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생과 사를 가로지르는 역설의 미학 [도서]

정미경 작가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2004)
글 입력 2020.09.15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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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높은 목소리로 우는 걸 보면 여자는 생을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대체로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사람들은 우니까.”

 

-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p.240



정미경 작가의 단편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에 나오는 문장이다. 낡고 축축한 골목, 이웃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잠시 들어와 살게 된 정은이 옆집에서 들려오는 미옥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는 말이다. 미옥은 남편과 싸우면서 소리 높여 울고 정은의 방에 허락도 없이 불쑥 도망쳐온다. 남편이 잠들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오히려 남편이 더 불쌍하다면서 해맑게 웃으며 산다.

 

미옥은 “사는 것도 지랄 맞은데 동화마저 아파야 돼? 무조건 해피엔딩이라야 해.”(p.274)라고 말한다. 삶은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백일몽을 꾸며 산다. 백일몽을 꾸든, 꾸지 않든 삶은 고통일 것이므로. 미옥은 누구보다 생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승우는 ‘어떤 고통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일상의 잔인한 영속성’을 미옥에게서 보고 그것을 영화로 기록하려 한다. 정은은 치과의사인 윤조와의 ‘쿠바리브레’ 같은 미래를 앞두고 있었지만, 치자꽃 같은 웃음을 가진 미옥과 묘한 긴장감이 드는 승우와 함께 밥을 먹고 ‘탱고차이’를 마시며 그곳에 점차 정을 쌓는다.

 

하지만 그곳이 윤조보다 편하게 느껴질 무렵, 미옥은 남편에게 살해당하고 일상은 잔인하게 끝이 난다. 승우는 자신이 기록하려던 건 ‘이처럼 일순에 삶을 뒤엎어 버리는 가짜 같은 드라마’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승우는 당분간 ‘피사체가 뼛속 깊이 행복한 순간’인 웨딩 비디오를 찍겠다고 한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결혼도, 미옥이 살해당한 것도 역시 삶이다. 드라마 같은 일이 아니라, 그런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일들이 항상 일어나는 것이 삶이다. 정미경 작가는 생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이들에게 고통과 어우러진 삶의 모순과 역설 모두 ‘그것까지가 삶’이라고 냉정하게 알린다.

 

미옥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높은 목소리로 울고, 고통스러워하고, 치자꽃 같은 웃음을 짓고, 죽었다. 승우는 삶의 아름다운 면만 보며 그 이면에 가려진 고통은 외면했고, 정은 역시 그랬다. 정은은 짐작했던 대로, 원래대로 윤조와의 삶으로 떠난다. 다만 미옥과 정은의 틈 사이에,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었기에 희미하게 빛나던 빛을 기억하며 앞으로는 빛나지 못할 것이라 담담히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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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가 수록된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삶과 세계를 날카롭게, 동시에 뜨겁게 그려낸다. 또 다른 수록작인 「성스러운 봄」에서 ‘나’는 아파하는 아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고통을 사는 것뿐인 듯한 치료지만 아이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본인은 빚의 고통에 시달린다.

 

결국 ‘나’는 고통의 연속에서 아이를 구하고자 치료를 연장하지 않고 아이는 떠나지만, ‘나’는 여전히 계속해서 빚과 생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손해 보험 사정을 하는 ‘나’는 저마다 다른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과연 그것을 고통이라 말할 수 있는가?’, ‘고통뿐인 삶을 계속할 가치가 있는가?’ ‘끝내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 거듭한다.


 

“카테터를 뽑아 버린 순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삶은 스스로 완벽하다는 것을. 어떤 흐트러진 무늬일지라도 한 사람의 생이 그려 낸 것은 저리게 아름답다는 것을, 살아 있다는 것은 제 스스로 빛을 내는 경이로움이라는 것을.”

 

- 「성스러운 봄」, p.161



강유정 평론가의 해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이자 삶의 감각”(p.299)이다. 삶이 있어야 고통도 있고, 삶을 사랑하기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정미경 작가는 고통과 죽음이 필연인 삶을 차갑게 직시하면서도, 삶은 ‘스스로 완벽하다’며 생에 대한 온기를 잃지 않는다.

 

‘나’는 ‘어떤 흐트러진 무늬일지라도 한 사람의 생이 그려 낸 것은 저리게 아름답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역설적으로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울고 싶어질 테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연속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가혹한 자신의 생 또한 또 다른 무늬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삶의 고통스러운 이면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나오는 빛을 기억하게 한다. 어떤 얼룩이 있든, 어떤 모양이든, 그 모든 삶은 완벽하다.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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