법이다. 그러나 창조는 모종 파괴를 필요로 하고, 너무도 깊은 사랑과 애틋함과 미련은 대상에 대한 파괴와 이별을 추호 불허한다. 만약 그것에 대한 진득한 사랑을 지니고서도 그것의 쇄신과 번영과 창달을 위해, 즉 창조를 위해 버려내고 바수어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가장 사랑하는 이로써 가장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어쩌면 이것은 폭력은 아닐까. 아니, 창조를 위한 파괴와 경멸이 반드시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폭력이 파괴와 경멸을 수반하지만, 창조도 파괴와 경멸을 수반하는 것이라면, 둘은 분명 다른 층위의 별개 행위일 테다. 사랑하는 이를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해 안온한 파괴와 사랑스런 경멸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나는 체험했다. 이 사랑의 행위는 결코 혼자만의 사랑, 혼자만의 강박, 혼자만의 독단이 아니이다. 만약 그렇게 행해지려는 창조가 있다면, 그것이 아마 더욱 흔할 것인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이다. 그때 이미 사랑은 저도 몰래 집착이 되어 있었을 테다. 참 어렵기도, 또 모호하기도 하지.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왜 나는 거듭 창조되어야만 하느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아주고, 그대로 못난 나를 받아들여 주고, 내 존재의 현재를 가만 인정해줄 수 없느냐는 반문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서두에 그렇게 말함으로써 못 박은 것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전제로써 선포한 것이다.



가축 떼 중에서 많은 가축을 꾀어내기 위해 내가 왔다. 군중과 가축 떼는 내게 화를 내리라.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양치기들로부터 강도라고 불리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그들을 양치기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착하고 의로운 자로 자처한다. 나는 그들을 양치기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올바른 믿음을 가진 신자로 자처한다.


보라, 저 착하고 의로운 자들을! 그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그들이 존중하는 가치들을 적어놓은 서판을 부수는 자, 그 파괴자와 범좌자를 가장 미워한다. 사실은 그가 바로 창조하는 자인데도 말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찾을 뿐 시체를 찾지 않으며, 가축 떼나 신자들을 찾지도 않는다. 또한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서판에 써넣으며 함께 창조할 자를 찾는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그리고 함께 수확할 자를 찾는다. 창조하는 자 앞에서 만물은 익어서 수확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자신의 낫을 갈 줄 아는 자들을 찾는다. 그들은 파괴자요, 선과 악을 경멸하는 자들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수확하는 자요, 축제를 벌이는 자들이다.`


중략


"더 영리해지고 싶다! 나의 뱀처럼 송두리째 영리해지고 싶다! 그러나 나는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의 긍지가 언제나 영리함과 함께 하기를 바랄 뿐이다! 언젠가 나의 영리함이 나를 저버린다면, 아, 나의 영리함은 언제나 달아나려고만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긍지도 나의 어리석음과 함께 날아가 버리기를!"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여기까지가 본 책의 서문이다. 인용도 길지만, 생략 부는 훨씬 길다. 참으로 기나긴 서문이었다. 여기 서문엔 이 중구난방으로 쓰인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전부 들어가 있었다. 인용부는 그에 비해 짧아, 미처 놓친 것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서 꼽은 니체식 초인의 키워드는 ‘밧줄과 심연, 경멸과 몰락, 그리고 창조’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초인을 향해 심연에 가로놓인 밧줄이고, 그 위에 가만 멈추어 있을 수 없는 곡예사이다. 우리는 이 줄을 타고서 저편 피안 너머인 초인을 향해 가야 한다. 나아감은 경멸을 통한 자기 창조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그 뒷모습은 몰락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이것, 몰락은 역설적으로 보이나, 경멸을 통한 자기 창조의 숙명인 것이다.

 

 

그들은 파괴자요, 선과 악을 경멸하는 자들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수확하는 자요, 축제를 벌이는 자들이다.`

 

 

왜 경멸의 방식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몰락해야 하는가? 경멸이 아니고서는 자기 자신을 온전한 창조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상을 완연히 새로운 것으로 창조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전체에 대해서 미련을 놓아버려야 한다. 이제 자신의 새 창조를 위해 자신을 경멸하려는 자는, 아마 그러한 대담한 방식의 문제적 태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주변에 가로놓인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자신의 새 창조를 위해 그 어려운 자기 경멸을 능히 행하고, 그를 위해 나의 새 비롯됨을 막는 그 안온하고 비루하고 연약한 타협의 굴레를 끊은 이에게 이제, 자신의 주변에 가로놓인 모든 실체들도 더불어 경멸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지’로 가득 차 있던 의식의 대지는 이제, ‘해야 한다!’라는 명령의 땅으로 변한다. 생각해보라. 이런 이가 이제 삶을 살 적에 그의 걸어가는 행보를 뒤에서 가만 지켜보자면, ‘몰락’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겠는가. 혹은 ‘반사회적 인물’이라는 인식표가 그의 등 뒤를 꼬리처럼 따르게 되지 않겠는가.


한편, 그 누구도 이러한 몰락의 방식을 따라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 누구도 차라투스트라에게 창조적 파괴와 창조, 경멸과 몰락이라는 방식의 사랑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차라투스트라 그의 독단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적어도 대부분께 그렇게 해석될 일이다. 그는 그의 독단으로 대중들에게 경멸의 불씨를 지피고, 깨우고, 자신을 몰락하게끔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태의 안온하고 비루한 테두리를 넘어서는 경험을, 그리고 그를 통해 테두리의 거기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스스로 미리 예견한바, 번개의 예고자가 된다. 예고자를 자처한 것이다. 그는 대중의 분노와 돌팔매질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구도 의무를 갖지 않고, 누구도 요청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이러한 불편함과 불쾌함과 불경함을 원치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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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그는 예견된 몰락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부나방과 같았을까. 그에게는 선지된 목적이 있으니, 부나방과 같지 않다. 목적을 위한 감수, 위대하다고 칭송받기까지는 어려울 한 사람의 희생이다. 그것은 다만 그의 사랑하는 방식, 인간 전체에 대한 자기만의 염려와 방안이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밧줄이라는 사실, 그리고 밧줄 아래에 까마득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이 본질 같아, 변함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만히 침잠하며 슬픈 심연으로 가라앉을 것이냐, 혹은 영원한 꿈에 살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마침내 불쾌하고 고통스럽게나마 곡예를 거듭할 것이냐. 우리는 초인의 당상 堂上이 아닌 씨앗, 그리고 곡예는 어차피 영원한 것이기에, 그렇기에 이 모진 질문은 우리에게 개진되고서 마침내 의문이라는 의미를 낳는다.


아무도 그에게 요구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은 교설. 또한, 교설하는 이 스스로에게도 그래야 할 의무나 당위가 없던 그 교설. 나는 이것이 다만, 보기 드문 방식의 사랑이라 생각한다. 자기 혼자만의 사랑, 그러나 그것은 더 사랑하는 이의 자기희생의 방식으로 개진된다. 그것은 내 아버지의 나에 대한 사랑에 닮은 것. 다 지나고서야 아아, 할 일이다. 요청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으나 날 피워낸 당신의 사랑은 자기희생의 방식으로 개진된다. 내가 요청하지도 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 지나고 반쯤 피어서 돌아볼 제에나, 아아, 하고 알 일이었다.


니체의 초인은 여기까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그가 그리어 낸 초인의 면모에서 나는 백마 탄 초인과의 유사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그 초인의 면모에서 나의 초인인 백마 탄 초인의 초상을 ‘그리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다음의 시간이 나를 찾아와, 백지를 사투하고 있는 동안에나 시나브로 피어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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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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