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도서]

예술이 궁금하다로 살펴보는 미의 기준에 대한 고찰
글 입력 2020.09.1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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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P.배틴 <예술이 궁금하다>

 

 

미술을 전공하며 동기들과 나눈 말들 중 인상적인 것이 있다. ‘배울수록 점점 더 미술이 뭔지는 점점 모르겠지 않아?’라는 말. ‘미술(美術)’이라는 한 분야의 전공에 대해 공부를 더해가고 있음에도, ‘미(美)’를 알기 어렵다는 말은 배울수록 미의 범주가 넓어져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의미였다. 미술이란 것이 단순히 아름다운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술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 안에 자리잡은 이후로 또 다른 차원의 고찰이 시작된 것이다.

 

미의 기준이란 참으로 모호하다. 시간과 공간, 개인의 애호 등 다양한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마거릿 P.배틴이 저술한 <예술이 궁금하다>는 미학과 관련된 실생활 속 예시들을 퍼즐을 조립하듯 풀어가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사례들 중 세 가지의 예시를 들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살펴본다.

 

긴 시간에 걸쳐 발전한 미술사조 속 수많은 작가들은 각자의 미적 가치를 작품에 담고자 했다. 때로는 인간의 힘으로 창작한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황금비례와 조형미를 가진 작품이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고, 과거의 양식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거나 작가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행동이 예술이 되기도 했다. 시간이 좀 더 흘러선 더 이상 전시장에 걸린 작가의 작품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관람자가 있을 때 비로소 완성이라 일컬어지는 작품까지 생겨났다. 그렇다면, 이토록 다양한 작품들이 어떻게 공통적으로 사람들에게 ‘예술’로 여겨질 수 있던 것일까?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의 미인식 - 아름다운 산악풍경과 존 케이지의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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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케이스에 등장한 산악 왕국의 주민들은 수세기 동안 자신들이 처한 지형적 조건을 비관한다. 이는 단순히 주관적인 판단이 아닌, 실제적인 불편함과 낙후된 상황이었다. 주민들의 통념을 변화시킨 것은 낭만파 시인들의 자연 장관에 대한 호평이었고, 이 평가가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며 실제로 아름다운 공간으로 여기게 된다. 이 일화를 통해 우리는 언제, 어떻게, 무엇에 의해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으며, 무엇이 그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플럭서스와 해프닝의 영향을 받아 전개된 신체미술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음악가인 존 케이지의 <4’33”>는 이 산악풍경 일화와 무척 닮아있어 흥미롭다. 많은 관중들이 모인 무대에 턱시도를 차려입고 나타난 존 케이지는 진지하게 안경을 쓰고 악보를 넘기고선 별안간 피아노 뚜껑을 덮어버린다. 무려 4분 33초라는 자신의 공연 시간동안 건반 한번 누르지 않은 것이다.

 

실제 4분 33초의 악보에는 3악장 동안 단 하나의 음표도 악보에 그려져 있지 않다. 피아니스트가 연주해야할 음계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그의 음악을 듣고자 한껏 귀 기울이고 있던 관중들은 낯선 소리들이 만들어낸 연주를 듣게 된다. 바로 홀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웅성임부터 시작해 사그락거리는 작은 백색소음들이 악기가 된 것이다. 존 케이지의 의도를 파악한 관중들은 공연이 마치자 큰 박수갈채를 보낸다.

 

