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의 집, 나의 '고요한 인생' [도서]

글 입력 2020.09.0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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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울하기 그지없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읽었다. 희망과 기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들은 슬픔이라는 감정이 느껴져도 기어코 울지 못하게 했다. 일곱 개의 소설을 천천히 읽었다. 하나를 읽고 책을 덮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이고 다시 읽었다.

 

책을 완전히 다 읽은 뒤에는 표지에 '소설'이라고 적힌 두 글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래 이 책은 분명히 '소설'이다. 그러니 이 모든 글자가 허구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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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문장은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누군가의 행동을 묘사한 문장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는 것보다 더 디테일했고 더 실제 같았다. 누가 천 뒤로 비친 색색의 옷들을 '생선 창자'라고 표현하겠는가. 문장은 끝없이 새로운 문장을 데리고 왔으며 나는 모든 장면을 영화 보듯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이 책의 표제작이자 첫 소설인 '고요한 인생'은 그렇게 새로운 문학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수은의 이야기는 내내 불편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책의 모든 소설이 그랬다. 불편함이 그리고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날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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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수은의 탄생을 원치 않았고 그 아이는 떠났다. 그 아이는 '많은 욕심은 없었다.' 그저 '좋은 가정에서 사랑받으면서 책 읽으며 아주 고요한 삶을 영위하는 것, 엄마 돈을 몰래 훔쳐내는 아버지 없이, 단지 다르게 생겼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 때문에 따돌림 당하지 않고 교양 넘치는 식탁에서 따뜻한 밥을 먹는 것'이었다.

 

중학생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기록을,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의 기억을 지우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면 조금 더 나은 인생이 될까.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원하는 시점에서 리셋 후 이름을 다시 짓고, 직업을 다시 선택하고, 겉모습을 바꾸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가족도 선택할 수 있다면 내 삶은 더 나아질까.

 

그 아이가 그린 인생은 정말 '많은 욕심'이 아니었을까. 삶이 늘 고요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수은이 선택한 지금까지의 아주 짧은 삶은 정말이지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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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무력하고 절망적이다. 특히 '기혼 여성'은 더욱 그랬다.

 

더 나은 삶을 마주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혹은 주변의 기대로) 한 결혼이 절망이 되어버린, 편히 쉴 수 있는 공간 하나 없는, 떠나지 않는 불청객이 된 것 마냥 남편과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사는, 원치 않는 관계와 임신으로 홀로 병원으로 향한 후 낙태 수술을 받는 그런 여성들.

 

가부장제의 폐해만 남은 가족이라는 투명한 글자 옆에 이들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 어디에도 미디어가 보여주는 행복한 결혼 생활은 없다. 누구도 웃지 않고 웃을 수도 없다.

 

 

"가난한 건 분명히 죄야."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니까.

내가 손을 내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편해하지.

그러니 본의 아니게 죄를 지으면서 사는 셈이지."

 

 

세 번째 소설 '언니의 봄'에서 언니는 화자인 동생에게 말한다. 사남매 중 누구라도 언니를 도와줄 수 있었다. 그들도 언젠가는 도와주리라 다짐했다. 다짐만. 나는 언니의 양팔을 붙들고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가난은 죄가 될 수 없다며 역정을 내고 싶었다.

 

그러다가 '남'의 가정사에 이리도 울분을 토해내는 내가 내 가족에게는 얼마나 충실했는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떠올리다 실소가 나왔다. 근데 가족에게 충실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피가 섞였으니까? 법이 그렇다고 하니까? 도대체 가족이 뭔데?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처럼 약간의 죄책감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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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휴학을 무기로 '대학생'이라는 글자가 적힌 조금 낡은 이름표를 일 년 더 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사이 종종 한적한 카페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곤 하는데,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이유로 지금 이곳에 와있는 걸까. 다섯 번째 소설 '낮술'은 그 사람 중 몇몇의 이야기일 거다.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던 나였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꽤 여유로워 보였다. 그땐 여유롭고 좋으니 지금을 즐기자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리고 졸업을 앞둔 지금에서야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때가 되면 나도 어딘가에 내 자리를 얻어서 일하고 있을 거라며 늘 안일하게 생각하던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이러다가 다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 때에 나 혼자 이도 저도 안 된 상태로 도태되어버리는 게 아닌지 불안하기만 한 마음을 겨우 꾹꾹 눌러 놓았는데. 이 소설을 읽자마자 불안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들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는 게 아니라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내가 참 남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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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예리한 시선이 돋보이는 소설'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그 기저에는 '내가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위로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서는 과도한 감정 이입 탓인지, 미묘한 공감 포인트 탓인지 위로는커녕 분노와 실의로 가득 차 나 자신마저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들', '언더독', '그 집 앞'과 같은 단편들은 유감스럽게도 철저한 타인의 이야기 같아 이해할 수 없고 주인공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도 불편하고 불안하며 불행한 문장들 속에 나는 가장 먼저 새롭게 나의 존재를 묻게 되고 이는 곧 확장되어 나의 가족과 타인의 존재를 묻게 한다. 나의 시선은 어딜 향해야 하며 어떤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문장이 문장을 부르고 이어 생각이 생각을 부르는, 내가 순수 문학에 가졌던 선입견을 깨준 소설이었다.

 

 

[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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