험준한 산악 왕국이 분명 여러 지리적 악조건을 가진 곳인 것처럼, 존 케이지의 <4분 33초> 또한 어떤 소리도 연주하지 않은 무음에 불과했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것이었다. 잔뜩 기대한 마음으로 클래식 연주를 들으러 가서 피아노 뚜껑을 덮어버리는 피아니스트를 만나고 싶던 관객은 누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낭만파 시인들이 산악 왕국의 주민들의 미인식을 바꾼 것처럼 존 케이지는 관중들이 백색소음의 아름다움에 귀 기울이도록 유도한다. 주민들과 관중들은 공통적으로 일상에서 늘 함께하고 있던 것에 대한 고정된 통념이 있었다. 주민들에게는 지형이 그러했고, 관중들에게는 백색소음이 그러했다. 각각 ‘낭만파 시인들’과 ‘존 케이지’라는 계기를 만나 아름답다는 감상의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이 일화를 통해 미는 대상 자체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감에 의해 지각하고 감상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미적 가치판단은 가변적이기에, 시기나 조건에 따라 변하기도 하며 일화와 같이 계기에 따라 변화할 수도 있다. 시인들과 존 케이지는 그들의 시야를 넓혀주는 역할을 했다. 가치 없다고 느낀 것들을 눈여겨보게 하고, 귀 기울여 감상하게 함으로서 판단 기준을 재정립하게 유도 한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대상에 따라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특성을 가진다. 또한 인간의 지각과 경험, 감상에 의해 판단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미의 표준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 미인대회의 낙선과 <목이 긴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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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케이스는 미인 대회에서 낙선한 여성이 주최 측을 상대로 항의를 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대회에서 낙선한 여성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물증들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 과거에 미의 표준이었던 것. 지난 당선자들과 대중이 이미 미인이라 공인한 사람들의 외양이 속한다. 둘째로, 미에 대해 판별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것. 전문가의 증언과 컴퓨터 분석으로 꼽힌다. 대회에서 심사의 지침으로 제시한 슬로건은 ‘미 자체에 주목해 심사를 할 것’이었기에 낙선한 여성은 자신이 가장 적합한 당선자였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표준이 언제나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획일화 된 규범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인지와, 전문성을 가지는 것은 과연 절대적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16세기 초 이탈리아에는 3대 거장이라 불리는 빼어난 작가들이 있었다.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 이 세 사람은 이전 미술사조에서 그토록 연구하던 해부와 화면구성, 조형, 원근법 등에 있어 통달한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회화와 조각 이외에 의학 등에도 두각을 나타낼 만큼 걸출한 사람들이었다. 미술사조에서 가장 압도적인 천재라 불리는 이들의 전문성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완벽에 가까운 조형미를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아름다움이라면, 응당히 뒤이어 그들의 작품을 모방하고 연구하며 미를 추구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르네상스 시기가 지난 이탈리아에는 이전에 거장들이 이룩한 완벽한 조형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매너리즘)이 나타난다. 매너리즘 시기의 화가들은 3대 거장들이 이루고 간 업적이 미술사의 큰 업적임을 인정하면서도, 더 이상 후대의 예술가들이 답습하는 것은 무의미한 어려운 구시대의 완결된 유산으로 여겼다. 이러한 이질감 사이에서 큰 불안을 느낀 화가들은 과거에 이상적인 표본으로 여겨진 미적 가치를 파괴하며 불균형과 불완전이라는 새로운 미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를 살펴보면 그 특징을 더욱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기이해보일 정도로 뒤틀리고 길어진 성모의 목은 자칫 잘못 보면 인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표현 기술이 부족한 것처럼 느낄 수 있겠지만, 성모 뒤에 놓인 프린트로 뽑아낸 듯 반듯한 원주에서 인체 왜곡이 작가의 의도임을 암시한다. 매너리즘 미술은 고전적 조형 양식을 긍정하면서도, 과거의 미의 기준이 언제까지나 영구한 표준이 될 수 없으며 전문가로 여겨진 거장들의 미가 어떤 기준에 있어서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양식을 통해 와해시킴으로서 논한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르네상스 미술 시대의 기준에서는 <목이 긴 성모>의 목은 분명 기이하고 조형적이지 못한 비례로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매너리즘 시대에서는 새로운 미를 긍정하려는 시대상이 반영되어 의도적 왜곡에 따른 아름다움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처럼 미의 기준은 추구되는 가치에 따라 변화하기에, 과거에 완벽한 표준으로 여겨졌거나 전문성을 띈 것이라 해도 그 결과는 다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상대적이며 가변적인 성향을 갖기에 절대적이고 영구한 기준으로 삼아질 수 없다.

 

고소를 진행한 여성이 승소하기 위해서는 대회 심사 지침에 미를 판단하는 표준을 대중들에게 공인된 대표적 미인과 과거 미인대회 우승자들로 한정하며, 그 판단의 척도는 특정 기준치를 통달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 혹은 프로그램으로 한다는 사항이 명시되어야만 한다. 아마도 이러한 미인대회가 열린다면, 매년 비슷한 외양을 가진 사람들만이 수상할 수 있지 않을까.

 

   

 

비미적인 취미판단과의 관계 - 잉카 궁전의 유적과 리처드 세라 <기울어진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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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케이스는 페루의 잉카 유적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적을 본 여행객들은 이 유적을 보며 무엇을 기준 삼고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해 토의한다. 한 사람은 유적 그 자체의 존재와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상자 개인의 가치 기준을 강조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유적이 만들어진 비윤리적인 과정을 지적하며 시각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더라도 진정 아름다운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술이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감상하게 해줌으로서 그 목적을 다 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례에서는 미의 판단 기준에 조형이나 예술의 요소가 아닌 다른 차원의 논의점이 제시된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공공미술의 장소 특수성 논란이 있다. 공공 미술은 장소라는 공적인 공간과 미술이라는 사적인 경험과 취향이 모두 반영된 것으로, 공적 유용성과 대중과의 관계를 모두 고려해야한다는 특징이 있다.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 리처드 세라는 미국 공적 기관의 의뢰를 받아 1981년 뉴욕 맨해튼의 페더럴 프라자에 <기울어진 호>라는 거대한 조각을 설치한다.

 

길이가 37m에 이르는 거대한 조형물은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과 동선을 가로막았고,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재료로 쓰인 강철이 녹슬기 시작하며 흉물스러워지자 철거 논쟁에 휩싸였고, 공청회와 소송 끝에 결국 1989년 해체되고 말았다. 이 논란을 통해 공공 미술은 기시감이나 공간 장악력이 필요한 성격의 예술이 아니며, 대중이 부여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가 작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례가 되었다.

 

만약 세라의 작품에서 심미적 가치만을 찾고자 했다면, 작품 자체가 가지는 힘에 집중해 보행자의 불편 등은 고려되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공공미술의 장소특수성이 판단의 가치기준이 될 때, 예술일지라도 공적으로 올바른 순기능을 해야만 한다는 몫이 새롭게 생긴다. 잉카유적과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 모두 공간을 장악하는 힘이 있는 유적과 작품이었다. 다만, 잉카유적은 유적을 짓는 과정에서의 문제를 가지고, 세라의 작품은 설치 이후의 문제를 갖게 된 것이다. 이때, 공통적으로 이 가치판단 기준에 있어서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라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잉카 유적을 짓기 위해 갈려 들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나, 느닷없이 검은 철조에 뚝 끊겨버린 페더럴 프라자 사람들의 불편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미에 대한 판단은 다른 기준들과 유리시켜 미 자체만 놓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잉카 유적과 같이 감상자는 아름답다고 느끼더라도 창작의 과정에서 비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역으로, <기울어진 호>처럼 작가는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여기더라도 감상자들이 비미적이라 느끼는 사례도 있다. 따라서, 미는 다양한 가치판단과 유기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미적 경험은 윤리적 판단을 비롯한 다양한 기준들과 함께하는 부분의 역할이 될 뿐, 그 기준들을 모두 지배할 수 있는 절대적 경험이 될 수는 없다.

 

세 가지 사례와 이어진 각각의 작품들을 살펴보며, 다양한 생각의 확장을 하게 되었다. 미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며, 대상의 영향에 따라 유동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또한, 미의 표준은 영구적이지 않으며 미에 대해 전문성을 가진 무언가가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질 수 없다. 마지막으로, 미는 언제나 독립된 가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사람의 행태와 직결될 경우 미는 다양한 가치판단 기준과 동일한 선상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미술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미에 대해 쉽게 정의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은 험준한 산악 지형에 불평하던 사람들, 미인대회에서 낙선한 것에 분해하던 참가자, 잉카 유적을 앞에 두고 고심하던 여행객들과 닮아 있었다. 사례들을 정리하며 미적 경험과 판단에 대한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게 된 것 같았고, <4‘33“>의 백색소음을 예술로 느낄 수 있던 관객들처럼 폭 넓은 예술을 이해하고 다양한 아름다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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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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